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 The Inno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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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소재도 우리나라 드라마 단골 메뉴다. 남편이 바람을 피고, 정부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을 아내한테 토로한다. 아내는 고통을 참다가 시동생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다. 이런 과정들이 일일이 열거된다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일 것이다. 영화는 이런 일은 모두 생략하고 그 후의 이야기를 한다. 아내가 바람 피는 것을 안 남편은 아내한테 새로운 사랑을 느낀다. 사랑은 대상을 소유할 수 없을 때 샘 솟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남편 툴리오처럼 소유욕이 강한 이기적 인물은 더 소유하지 못한 것에 집착한다.과거보다는 현재를, 가진 것보다는 가질 수 있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인물이다. 툴리오가 아내의 불륜을 알아 챈 후 툴리오의 태도는 바뀐다. 아내 줄리아노의 관심, 혹은 감시를 하기 위해 정부도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있는 걸까. 두 사람의 애정전선이 다시 쾌청하자마자 시련이 닥친다. 아내가 애인의 아이를 출산한다. 아내의 현재는 사랑하지만 아내의 과거 흔적은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운 남자는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을 한다. 

이렇게 줄거리를 적으면 흔해 빠진 치정극인데 화면으로 만나는 인물들이 변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많은 부분이 인물들의 시선처리를 통한 암시로 내용이 전달된다. 아내와 아내의 애인이 만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안 나오고 아내의 애인과 펜싱을 한 후 샤워장에서 쳐다보는 살의에 찬 남편의 시선을 통해 아내의 애인의 육감적 육체를 보여준다. 아내와 아내의 애인이 처음 알게 되는 것 역시 시선을 통해 앞으로의 일을 짐작 할 수 있다. 남편이 아내의 비밀을 알고 아내를 좆는 시선을  통해 아내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영화적 장치들 때문에 익숙한 이야기도 새롭고 창조적이 된다. 클리세를 비트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 창작이며 창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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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 Bleak Nigh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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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이 지나도 카메라만 정신없이 움직인다.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하는 궁금증을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끌어가는 영화다. 극의 시간을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 배치해서 현재 인물들의 상황을 통해 과거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낯선 방법은 아니지만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데 끝까지 인물들한테 몰입하게 만든다. 기태의 죽음이라는 사건 결말을 먼저 준다. 기태의 죽음은 자살였다는 것도 기태 아버지가 기태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알 수 있다. 정보 유출 방식이 매우 조심스럽게 펼쳐진다. 기태가 자살한 원인을 찾아가면서 세 명의 십대 소년들이 겪었던 우정과 균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십대 남고생들의 일상이지만 십대 소년들의 감정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통찰하고 있다. 말하기 힘든 복잡하고 섬세해서 느낌만 있는 심리를 잘 묘사한다. 

한 집단이나 조직은 물론 세 사람 이상 모이면 일대일의 관계를 넘어서는 투명하면서도 미묘한 그물이 생긴다. 어떤 그물망을 통해 누구와의 관계는 발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와는 겉과 속이 조금은 다른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중학교 동창인 기태와 동윤, 기태와 같은 반인 희준. 기태를 통해 알게 된 동윤과 희준. 이 세 사람의 우정은 균일하지 않다. 기태의 주목받고 싶어하는 심리 때문에 드러나는 언어적, 육체적 폭력이 희준에게 큰 상처가 된다. 말은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지만 실제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왜곡되기 쉬운 수단이다. 게다가 말은 무형이어서 폭력을 행사해도 물리적 폭력보다 그 무게를 가볍게 본다. 그러나 언어적 폭력은 외상없이 사람의 영혼을 잠식한다. 

기태가 자신의 콤플렉스를 덮으려고 했던 말들이 친구들한테는 가시가 돼서 피를 흘리게 한다. 기태는 두 사람의 우정을 믿었고 믿음은 두 사람한테 더 친밀한 말이라고 착각하는 험한 말을 한다. 친한 관계일수록 막대하는 건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 식구보다는 친구한테 더 예의있게 말하고 친구보다는 그저 아는 사람한테 더 예의를 갖춰 말하니. 희준이 전학까지 결심할 정도지만 기태는 희준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머리로는 이해하는 일이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기태가 사과를 했을 때 희준의 심정이 아마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전학을 택한 것일 것이다. 희준을 잃고 난 기태는 동윤에게 좋을 충고를 한다. 하지만 충고란 하지 않을 때가 더 나을 때가 많다. 충고란 상대를 자신의 잣대로 판단해서 호불호를 결정한 후 좋은 걸 선택한 것인데 전적으로 자신의 입장이지 상대의 입장이 아니다. 동윤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받고 기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말을 하고 만다. 기태가 죽은 후, 그 말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이었는지 드러난다. 

세 사람의 우정은 이어붙일 수 없을 정도로 조각나버린다. 인물들이 성장기에 있기에 더 큰 상처처럼 보이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우정이 혹은 믿음이 조각날 때 견딜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덧. 이 영화는 참 특이하게 찍었다. 의도적으로 인물들만을 카메라로 잡는다. 배경은 거의 대부분 아웃 포커싱해 버렸다. 배경은 없고 인물만 스크린 안에 있어서 연극 같은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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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종 - Grain In Ea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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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이 영화를 보게 되서 얼마나 다행인지. 전체적으로 담담하지만 서늘한 충격을 주는 영화다.

