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전장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박경리 다시 읽기박경리의 6.25 시장과 전장by 박경리

 

읽은 날 : 2026.2.18.

 

소설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 또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망에서 글쓰기를 시작한다. 나목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박완서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6.25 전쟁이 터진 직후, 정부가 먼저 도망쳐 버린 서울에 남겨진 박완서는 자신의 체험을 글로 써서 고발하리라는 욕망이 그 시절을 버티게 하는 힘(목마른 계절)이었다고 말한다.

 

포 소리가 바로 미아리고개 너머에서 들리는데도 서울을 사수할 테니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런 방송은 27일 밤까지도 계속되었다. 아마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남으로 후퇴한 뒤까지도 그 소리는 계속됐을 것이다.

……

그렇게 국민을 기만하고 도망갔다가 돌아온 주제에 국민에 대한 사죄와 위무 대신 승자의 오만과 무자비한 복수가 횡행한 게 또한 9.28 수복 후의 상황이었다. 나는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분통이 터지고 생생하게 억울하다.

남들은 잘도 잊고, 잘도 용서하고 언제 그랬더나 싶게 상처도 감쪽같이 아물리고 잘만 사는데, 유독 억울하게 당한 것 어리석게 속은 걸 잊지 못하고 어떡하든 진상을 규명해 보려는 집요하고 고약한 나의 성미가 훗날 글을 쓰게 했고 나의 문학정신의 뼈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박완서,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박완서 문학앨범, 웅진, 2011, p.30-31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박완서는 31년생, 6.25 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에는 서울 돈암동에 살던 서울대 국문학과 신입생이었다. 620일에 입학식을 하고, 강의를 3-4일 듣고 바로 터진 전쟁으로, 박완서는 영영 서울대 국문과와 이별을 한다. 20살 박완서가 겪은 진공상태의 서울(6.25 발발직후에서 9.28 서울 수복까지의 3개월)에서의 경험과 이후 3년간 지속된 전쟁 체험은 다양한 소설에서 변주되어 나타난다. 목마른 계절은 그 진공상태의 서울에서 겪은 일이고,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는 중공군이 밀려 내려오던 시절, 1.4후퇴를 따라 피란을 떠날 때다. 이후 나목에서는 1951년부터 1953년 휴전이 될 때까지의 서울시절 이야기다. 장편 그 남자의 집또한 이 시기의 이야기다.

 

박경리는 1926년생, 6.25 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에는 서울 흑석동에 살던 두 아이의 엄마였다. 그 시절 여인들 대부분이 그랬듯 정신대 징용을 피해 급히 한 결혼이었다. 남편은 일본 주오(中央)대학 출신의 화학 엔지니어 김행도였고, 소박데기였던 친정어머니 김용수가 함께 살고 있었다. 박경리의 전쟁체험은 1964파시이전까지는 내내 전쟁직후의 혼란한 사회상만을 주로 배경으로 한다. 파시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전쟁의 후방에 위치한 통영-부산에서의 전쟁 체험기다.

 

박완서가 동어 반복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집요하게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을 장편, 중편, 단편 가리지 않고 써 내려 가는 동안 박경리는 전쟁이 끝난 이후의 혼란기를 여성가장의 입장에서 썼다. 그러다 나온 소설이 시장과 전장이다. 표류도이전 시기의 이야기를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이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은 독자의 짐작이 아니라 박경리 본인의 서술에 따른 것이다.

 

당신의 장편소설 시장과 전장(1964)을 들먹였다. 주인공 남지영이 자신의 분신이었고, 그만큼 책 서사가 당신 내력이라 했다.

