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 자폐인의 내면 세계에 관한 모든 것
템플 그랜딘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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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인들에게 템플 그랜딘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자폐인이면서 savant(이 책에서는 불어식 발음인 사방 이라고 사용한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서번트라는 영어식 발음을 쓴다.)다. 자폐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를 받고, 미국 가축 시설의 3분의 1이 그녀의 설계로 이루어 졌으며, 현재 콜로라도 주립대 동물학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자폐인계의 헬렌 켈러라고 이해하면 간단하려나. 


우리는 그녀의 저작물 (어느 자폐인 이야기, 이 책)과 그녀의 강연(그녀는 미국과 전 세계를 순회하며 자폐증 관련 강의를 한다. 테드에도 그녀의 강연이 올라와 있다. http://www.ted.com/talks/temple_grandin_the_world_needs_all_kinds_of_minds?language=ko)을 통해 자폐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힌다. 나에게 자폐는 직관적인 여타 장애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도무지 이해할 길 없는 무언가임에도 진심으로 이해해 보고 싶은 무언가랄까. 전혀 직관적이지 않은 장애이고 미지의 장애이면서 동시에 천재성과 닿아있는 장애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듯하다. 


자폐는 일반적으로 감각의 혼란과 함께 오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듣는 세상은 일반인이 보고 듣는 세상과는 다르다. 템플 그랜딘에 따르면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역시 아동기와 청년기에 자폐증상을 보이는데, 정신병원에 들어간 뒤 그린 반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 이라는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소용돌이치는 하늘은 일부 자폐인이 겪는 감각 왜곡과 비슷하다(p. 231-232)고 한다. 그러니까 그 그림은 고흐에게 있어서는 하늘의 실사판이었던 셈이다. 심한 감각 처리 장애를 겪는 자폐인한테는 사물의 가장자리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고, 감각자극이 서로 뒤섞인다. 이것은 환각이 아니라 감각의 왜곡이다. 


감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외부를 받아들이는 창문이다. 자폐인들은 이 입구에서부터 일반인들과 다른 것을 보고 듣는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받아들인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이다. 


소설가 박경리는 73년, 언어에 대한 매혹적인 통찰을 남겼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박경리,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 <거리의 악사>, 민음사, 1977, p.10


이 글은 나중에 토지 1부의 서문으로 쓰인다. 


언어란 결코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자세히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언어는 진실과 점점 멀어지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언어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언어를 사용해 생각을 하고 그 사고를 확장해 나간다. 우리가 흔히 '사과' 라고 했을 때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사과 하나의 구체물이 아니라, 우리가 사과라는 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언어화된 정보를 조합해 형상화 한 일반물이다. 인간에게 생각의 도구는 언어다. 일반적인 개념을 먼저 떠올린 다음 그 것을 바탕으로 시각적으로 구체적인 영상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폐인인 템플 그랜딘은 자신의 생각의 도구가 그림이라고 잘라서 말한다. 


나는 무언가를 발명할 때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선명하고 구체적인 그림으로 사고하는 데 반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어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이미지를 조합해 사고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첨탑' 이라는 단어를 읽거나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교회를 떠올리지 구체적인 교회와 첨탑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사고패턴이 일반 개념에서 구체적 실례로 이동하는 것이다. 나는 언어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내가 표현하려는 바를 이해하지 못해 낙담한 적이 많았다. 나한테는 너무나 뚜렷하고 명료한 그림을 상대방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폐인 모두가 시각적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니고, 누구나 다 이런 식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각화 기술에 있어서 제로에 가까운 사람부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그림을 보는 사람, 반쯤 구체적인 그림을 보는 사람, 나처럼 아주 구체적인 그림을 보는 사람까지 연속체를 이룬다. 


p. 28-29


템플 그랜딘 식의 분류법에 따르면 나는 시각화 기술에 있어서 제로에 가까운 사람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언어로 기억한다. 내가 길을 찾는 방법은 보통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갔던 길의 형태를 기억하거나 풍경을 기억하거나 주변 건물의 형태를 기억하거나 하는 것이 아닌 오직, 길 바닥에 씌여진 글자(기호 아닌 글자. 오직 글자), 각종 도로안내판, 건물들의 간판을 통해서만 길을 기억한다는 것을 몇년 전에 깨달았다. 간판(정확히는 그 간판의 글자)을 보고 나서야 아, 나 이 길 어제도 왔었구나. 수준이랄까. 그렇게 언어 정보로 변환되지 못한 정보들은 내 뇌에 기록되지 못한다. 자카르타에 거의 5년을 살면서 극도로 한정된 곳들만 돌아다녔음에도 그 길들이 나에게 매번 새로운 길이었던 것은 그곳의 간판들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호들로 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아. 나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바보라는 설명을 넘어서는 장애 수준이다. 


