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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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떠 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어 이어 읽었다. 

박완서 선생님의 82년 발표작품(연재는 <한국문학>에서 80년 12월 부터 82년 3월까지, 단행본 출간이 82년) <오만과 몽상>이다. 집필시기는 무려 40년의 차이가 있는데 배경이 되는 시대는 거의 엇비슷하게 <오만과 몽상>이 약간 늦다. 이 책에서는 명확하게 1966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제시하지만 <오만과 몽상>은 명확한 시간적 배경을 제시하고 있지 않으나 (두 소년의 19살 고3 시절부터 32살 까지, 13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두 작품 모두에서 지하철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는 것으로 대략적인 시대 배경의 겹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해동에게도 땅속으로 달리는 지하철의 존재는 머릿속으로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원효로에서 청와대 앞까지 달리는 이 노선이 제일차 철거 대상이었다. ....... 대신 청량리역에서 서울역까지 땅 밑으로 다니는 지하철을 만든다고 했지만 진형이나 해동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세상이 오는 것이 머릿속으로 가늠되지 않았다. 

p. 150 

전철도 그가 없는 삼 년 동안에 생긴 거였다. 그가 군에 가기 전에 시내 교통은 지하철 공사 때문에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오만과 몽상』, 박완서, 세계사, 2006, p.103

오만과 몽상의 주인공 남상이가 군대를 제대한 나이가 25살이고, 서울시내에는 지하철이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66년 보다는 몇년 뒤이고, 그건 다시 말해 <오만과 몽상>의 두 주인공 남상이와 현이가 친일파의 후예요, 독립운동가의 후예라는 이유로 절교를 하게 된 19살 무렵이 아마도 1966년이었을 것이란 이야기도 되겠다. 


그러니까. 1966년, 19살이 된 독립지사의 손자 강남상이 친일파 귀족의 손자이자 절친한 친구 현이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꿈꾸는 동안 녀석은 가장 악독한 배신을 벼르고"(『오만과 몽상』, 박완서, 세계사, 2006, p.21) 있다가 멱살을 잡고 절교를 선언할 때 28살의,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아버지를 둔 이해동은 을사5적중 일인인 윤덕영의 막내딸 윤성섭을 만난다. 


조상이라는 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나, 생각할 때가 있다. 부모를 선택해 태어나는 것도 아닌데 누구의 자손이라는 것이 수치가 되어서도 영광이 되어서도 안되지 않나, 싶다가도 윤덕영이 친일행각을 하는 것으로 벌어들인 셀 수도 없는 돈으로 호의호식한 윤성섭이라면 아버지의 친일에 책임까지는 아니어도 수치를 당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싶다. 


해방 이후 역사 내내 우리 민족을 짓눌러 온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친일파는 잘먹고 잘 살고 독립지사의 후예는 비참하게 못산다는 현실이다. 심윤경의 소설 <영원한 유산>에서는 윤덕영의 막내딸 윤성섭도 일정 수준 이상의 몰락을 경험했음을 우선 제시하고 있지만 박완서의 소설 <오만과 몽상>에서 일제시대 자작가였던 박현의 집안은, 그리고 그 집안의 사람은 몰락하지 않고 어마어마한 거부가 되어 있다. 박완서는 그야말로 박완서답게 그 모든 현실을 끝까지 야무지게 밀어부친다. 반성하지 않고 눙치지 않고 그들의 속물성과 반성없는 작태(친일파 후작인 할아버지가 친일의 결과로 받은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사진을 자랑스럽게 금테 액자에 넣어 서재에 진열하고 있었던 것)를 끝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같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주변의 반성은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고모의 입을 통해 "우리 집안이 보통 집안이 아닌데" 라는 말을 반복하게 해 친일파 일족들의 친일에 대한 반성 없음을 사정없이 드러낸다. 


박완서의 이런 야박스러울 정도의 밀어부침과 달리 심윤경은 이야기의 많은 부분들을 뭉개고 지나간다. 인물들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진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어 남상이 독립운동가의 증손임을 밝힌 박완서와는 달리 심윤경은 해동의 아버지 이성준이 실제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갔는지 아닌지를 의도적으로 흐려놓는다. 파티장에서 윤성섭에서 시원하게 한방을 먹이는 같은 해평 윤문의 윤태식 외교관도, 그래서 그가 윤성섭과 어떤 관계인지 그 이후에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흐려버린다. 이런 의도적인 지움은 오히려 윤성섭의 야비한 성품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태동이 독립지사의 아들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윤성섭의 혈통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반성하지 못하는 그 비열함과 뻔뻔함에 있다. 독자들의 눈을 윤성섭의, 윤성섭으로 대표되는 친일파와 그 후예들의 놀라우리만큼 뻔뻔함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 


심윤경의 서술법은 박완서의 끝까지 밀어부치는 박력과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가 오히려, 중심을 강조하는 효과와 더불어 주제의식을 강조하게 된다. 심윤경은 작가후기에서 "벽수산장의 잊혀짐에는 금기나 처벌에 가까운 어떤 기운이 있었다. .... 이 소설은 그 유별난 잊혀짐에 대해 팔 년간 궁리한 결과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적이 남긴 유산, 적산,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적과 함께 말살해야 할 폐해인가, 남기고 지켜야할 공동의 자산인가."(이 부분을 쓰다 문득, 93년 김영삼 대통령이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을 차지하고 앉았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시원스레 날려버렸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남겨서 일제를 기억해야 한다고들 했었지. 건물을 통째로 이전을 하더라도.) 

이에 대해 40년 전 박완서 선생은 시원하게 일갈했다. "그러나 무엇을 잊지 않고 있다거나 알고 있다는 게 어떤 힘이 될 턱은 없었다."(『오만과 몽상』, 박완서, 세계사, 2006, p.182) 잊지 않고 있고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힘을 가질 수 없다. 잊지 않고 알고 있음에 이어지는 올바른 상벌이 따라올 때 기억은 힘을 가진다. 


일제 잔재에 대한 처리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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