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첫번째 책 <비밀노트>를 읽었을 땐 조안 해리스의 <오렌지 다섯 조각>이나 저지 코진스키의 <잃어버린 나>류의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세계대전 때에, 유럽의 시골에 방치된 어린 소년의 생존 투쟁기 말이다.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에서 단골로 출제되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야기의 화자를 여섯살 어린 여자아이 옥희로 선택함으로써 얻게되는 효과는?"
물론 정답은, 아이의 천진한 눈을 통해 어른들의 사랑을 거짓없이 드러내게 만든다 류일테고. 이 시리즈의 첫번째 책 <비밀노트>에서 얻어내는 효과도 그와 비슷하다. 여섯살 소년 둘의 눈에 비친 세계대전 당시의 유럽 시골 풍경은 삭막하고 살벌하기 그지없고, 천진하기 때문에 더욱 잔혹하게 비친다. 아이는 사실을 듣기 좋고 먹기 좋게 포장할 줄 모른다. 아이에게 사실은 오직 그대로의 사실일 뿐이고, 그것을 날 것 그대로 기록해 낸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는 그들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 그들이 본 것은 무엇인지. 아이들의 기록은 그들이 당한일, 한 일, 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알지 못하(거나 알려 하지 않)고 그렇기에 가감없이 드러낸다.
전쟁의 참혹함을 기록하는 데에 아이의 눈보다 더 좋은 창은 없다. 시에라리온 내전의 참상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유니세프나 유엔의 보고서가 아니라 소년병 이스마엘 베아의 <집으로 가는 길>인 것처럼.
이렇게 천진한 아이들이, 천사같은 이라는 수식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하지만 어리고 천진하다는 점에선 재론의 여지가 없는 아이들이 겪는 전쟁이란, 그 무엇보다 전쟁의 진실을 잘 드러낸다.
2부 <타인의 증거>는 1부의 연장 선상에 놓인다. 전쟁 직후의 피폐한 사회상을 보여주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나의 대척점에 있는 타인이라는 존재다. 아니, 정확히는 타인의 대척점에 있는 나 라는 존재다. 1부의 쌍둥이 클라우스와 분리된 나 루카스는 누군가의 보호자로서 존재하고, 누군가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사람들은 모두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좌표를 찾는다. 그러다 상대의 좌표가 변화하면 나의 좌표는 길을 잃고, 결국 소멸하기도 한다. 1부가 충격적이었다면 2부는 슬펐다.
그러나 3부의 충격에 비하면 1부의 충격은 충격도 아니었다. 3부에 가서는 모든것이 뒤죽박죽 섞여버리고 만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이라더니 모든 거짓말은 마치 변증법처럼 거짓이 거짓을 거짓으로 반박하고 그 거짓이 중첩되어 또다시 새로운 거짓을 만들어 내고, 그 거짓에서 가지는 의미 또한 거짓이 되고... 그러나 3부를 읽다보면,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이 책이 전쟁 소설이라는 생각을 접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의 주 테마는 전쟁이 아니다. 이 책의 테마는, 테마는.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가 아니라 존재는 거짓말을 한다, 랄까, 아니면 존재는 거짓말 속에 있다, 라고 해야하나.
3부를 끝까지 다 읽고 아주 드물게 1부를 다시 펼쳐들어 3부까지 천천히 정독했다. 처음 읽을때의 충격과 경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번엔 눈물이 줄줄줄(그야말로 줄줄줄!) 흘렀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뭐가 중요한가. 인간이란 존재는 왜 이리도 참혹하게 슬픈가.....
이 책은, 두번 읽어야 하는 책이다. 3부의 끝에는 도돌이표가 달려있다.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이 책은 그렇게 읽어야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