-
-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평점 :
《A.I.》에 대한 오마주 『작별인사』by 김영하
읽은 날 : 2023.2.8.
2001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A.I.》에서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기준은 유기물을 먹을 수 있느냐다. 인간과 거의 유사한 로봇 데이빗이 스윈튼 가족의 친아들 마틴을 질투하여 마틴과 똑같이 녹색 샐러드를 먹었다가 오류를 일으키는 그 장면은 인간과 로봇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다.
A.I.를 연구하는 미래 과학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주 묻는 것은 영화 《터미네이터》와 같이 인간과 기계가 전쟁을 하는 순간이 과연 올까요, 고도로 발달한 A.I.가 인간을 공격하지 않을까요와 같은 질문이다. 여기에대해 뇌과학자 정재승은 “A.I.가 지구를 지배하고 인간을 공격하려면 지구를 지배하겠다는 ‘의지(또는 욕망)’를 입력해야하는데, 기계에게 그 감정을 입력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미래는 오지 않는다고 2017년 알쓸신잡 시리즈1의 2화에서 말한 바 있다. (물론 이 견해는 많은 A.I. 연구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마는.)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면, 미래의 어느 시점, 사람들을 위해 ‘사랑’ 이라는 감정이 입력된 로봇이 만들어진다. 영어판 포스터에는 “His love is real. But he is not.” 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고 한국어판 영화관 팜플렛에는 “당신을 사랑하는 로봇, 데이빗” 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문제는 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사랑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사랑이 입력된 데이빗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감정이 질투와 ‘사랑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존재로 설계된 로봇이 그 사랑을 ‘나(즉, 자아)’도 받고 싶다는 욕망과 의지가 생기는 순간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야기의 이 시점에서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했던 질문이 떠오른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문예출판사, 1999, p. 269」
결국 인간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로봇까지 만들어 내는 것은 내가 그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할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있어야 하기에 사람과 동일한 외형을 넘어 사람의 감정까지 가지고 있는. 그리고 인간의 그 사랑은 무책임하다. 나의 사랑에 익숙하도록 만들어 놓고, 내가 사랑을 퍼부어 나를 사랑하게 해 놓고 상황이 달라지면 무심하게 돌아서 약간의 자기위안적 죄책감과 함께 버리고 만다. 그것이 로봇과 다른 인간의 속성이다. 설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아니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는 영속성을 가지나 그 사랑의 대상은 계속해서 바뀐다. 어린 시절 탐닉과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쏟았던 무언가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잊고 사는가. 인간의 사랑은 떠나가지만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 낸 ‘단 하나만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존재’는 그 사랑이 떠난 뒤 어쩌란 말인가. 책임을 지지도 않을(못할) 거면서 자아와 감정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 버리는 인간의 이기심.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스탠리 큐브릭과 손잡은 스티븐 스필버그는 데이빗을 만들고 작가 김영하는 철이를 만든다. 데이빗이 사랑에 특화된 존재인 반면 철이는 인류의 철학에 특화된 존재다.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는 ‘인공지능의 윤리적 선택’을 주제로 받은 아빠식 작명법이었다. …… 내 이름 ‘철이’도 ‘철학’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p. 26-27
“나? 나는 철이야. 철광석의 철이 아니고 철학 할 때 철.”
p. 60
김영하, 『작별인사』, 복복서가, 2022」
둘 다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만들어 진 ‘애완물’ 이라는 사실은 동일하다. 사랑을 받고(하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과 ‘인류의 유산을 차가운 데이터 센터가 아니라 정말 인간다운 마음을 가진 개체들 안에 보존할(p.228)’ 거창한 욕망의 차이가 있을 뿐. 그리도 동시에, 만들어진 개체의 욕망은 처음부터 배제된다는 공통점도 가진다. 모든 인간이 이에 대해 무감한 것은 아니어서, 영화에서 하비 박사도 동료 연구진과 설전을 벌이고, 소설에서 변호사와 철이의 아빠(또는 창조자)도 설전을 벌인다. 영화에서 하비 박사의 동료 연구자는 “로봇이 한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 인간은 그 대가로 로봇에게 무슨 책임을 져 줄 수 있나요?” 라고 질문하고 이 책에서 변호사는 철이의 아빠 최진수 박사에게 묻는다.
「“차라리 감정을 가진 로봇의 제조를 아예 법으로 금지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감정을 가진 휴머노이드는 원래 인도적인 목적으로 개발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다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시작되죠.”
김영하, 『작별인사』, 복복서가, 2022, p.182」
하비 박사의 동료와 최진수 박사의 변호사가 결국은 감독과 작가의 질문을 대신하고 있는 셈일 수도 있다. 도대체 당신들, ‘감정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 놓고 어쩌자는 거냐고.
