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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 10인의 예술가와 학자가 이야기하는, 운명을 바꾼 책
어수웅 지음 / 민음사 / 2016년 4월
평점 :
사가독서 흉내내기 『탐독』 by. 어수웅
읽은 날 : 2024. 8. 24
올해는 여름 휴가를 느지막히 잡았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숙소를 예약하려고 보니 성수기엔 자리가 없더라는 극히 단순하고도 선명한 까닭이다. 남해 바다 출신인 내가(그리고 남편이) 가장 선호하는 여름 휴가지는 동해 바다라 올해도 ‘내나 거기’다. 광해군(not 光海君 but 狂海群)의 피가 옹골차게 흐르는 우리 부부는 백사장 세트를 아주 잘 구비해 차에 싣고 다닌다. 파라솔과 접이식 의자와 꽤 비싼 돈을 주고 구매한 피크닉 매트와 블랭킷. 바다에서만 쓰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 세트를 펼쳐놓고 있으면 폰 따위를 들여다보고 있기 미안해진다. 그래서 출발할 때부터 사가독서 흉내내기 삼아 책도 세 권 챙겨 가방에 넣었다. 본격적으로 집중해 책을 읽지는 못할 거 같아 가볍게 가볍게 한꼭지씩 읽고 덮어두기 편할 책을 고르다보니 세 권 다 인터뷰 집이다.
이번 휴가는 참 좋았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근사한 휴가였다. 날은 해수욕하기 딱 좋을 만큼 더웠고, 성수기가 한풀 꺾인데다 리조트 프라이빗 비치로 운영되는 해안은 딱 좋을 만큼만 한산했다. 해수욕을 하지 못할 사정이 있어 애들과 남편은 바다에 던져두고 나는 혼자 파라솔 아래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폰에서는 Il mondo가 울려 나오고, 햇볕은 따갑고, 모래는 뜨겁고, 그 와중에 파라솔 그늘은 시원하고 바람은 선선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이 구절을 읽었다.
늙어가는 게 두렵지 않은 것은,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야.
어수웅, 『탐독』, 민음사, 2016, p.137
어수웅 기자와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책(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소설가 은희경이 한 말이다. 이번 휴가는 그 바닷가에서 이 한 구절을 읽는 순간에 완성 되었다. 그래, 이쯤되면 사가독서를 하였노라 큰 소리칠 엄두도 난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세 권 모두 오래된 인터뷰 집이었다.
2008년에 지승호가 인터뷰한 11명을 모아놓은 『열정 바이러스』와 백영옥이 2013년에 인터뷰한 15명을 모아놓은 『다른 남자』 그리고 이 책 『탐독』이 2016년에 나왔다. 이 책들을 한데 모아 읽으면서 새삼 인터뷰라는 게 얼마나 시의성을 타는 형식인가를 생각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상관없이 읽을 점이 있다는 사실도 생각했다. 2008년의 지승호 책에 인터뷰이로 실린 사람 중 셋이 유명을 달리했고 그 중 둘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터뷰라는 게 워낙 개인을 드러내기 위한 형식의 글인지라 꽤 묘한 느낌으로 글을 읽었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 인터뷰를 할 때 만해도 이 사람의 마지막이 이런 형태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 뭐랄까, 죽은 사람의 육성을 듣는 기분. 삶이 참 부질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을 읽는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혹은 읽어도 몇 권만 겨우 읽는 사람들은 왜 나 같은 사람들이 서재를 가지고 책을 보관하는지 모를 거요. 언젠가는 꼭 알고 싶고, 참고하며 필요한 책이라는 사실을.
어수웅, 『탐독』, 민음사, 2016, p.105
책을 5만권이나 소장하고 있다는 움베르토 에코가 자신이 안 읽은 책을 갖고 있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역사와 민족 앞에서, 문학 앞에서, 예술 앞에서 나의 자세와 위치와 포부와 욕심과 겸양에 대하여 힘차게 말을 내뱉던 사람들의 죽음은 참으로 허무하였다. 그 죽음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은 더욱 더. 그 허무를 견디게 하는 것은 결국 ‘나 같은’ 사람에게는 책인 거다.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늙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고, 시간을 긍정할 수 있다.
그래서 올해 나는 세익스피어 베케이션에 버금가는 사가독서를 하였노라 자랑하는 중이다.
2024.8.25.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