1. 이 영화 이미지들은 한 순간 굉장히 장면들이 익숙하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굉장히 낯설다. 카메라는 늘 인물보다 먼저 기다리고 있다. 인물은 프레임 밖에 있다가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가 다시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다. 인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카메라는 얼마간 그대로 비춘다. 때로는 벽이 있고 때로는 인물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있다. 같은 거리, 같은 동작을 보여주면서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변화를 조용히 전달한다.  처음에 주방에 쥐가 나타날 때 순희는 소리를 지른다. 쥐약을 놓고 쥐가 죽는다. 아들을 불러 쥐의 사체를 처리하라고 시킨다. 아들은 도구를 이용해 쥐 사체를 치운다. 다음 번에 죽은 쥐를 보고 순희는 놀라지 않는다. 후반부에 가면 순희는 죽은 쥐를 손으로 처리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사물을 대하는 순희의 태도기 서서히 변해가는 걸 알 수 있다.

카메라가 공간을 비추는 방식은 일상적 삶과 닮아있다. 늘 같은 곳이지만 시간에 따라 인물들의 행동과 감정에 따라 다른 곳처럼 보인다. 계속 카메라가 인물과 거리를 두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최순희를 놓치지 않으려고 뒤를 따라간다. 이 때 처음으로 단편적으로만 봤던 최순희가 살고 있던 공간을 비로소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작은 기차역 근처고 사스 검사를 했던 스산한 곳은 역사며 역사 밖을 나가면 철로가 있고 철로를 지나면 황량한 들판이 있다.   

2. 극의 중심은 어린 아들을 키우며 김치 행상을 하는 조선족 최순희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 어려운 일상이지만 얼굴 표정은 담담하기만 하다. 조선족 남자의 표정도 독특하다. 이 남자의 표정은 늘 지쳐있다. 순희한테 말을 걸때도 순희한테 속마음을 비출 때도 아내한테 거짓말할 때도 지쳐있다. 사람이 어떻게 같은 표정을 계속 지을 수 있을까?;;  

3. 어려운 상황에서 한 순간 호시절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노점 허가증을 손님이었던 경찰 도움으로 받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도 생겼다. 공무원 여인은 조선족 춤을 배우고 싶어하고 쓸쓸했던 환경이 따사로운 햇살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열심히 쌓은 도미노가 하나가 무너지자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진다. 가혹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안 될때가 있는 게 현실"이라고. 이 영화는 감독의 말대로 아주 무거운 삶을 짊어진, 어쩌면 희망없는 여인의 이야기를 한다.  

한국 독립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삶의 두께와 비슷한데 <망종>은 결이 다른 삶의 두께를 만들었다. 조용하고 담담하면서도 보는이한테 고통을 공감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투명한 수채화 물감으로 희망 없음을 말하는데 눈이 부시다. 그래서 희망 없다늘 걸 잠시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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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 Chongq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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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감독 영화는 처음 봤다. 내가 왜 여태까지 이렇게 서정적인 영화들을 안 보고 흘려보냈나, 하고 자책했다.  

1. 느린 호흡으로 담담하게 한 중경 시민의 이야기를 한다. 쑤이는 중경출신이면서 북경어를 사용하고 북경어를 가르친다.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쑤이는 아버지랑만 소통을 못하는 게 아니라 살고 있는 도시에서 어울리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배회하는 산책자다. 쑤이한테 말을 걸어오는 이들은 모두 쑤이의 마음 따위는 관심없고 그녀의 몸에만 관심이 있다. 쑤이는 매춘을 한 아버지를 혐오하면서 인간의 본질적 욕망에 자신을 내 줄 위기를 맞는다. 중경 사투리를 쓰지 않고 고집스럽게 북경어를 쓰는 쑤이는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중 외적 자아를 선택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다 아버지 일을 계기로 유부남 파출소장을 만나고 외적 자아를 밀쳐내고 내적 자아의 본질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상황은 암담하다. 이 영화는 건전한 자아찾기가 아니다. 진정한 자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간과 공간을 이루는 사람들은 그녀를 밀어낸다. 혼란만 가중되고 두 자아 사이에 생긴 균열의 틈은 커지기만 한다.  

2. 인물들의 표정이 아주 인상적이다. 웃음기 하나 없고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무표정하다. 영혼은 다른 곳에 있는 육체가 거리를 유영하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화 속 날씨는 덥다. 모두 반팔을 입고 있으니. 그런데 더위를 쫒는 으으스한 분위기가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더위와 스산함이 이렇게 조합될 수도 있다니, 신기하다.

3. 장률 감독이 사용하는 영화 언어는 아주 회화적이다. 인물들과 배경을 카메라에 동시에 담을 때 인물들은 그림 속에 있는 것처럼 정지해있다. 특히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개발 반대 문제를 논의하느라 모여있는 장면은, 동양적인 동시에 유화 그림을 보는 착각을 유도한다. 또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카메라는 정지한 채 인물들이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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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 Elizab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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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튜어트> 읽고 이 시기의 영화를 찾아봤다.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이 되면서 불안한 집권 과정을 다룬 영화다. 두 시간 안에 역사를 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감독의 시선은 존재한다. 대부분의 시대극이 야사에 중점을 두는 것처럼 이 영화도 엘리자베스 1세의 야사쯤 된다.  

<메리 스튜어트>에서 엘리자베스의 외모가 별로인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 엘리자베스는 고혹적이다. 화려하게 예쁘진 않지만 기품있고 화려한 드레스 속에서 빛나는 창백한 피부는 회화 속에 나오는 정지된 인물같다. 영화 서사가 촘촘하거나 그럴듯하지 않지만 아주 탐미적 영상이다. 연회 장면이나 카메라 움직임의 현란함은 아찔하게 멋있다.   

엘리자베스도 꽤 현대식으로 말하고 있다. BBC에서 만든 헬렌 미렌과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한 드라마를 찾았지만 못 찾았다. BBC드라마는 같은 장면도 좀 다르게 만들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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