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과 부동명왕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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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4. 9. 6

 

미미여사의 에도시대 시리즈물을 한국에 출간된 것에 한해서는 다 읽었다. (사실 현대를 배경으로한 책들도 다 읽었다.) 한국인의 정서로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도 있었고, 같은 동양인이라는 측면에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질성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러한 이질성과 거리감이 괴담이라는 장르를 즐기는데는 플러스 요소가 된다. 그야말로 이야기를 이야기로서 즐길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이질감과 거리감이라고 하면 맞겠다.

 

책 날개 미미여사의 작가소개와 더불어 항상 나오는, “에도 시대는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대감이 매우 강했습니다.” 라는 말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 짧은 문장의 전반부는 문장자체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만 그 내용은 상상의 영역을 넘어선다.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있는 시대라는 것. 전쟁을 치르는 중도 아닌데 그럴수 있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후반부는 미미 여사의 글을 읽는 내내 묘하게 거슬렸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대감을 느끼기엔, 미미여사의 에도시대는 각자도생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일본은 한반도는 겪지 않고 지나간 중세를 꽤 오래 겪었다. 중세와 봉건은 동의어가 아니다. 국토가 아래 위로 길고 험한 지형이 군웅할거의 시대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각 지역을 지배하는 패자(성주, 지배자, 토호)가 있고, 그 패자에게 모든 것이 묶여 있는 사람들, 거주 이전의 자유도 직업선택의 자유도 없다. 신분이 세습되기로야 조선의 봉건사회도 마찬가지였으나 직업 자체가 세습되지는 않았다. 조선의 농민에게는 과거 응시권이 있었고, 과거에 급제하면 신분이 달라졌다.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이라기보다는 농에 가까운 신분이었고, 부모로부터 세습되는 직업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인 조선에서 모든 백성은 왕의 백성이었다. 일개 지방 향반(그래봐야 지도 왕에게 지 목숨을 맡긴 왕의 백성중 하나)이 함부로 그 목숨을 취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 실록에 보면 어느땅 아무개 향반이 자기네 노비를 함부로 죽인 사건에 대한 숱한 재판 기록이 있다. 사유재산으로 취급되던 노비의 목숨조차 왕의 관할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없는 시대였다. 일본과 매우 다르게. 중세를 지나고 있던 일본은 그 땅의 주인에게 그 땅에 살고 있는 주민의 생사여탈권이 주어졌다. 통치형태의 차이에서 오는 생명의 경중 차이다.

 

미미여사가 다루는 에도시대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에도 막부가 세워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이 중앙집권을 시작한 이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중앙집권을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 그렇게 강력한 중앙집권(중앙집권의 가장 큰 상징은 각 지방에 중앙 정부의 관리를 파견하는 것이다. 에도 시대는 그러한 중앙집권이 완성되지 않은 시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뭐 일본사에 대한 큰 지식은 없으므로, 미미 여사의 글을 비롯한 그 시대를 다룬 일본의 소설들을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이 완성되지 않은 나라여서 나의 목숨은 내가 사는 땅의 통치권자에게 달려있다. 이 책의 두 번째 이야기 <단단 인형>에서 다루고 있듯, 한 고을의 사람 전체를 쓸어버리듯 없애버리는 이야기도 별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를 듣는 도미지로의 반응대로라면, 그다지 드문 이야기도 아니어서 한국의 사람들이 어사 박문수 이야기와 전우치 이야기, 춘향전의 어사출도 장면에 익숙하듯 에도시대 사람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익숙한가보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어사출도는 끽해봐야 한두사람의 목숨이라면 일본의 이야기는 마을 전체의 이야기라는, 살해의 스케일이 다르다.