하여, 그녀의 사고법은 흥미를 넘어 매혹적이었다. 아. 그림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있다니. 라는 놀라움을 넘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사고를 하며 사는가. 하는 통찰까지 이끌어 낸다. 나는 비 언어화 된 정보를 황당할 정도로 기억해내지 못한다. 일례로, 나는 수천 수만번 들은 클래식 곡들과 그 제목을 전혀 연결해 내지 못한다. 나에게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라는 제목과 실제의 선율은 늘 누가 알려줘서야, 아 그거지. 수준이었다. 민망하다. 그러나 그 곡이 신화의 노래에 샘플링 되면서 노래 가사와 함께 선율이 머릿속에 입력되고, 신화와 바흐와 G 선상의 아리아와 그 선율이 함께 인지되기 시작했다. 음악도 가사가 있어야만 입력된다는 이 놀라운 바보스러움이라니. 사고를 거의 100% 언어에 의지하다보니 반사적으로 언어화 된 정보에 대한 기억력은 음, 내가 생각해도 남들보다 좀 낫다. 음. 하. 하.


템플 그랜딘은 대학의 제자에게서,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거라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단순한 연상작용일 뿐이라고. 글쎄. 니놈은 그 단순한 연상작용만 하는 사람한테 지금 언어를 사용하여 배우고 있는 중이거든, 멍충아. 라고 중얼거리며 이 책을 읽었다. 


하나의 길이 막히면 또 다른 길이 열린다. 라는 유명한 경구가 여기에 와서는 현실로 나타난다. 


주제 사라마구의 책 <눈먼자들의 도시>에는 바이러스(?)로 인하여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섞인 진짜 맹인이 나온다. 그는 극도로 예민해진 촉감을 사용하여 신규 눈먼 자들 사이에서 눈 뜬 자 역할을 한다. 시각장애인들은 손의 감각이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예민하다고 한다. 우리가 점자를 읽지 못하는 것은 점자를 읽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손의 감각이 무뎌서 그 점자들을 읽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니까.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템플 그랜딘이 언어로 사고하는 방법이 막혀 버렸기 때문에 그림으로 사고하게 된 것인지, 그림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언어로 사고하는 방법이 막혀버렸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신기하고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나는 자폐라는 장애가 참 놀라운 장애라고 생각한다. 자폐는 반 고흐를 만들어 내고 자폐는 아인슈타인을 만들어 내고, 자폐는 빌 게이츠를 만들어 내고 자폐는 템플 그랜딘을 만들어 낸다. 물론, 자폐 장애 그 자체는 본인에게도 그 주변에게도 몹시 괴로운 장애이겠으나. 템플 그랜딘은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자신이 자폐인이 아니게 된다고 해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말을 한다. 자폐는 자신을 구성하는 중요한 무엇인가임과 동시에 지금의 템플 그랜딘을 만들어 낸 바탕이니까. 


마지막으로, 일-러 동시통역사이자 유쾌한 문화학자인 요네하라 마리의 언어와 사고에 관한 통찰과 템플 그랜딘의 통찰로 이 글을 마친다. 


갑자기 딱딱한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하지만, 여기서 통번역론에서 굉장한 논쟁거리가 된 '말이 먼저냐 개념이 먼저냐'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논쟁은 언어학, 철학, 커뮤니케이션론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러브호텔'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의식에는 '러브호텔'이라는 낱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러브호텔'이라는 낱말이 존재하지 않는 의식에는 '러브호텔'이라는 개념도 없다.

한편, 마음속에 생기는 감정이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 답답할 때가 있는 것처럼, 확실히 말에 앞서 어떤 액체 혹은 기체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경험할 때가 있다. 말에 앞선 그것이란 이미지일까.

사실 말이 아니라 이미지로 생각을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만화가나 영화감독, 텔레비젼 영상 제작자들이 그렇다. 뛰어난 영상 제작자의 손을 거치면,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보지 않은 영상까지 그려질 때가 있다. 그러나 영상이 말만큼 추상화가 가능할까. 