김형국, 박경리 이야기, 나남, 2022, p.7

 

정부를 믿었다가 낙동강 오리알 아닌 한강변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이 이후에 국가와 정부를 믿게 되기란 쉽지 않았다. 정부는 도망을 치는 동안에도 북한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다리를 끊어놓는 부지런함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했던 것은 멀리 보이는 한강 철교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많은 차들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철교 중간에 있는 어느 한 지점에 다다르면, 약속이나 한 듯이 헤드라이트들이 꺼져 버리는 것이다. 필름이 끊기듯이 깔끔하게 불들이 꺼져 버리고, 또 꺼져 버리고, 또 꺼져 버리고……

…… 차량은 계속 밀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헤드라이트들이, 정지선에 이르면, 꺼지고 꺼지고 하는 일이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강인숙, 어느 인문학자의 6.25, 에피파니, 2017 p.44-46

 

강인숙은 1933년생, 6.25가 발발하던 당시 경기고녀 2학년이었고, 함경남도 갑산 출생이다. 해방과 함께 분단이 일어나자 북쪽의 살림을 정리해 남하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6.25가 발발하던 바로 그날, 삼각지에서 한강변 용산 이촌동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 150만이었던 서울 인구 중에서 남쪽으로 피란길에 동참한 인구는 3분의 1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가운데 80%정도는 1945-1950년의 분단상황에서 북한의 집을 버리고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권헌익, 전쟁과 가족:가족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 창비, 2020, 김형국 박경리 이야기에서 재인용 p.132

 

권헌익의 말대로 북한의 집을 버리고 내려온강인숙은, 아니 강인숙의 가족은 한강철교 폭파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도 강변에서 밤을 새워 기다려 이튿날 보트를 타고 한강을 건너 피난을 간다. 이미 인민군이 지척에 와 있을 때여서 남쪽 강변에 보트가 닿기도 전에 북쪽 강변에 인민군이 나타났단다. 따발총 소리가 진동을 하고 탄환이 강물에 떨어져 물보라를 일으키는 상황에서도 강인숙 가족은 미친듯이 그 험한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같은 책, p.57)

 

그렇게 한강을 건넌 강인숙의 가족은 아버지의 의형제가 살고 있다는 경기도 광주 정자리를 목적지로 피난을 떠난다. 그러던 사이 인민군은 강인숙 가족을 앞질러 갔고, ‘한강에서부터 내내 인민군에게 쫓기다가, 피난을 한답시고 헐떡거리며 찾아간 곳이 바로 전쟁터 한복판’(같은 책, p.61)이었음을 알게 된 강인숙 가족은 어쩔수 없이 서울 이촌동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피란을 가고자 했으나 갈 수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정부는 9.28 서울 수복 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예고도 없이 인도교를 폭파하고, 자기들만 떠나고 나서, 수복이 되자 강을 건넌 사람들이 한강 북쪽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죄인 취급을 하는 이상한 현상’(같은 책, p.41)이 벌어지는 것이다. 박경리의 남편 김행도(소설 속 하기석)는 이 상황에 희생된다. 정확히는 생사불명이 되고 만다.

 

국가를 믿을 수 없게 된 박경리는 중공군의 참전에 따른 1.4후퇴때는 기를 쓰고 남으로, 남으로 피란을 떠난다. 다행히 고향의 이모부가 올라와 남지영의 피란에 동행한 덕에 박경리는 통영으로 피란을 갈 수 있었고 2년간 통영에 머무른다.

 

26년생, 두 아이의 엄마이자 이미 직장을 가지고 있던 한 여성이 6.25를 거치며 여성가장이 되는 과정과

31년생,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한 여성이 6.25를 지나며 조카를 포함한 한 가족의 가장이 되는 모습,(박완서는 끝내 대학에 복학하지 못한다.)

33년생, 아직 고2였던 한 여성이 6.25를 지나며 그래도 그나마 부모의 보호아래 전쟁의 참상을 치루어 내는 모습(강인숙은 1.4후퇴때 오빠가 살던 군산으로 피란을 가 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부산으로 피란가있던 서울대 국문과 52학번으로 입학한다.)

이 세 가지 각각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이 공통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무책임하고도 무능력했던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의 모습이다. 그들의 무능해서 악했던 모습은 당사자의 상황이 어떠했건 동일하게 잔인했다.

 

이 책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박경리라는 한 개인의 6.25 전쟁 목격담이다. 전쟁 그 자체가 휘두른 폭력보다 무능했던 정부가 자신의 무능을 위장하기 위해 휘둘렀던 폭력이 훨씬 잔혹하고도 비참했다.

 

그러했다.

 

2026.2.19.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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