버림받은 데이빗과 납치당한 철이는 동일한 형태의 모험(이라니;;;)을 한다. 데이빗은 로봇 곰인형 테디와 남창 휴머노이드 지골로 조를 만나 ‘플래시 페어’에 끌려갔다 탈출하고 철이는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민이와 선이를 만나 수용소를 탈출한다. 데이빗은 ‘다알아 박사’를 만나고 철이는 ‘달마’를 만난다. 이 과정에서 데이빗은 인간의 잔인함을, 철이는 인간의 감정을 닮은 로봇의 잔인함을 경험한다. 생존의 욕구만 남은 로봇이 다른 로봇의 부속품을 찾아 자신의 부서진 몸에 이어붙이는 장면은 영화에서도 충분히 기괴하였는데, 소설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나온다.
선이는 “인간은 지독한 종이야.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동원해 닥쳐온 시련과 맞서 싸웠을 때만, 그렇게 했는데도 끝내 실패했을 때만 비로소 끝이라는 걸 받아들여”(p.203)라고 말하지만 인간이 만든 로봇도 별로 다르지 않다. 수용소의 재화(에너지, 전기)가 고갈되었을 때, 그곳에 모인 로봇이 보이는 행태는 인류의 이기심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철이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집착한다, 물론 처음에. 데이빗은 처음부터 자신이 로봇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끝까지.
작가 김영하는 2022년 방영된 알쓸인잡 시리즈에서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아닌 것을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역사”라고 말한 바 있다. 처음에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은 자유민인 성인 남자였다. 그러다 노예를 해방하고, 여자를 인류에 편입시키며 아이에게도 인권이라는 것을 부여했다. 놀랍게도 노예해방의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다. 노예해방을 매개로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은 1865년 끝이났다. 300년이 채 되지 않은 역사다. 여성 참정권의 역사는 더욱 짧다. 인간의 역사가 이러할진대, 인류와 동일한 외형에 동일한 감정까지 가지고 있는 휴머노이드를 인간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까?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 여성의 자궁에서 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휴머노이드를 처벌할 권리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가능할까? 300년 전 흑인들도 물었을 것이다. 피부색이 희다는 이유만으로 검은 피부를 가진 누군가를 매매하고 죽일 권리가 있는 것인가, 라고.
다시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리면, 어령 샌님은 우리 인류가 이미 A.I. 시대를 경험한 바 있다고 말했다. 그게 바로 고대 그리스 시대라고. 노동과 생산은 노예에게 맡기고 그리스인은 그 철학을 논하고 정치를 하고 문학과 음악을 누리던 그때가 바로 A.I. 시대라고. 노예 대신 A.I.가 그 일을 해 줄 뿐이라고. 동일한 견해를 이호 박사도 알쓸인잡에서 말했다.
그리스 시대에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던 그 노예들, 아마 주변 정복 국가에서 잡아 온 그들은 3000년이 지난 지금 모두 그 그리스인과 동일한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 인정되었다. 그렇다면 A.I.의 미래를 짐작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와 책은 모두 인류의 멸종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데이빗은 인류가 멸종 된 2000년 뒤 단 하루 엄마를 만나 행복한 하루를 보낸 뒤, 설계된 대로 엄마로 입력된 사람의 죽음을 인지하면서 종료된다. 철이의 마지막도 같다.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인류(클론이긴 하지만 어쨌든 인간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선이를 만나 몇 년간을 보내고, 선이의 죽음 이후 자신의 뇌를 클라우드에 업로드 하는 대신 종료를 선택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나에게 영화 《A.I.》의 오마주로 읽힌다.
작가의 말에서 김영하는 “어제는 내 모든 원고의 첫 독자이면서 편집자이기도 한 아내가 교정지를 들여다보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냥 결말이 새삼 슬퍼서라고 했다.”(p.304) 라고 말했다. 결말에 이어 감상까지 동일하다.
그냥 결말이 새삼 슬퍼서.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미 막을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막아서도 안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 기술적 특이점이 오지 않았다는 견해가 현재로서는 지배적이나 그 특이점이 언제 올지는, 글쎄, 예측하기 힘들지 않을까. 바로 당장 내일이 될 수도, 100년 뒤가 될 수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감정을 가진 데이빗이 우리집에 오는 걸 보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러면 누군가는 그를 사람으로 대할 것이요, 누군가는 그를 기계로 대할 것인데, 그 윤리적 차이를 어찌 메워나갈지가 우리 인류에게 남은 숙제일 수도 있겠다.
p.s. 영화화 소식이 들리더라. 나라면 안 만들겠다.
2023.2.9. by ashima
당시의 인류는 온갖 것으로 고통받았고, 당장 고통받고 있지 않을 때에도 미래의 고통을 걱정하면서 또 고통을 겪었다. 현실을 망각할 정신적 마약, 즉 이야기는 무한히 제공되었다. - P45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 P83
수억 년간 잠들어 있던 우주의 먼지가 어쩌다 잠시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해 의식을 얻게 되었고, 이 우주와 자신의 기원을 의식하게 된 거야.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잠깐을 이렇게 허투루 보낼 수는 없어. - P99
인간이란 얼마나 취약하고 불안정한 존재인가. - P2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