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은 날 : 2023.9.17.

 

최은영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읽었던 순간의 느낌을 기억한다. 2017년 여름이었다. 충격적일만큼 좋은 소설이었고 좋은 느낌이었다. 2018년 나왔던 그 다음 단편집 내게 무해한 사람도 좋았고, 꽤나 오래 기다렸단 느낌으로 다가왔던 2021년의 장편 밝은 밤도 좋았다.

 

내게 최은영은 조분조분하고 나직하면서 따뜻한 어조로 읊조리는 음색(글색)을 가진 작가다. 그 음색에 처연함을 몇 수저 더 끼얹으면 한강이 될 것 같은, 그러나 그 몇 수저 빠진 처연함 대신 따뜻하고 동글동글한 색을 얹어 최은영 특유의 색채를 만들어 내었다. 자칫 잘못하면 무기력해 보일 수도 있었을 그 순간에 최은영은 단단한 서사의 힘으로 튼튼한 줄기를 만들고 그 위에 따뜻한 어조의 옷을 입혔다. 서사와 어조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신작을 기다리게 하는 몇 안되는 작가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나에게는.

 

이번 소설 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살짝 힘이 빠졌다. 띠지의 말 그대로 내게 무해한 사람이후 5년만에 나온 단편인데, 그렇게 따지면 그렇게 많은 작품을 써 낸 작가도 아니도 그리 오래된 작가도 아닌데 벌써 매너리즘에 빠졌나? 싶을 정도로. 2017년부터 최은영의 신간 한권 한권을 순서대로 따라가며 기다려가며 읽는 동안 매번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작가가 자랐음을, 발전했음을 발견하며 기특하고 감탄했다. 성장을 지켜보는 재미란 또 얼마나 쏠쏠한 것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

 

여전히 따뜻하고 다정한 어조는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따뜻하고 다정한 어조에 힘을 불어넣던, 서사의 힘이 약해졌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최은영의 그 다정한 어조를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 그 다정한 어조가 힘을 발하는 이유는 그 다정한 어조를 받치고 있는 단단한 서사 때문인데(이 단단한 서사가 없다면 글쎄.) 이번 소설집에서는 그 단단한 서사의 힘이 약하다.

 

최은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집착하는 작가 중 하나다. 개인의 내면을 따라가려 노력하지만, 그 개인의 내면을 이루는 서사는 외부의 인간과의 관계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유난히 그 관계에 천착하는 면을 보이면서도 그 관계의 서사를 쌓아가는 데 인색하게 굴어서 서사의 힘이 약하다는 인상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표제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그 와중에 최은영다운 장점을 가장 잘 살린 작품이다.

 

영어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쓰던 말이 아니었다. 내게 상처를 줬던 말이 아니었다.(p. 19)’는 이유로 영문학자가 된 그녀와, ‘그녀의 언어가 나의 마음을 설명해주는 경험(p.44)을 한 희원이 용산이라는 한 공간을(정확히는 공간의 기억을) 공유하고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과 그로 인해 생긴 상처와 수치 공감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

 

최은영의 어조는 강하거나 거칠지 않다. 자분자분 조분조분 차분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어조는 뜻밖에 강한 선동으로 읽힐 때가 있다. 최은영의 서사가 제대로 힘을 받았을 때의 이야기다. 이번 소설집에 약간은 실망했음에도 여전히 최은영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다.

 

2023.9.17. by ashi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