가령, 우메보시라는 단어는 실로 여러 가지 이미지를 집약하고 있다. 잘 익어 알이 큰 옅은 밤색 매실에서부터 잘고 설익어 딱딱한 초록색 매실, 거기에 차조기가 듬뿍 들어간 붉은색 매실까지 하면 모든 종류의 우메보시를 망라하는 데다가 쭈글쭈글한 노파마저 연상하게 한다. 하나의 영상이 한순간에 이런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


요네하라 마리, 마녀의 한 다스, 마음산책, 2007, p.56-57



나는 대학에 간 다음에야 완전히 언어적으로만 사고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던 것은 과학 학술지에 실린 '선사시대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게 된 과정'에 대한 글을 읽었을 때였다. 인간이 도구를 발명하기 전에 언어가 먼저 발달해야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담긴 한 저명한 과학자의 글이었는데, 나한테는 정말 터무니 없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글을 읽고, 내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하고 확연히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p.28


주기도문도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구체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쪼개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권세와 영광'이라는 말은 반원 모양의 무지개와 전신주(영어로 power는 권력, 권세도 되고 전력도 된다-옮긴이)그림으로 표상했다.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이런 시각적 이미지가 오늘날까지도 주기도문을 들을 때마다 떠오른다.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은 어릴 때도 아무런 의미를 떠올릴 수가 없었고, 지금도 그 의미가 애매하다. '뜻'이라는 개념은 시각화하기 힘들다. 그 단어를 생각하면 신이 번개를 던지는 장면이 떠오른다. 다른 자폐인 한 사람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thou art in heaven)"라는 말을 들으면 하느님이 구름 위에서 이젤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한다.[art가 고어로 be 동사이면서 '미술'이라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옮긴이] '죄(trespass)'는 검정색과 노란색으로 된 '출입 금지'라는 표지판이 떠오른다. (trespass는 주기도문에서는 죄를 의미하지만 'No Trespassing'이라고 하면 출입금지라는 뜻이 된다-옮긴이) 기도를 마칠 때 하는 "아멘" 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미스터리다. 맨 끝에 남자[Amen이 a man(한 남자)이라고 들리기 때문이다.-옮긴이]가 나오다니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p. 36-37


언어를 가지고 놀고, 하나의 개념을 이쪽 언어에서 저쪽 언어로 옮기는 것이 업인 통번역사 요네하라 마리와,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미지의 사고를 하는 템플 그랜딘의 차이는 실로 놀랍다. 그리고 내가 이 두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 내린 건, 기가막히게 멋진 우연이었다. 








딴소리 하나.


일베의 단원고 희생자 어묵 비하 사건 범인에게 징역 4월의 판결이 내렸다. 항고를 하지 않는 한 20대와 30대의 두 남자는 실형을 살아야 한다. (검사의 선고는 징역 10월이었다.) 그 중 20대 남자는 자폐증으로 인하여 심신이 미약한 상태임을 정상 참작 하였다고 한다. (관련 뉴스는 여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2&aid=0002842535) 도대체 여기에 자폐와 관련된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자폐아 또는 자폐인은 거짓말을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자폐인한테는 거짓말하는 것도 무척 힘들다. 거짓말을 하는 데는 복잡한 감정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선의의 거짓말이어도 순간적으로 극도로 긴장한다. 아주 사소한 악의 없는 거짓말을 하려고 할 때에도 수차례 머릿속에서 예행 연습을 해 본다. ...... 가능한 모든 응답을 충분히 연습해 보지 않고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면서 즉흥적으로 거짓말을 하기란 정말로 어렵다. 

p. 168-169 7장 타인과 상호작용하기


물론 이 책의 저자 템플 그랜딘은 시각화 기술과 논리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추측했고 거짓의 개념도 잘 이해했다. 왜냐면 그녀는 서번트 자폐인이니까. 


다시 일베의 자칭 자폐인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러니까 그 20대는 자신이 그와 같은 짓을 저지르기 위해서 수차례 머릿속에서 예행연습을 해 봤다는 이야기다. 즉, 더 나쁜놈이다. 징역 4월 정도로는 도움이 안 된다. 수차례 머릿속으로 예행연습을 해 보고 또 해보고 또 해보고 나서 저지른 짓이니까. 그가 자폐라는 주장을 믿어준다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원고 희생자들이 진짜로 어묵이라고 믿었거나. 그럼 그놈은 격리되어야 하는 놈이고. 어느쪽의 판단을 따라가든 간에, 그 20대 놈은 자폐라고 자처하지 않은 30대 놈보다 백만 스물 두배쯤 더 나쁜 놈... 이라기 보다는 더 많이 격리되어야 마땅한 놈이다. 그같이 나쁜 짓을 머릿속으로 예행연습을 해 보고 또 해 보고 또 해보는 놈도 나쁜 놈, 단원고 희생자를 어묵이라 믿었더라면 나쁜 놈이라기 보다는 치료와 격리를 요하는 중증 환자. 자 어느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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