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의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드물게 천둥소리를 동반한 번개가 친 날이었습니다. 이 나라에 도착해 처음으로 장대비라는 걸 눈으로 본 날이기도 합니다. 빗방울이 아닌 빗줄기가 하늘과 땅을 연결한 채 바람에 불려 우우 쓸려다니는 걸 아파트 베란다로 내다보았습니다.  

잎사귀 하나가 유치원생 아이 하나의 몸피만한 파초잎들이 집과 집 사이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고 그 사이사이 어떤 나무는 꽃을, 어떤 나무는 열매를 달고 있습니다. 피부빛이 짙은, 순박한 눈매의 젊은 남자들이 그 나무아래 모여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 차 안의 나와 눈이 마주치면 천진하게 웃습니다.  

이곳의 하루는 이르게 시작합니다. 몸집이 작고 머리가 큰 식모아이는 무슬림이라 매일 5시가 되기전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직 시차에 채 적응하지 못한 제 아이둘과 저 또한 6시가 되면 일어나 활동을 시작합니다. 더듬더듬 사전과 회화책을 뒤져 그녀와 의사 소통을 시도하면, 그녀는 순한 눈매와 참을성 있는 태도로 나의 말을 꼼꼼하게 들어줍니다. 어쭙잖은 영어와 이 나라 말과 우리말과 바디랭귀지까지 온통 뒤섞인 말을 그녀는 용케도 알아듣습니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 <이름 속에 숨은 사랑>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오지요.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평생 임신부인 채로 사는 것과 비슷한 것같다는 말.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와, 놀라움 등등을 늘상 마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그 책을 읽을때도 무릎을 탁 쳤던 말인데, 막상 제가 그 입장이 되니 줌파 라히리의 관찰력이란 어떤것인가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그 구절은 정말이지, 임신을 경험해 보고,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말이었겠지요. 그리고 또한, 임신을 경험해 봤고, 외국인으로서의 삶의 첫발을 처음 떼고보니 지독히도 와 닿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튄다는 것, 주목을 받는 다는 것, 종로 한복판에서의 익명성이 이렇게 그리울수가 없습니다. 지나던 외국인에게 한번더 눈길을 주었던 나의 촌스러움이 참 미안해집니다. 그들을 보는 나의 눈에 악의가 없었던 것처럼 나를 보는 저들의 눈에도 악의가 없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문득문득... 음.  

열대의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출국 이틀 전, 엄마와 아이들을 데리고 저 촌으로 쑥을 캐러 갔었더랬습니다. 남도 땅엔 봄이 와 어느새 쑥이 소복소복 자라 있더군요. 저와 엄마가 캔 그 쑥으로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일 쑥국을 끓여 남편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고 출국을 했습니다.  

이제 3월도 하순에 접어들었으니 그곳엔 봄이 한창이겠습니다.  

이곳은 지금 우기입니다. 5월이되면 건기가 되어 몹시 더워진다는데, 도대체 지금보다 더 더우면 어찌 살수 있는 건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이곳의 계절은 딱 두개, 건기와 우기가 있습니다. 건기는 여름이고 우기는 겨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데요.  

이제 그만, 편지를 접습니다.  

손가락을 접어보면, 아직 한손으로도 손가락이 남는데, 그런데도 벌써, 

나는 그대가, 그곳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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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3-2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벌써 가신거군요, 아시마님!

저는 이곳에 있어서 그런지 아시마님의 '그곳이, 그립습니다'가 제대로 와서 박히는군요. 사람이 참 이기적이에요. 전 그곳에서도 아시마님이 이렇게 온라인상으로 글을 주고 받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게 아니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네요. 몇년전이었다면 그저 그리워할 수 밖에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낯선곳에서 조금 더 익숙해지고 그렇게 조금 더 편해지시길 바랄게요. 잘 지내세요. 그리고 이렇듯 글로써 안부 주시구요.

덕수맘 2010-03-22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못와봤더니...벌써 떠나셨군요..로션도 답글이 없으셔서 아직 못보내드렸는데 서둘를걸 하는 생각에 가슴이 쓰립니다. 저두 다락방님처럼 아시마님이 그립네요..낯선곳에서 적응하면서 산다는게 쉬운일은 아닐텐데..늘 건강하고 좋은 사람들만 좋은일만 가득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