 

조선의 정서에 익숙한 한국사람으로서는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있는 시대에 대한 감이 모호하다. 그런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인가가 와닿지 않는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치는 조선에 익숙하니. 겨우겨우 중세 농노의 개념과 비슷한 일본의 중세를 이해하면 음,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위화감은 달라지지 않는다. 거기서 미미 여사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대감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 유대감이라는 게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늘 자신에게 천형처럼 주어진, 또는 자연재해처럼 주어지는, 뜬금없는 불행에 맞닥뜨린 사람이 홀로 그것을 헤쳐 나가고 견뎌내는 이야기로 읽혔다. 자신의 운명에 홀로 맞서 꿋꿋히 이겨내는 사람의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 감동을 주었지만 유대감연대의식은 글쎄. 도무지 어찌해 볼 길 없는 거대한(그리고 폭력적인) 힘 앞에서 묵묵히 견디는 사람에 대한 응원은 가능하지만.

 

표제작 <청과 부동명왕>은 한자 표제를 볼 생각을 하기 전엔 ()과 부동명왕이라고 생각했다. 에도시대 중국은 청나라이기도 했으니 청나라와 관련있는 얘긴가 했고, 뭐 그런 걸 떠나 그냥 푸른색을 뜻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부동명왕의 이미지가 나에게는 푸른색이기도 해서. 헌데 청과(靑瓜 물외, 오이, 노각)’였다.(제목을 잘 봐야한다, 처음부터. 그러니까.) 노각 모양이 정수리 뒤에 붙어 있는 무면(無面)의 부동명왕이라니. 귀여우셔라. 그리고 여기서 드디어 미야베 미유키가 그리고 싶었다던 유대감을 읽었다. 홀로 견디는 사람과 그 홀로 견디는 사람을 도와주는 다른 사람, 그리고 그 홀로 견디는 사람에게 의지해 자신의 재앙을 견디는 사람, 자신도 견디는 중이면서 재앙을 견디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 처음으로 미미여사의 글이 따뜻했다.

 

뭐 다음 수록작 <단단인형>에 가면 또 바로 홀로 견디는 여인 오빈이 나와버리지만. 이사와야의 몬이치가 미루라무라 마을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오빈이 만든 단단인형이 몬이치의 자손들을 돕는다는 이야기는 연대와 유대감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연약한 한 개인의 용기와 정의감에 대한 이야기와 한 여인의 보은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서 애틋하면서도 맘이 아팠다. 오빈의 삶이 대체 어땠을까 싶어서. 무슨 마음으로 살았을까, 외로웠을 텐데 하는. 미미여사의 글이 종종 이렇게 아프게 읽히는 이유는 이런 단독자의 외로움 때문이다. 아마도 다들 이렇게 외롭게 견뎌왔기에 미시마야 흑백의 방이 생기고 오치카와 도미지로와 같은 청자가 필요한 거 아닐까. 연대하지 못하고 유대감이 없기에. ‘하고 버리고, 듣고 버리는청자와 화자의 일회성의 관계를 연대나 유대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말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말이 있다. 삶의 압박이 너무 심해지면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사랑이란 나를 중심으로 한 비롯되는 동심원과 같아서 사람들은 다들 몇 개의 층위를 가진 동심원을 자신의 주변에 두르고 그 원안에 들어온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들과만 연대할 수 있다. 자기애로 시작하는 동심원은 자녀, 배우자, 혈육, 친구, 민족 등의 층위를 가지고 넓어져 간다. 삶의 고난이 커질수록 그 원의 층위는 얇아지고 지름은 줄어든다. 당장의 내 삶이 힘들 때, 사람들의 인심은 각박해진다. 목숨을 간단히 뺏길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삶의 압박이 또 있을까. 사랑의 곳간을 채울길이 막막한 거다.

 

리뷰라는 게 그렇다. 글을 쓰다보니 새삼 알겠다. 미미 여사의 글을 이렇게 좋아하는데, 신간이 나온다는 말이 반가울만큼 기다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묘한 이질감과 위화감을 느끼는 그 이유가 리뷰를 쓰다보니 정리가 된다. 나로서는 연대라고 믿지 못하는 것을, 연대라고 믿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기묘한 엇박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2024. 9. 6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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