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얼간이 - 3 Idi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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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을 다룬 영화는 기본적으로 향수를 자극하며 과거는 좋았지, 하는 기억의 왜곡에 기초한다. 올 여름이 유난히 비가 많이 와서 해를 볼 수 없어서 요즘 맑은 하늘을 신기하게 보고 있는 중이다. 마치 늦여름의 날씨를 처음 겪는 것처럼. 늦여름은 매년 왔다가 갔지만 올해 뭉게구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의 왜곡은 현재의 상황이 열악할 수록 더 심해진다. 마치 어제 본 뭉게구름처럼 웃음이 실실나게 하는 영화다.  

란초, 파르한, 라주가 인도 명문 공대에 들어가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경쟁 사회에서 대학은 지적 호기심이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경쟁에 익숙하게 만들어 계급을 재생산하는 곳이다. 세 얼간이는 경쟁의 틀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동양적 정서상 가족간의 유대와 그 유대에서 파생되는 세대간의 갈등도 다룬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가족의 기대와 자신의 열정은 다르지만 부모의 기대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이들. 부모가 정해준 삶은, 기성세대의 질서에 안착하는 것. 미래는 안착이 아니라 도전에 있다는, 란초의 가르침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란초 자신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대학에 왔다. 재력가의 아들 이름으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자신이 딴 학위는 재력가의 아들한테 줬는데 학력위조범이 아닌가. 올바른 철학자 역할을 하는 란초 자신이 범한 심각한 오류는 모두가 행복하다면, 그 쯤이야, 이란 말인가. 삐닥하게 보면 그렇지만 영화란 현실을 구원해주는 도구니 투덜거리지 말고 눈 꼭 감고 모른 척 넘어가자. 이 영화는 계몽영화가 아니라구. 

시나리오가 탄탄하고 무엇보다도 화려한 카메라의 움직임에 깜짝 놀랐다. 원래 발리우드 영화는 다 이런건가, 아님 이 영화가 이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때깔이 인도 영화라기 보다는 할리우드 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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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도시 2 - The Border City 2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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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이유로 놓쳤던 다큐인데 EBS 다큐페스티벌에서 지난 일요일에 방영했다.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1. 먼저 법의 자의성에 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국가보안법이란 준거틀 아래서 인간 송두율의 신념은 유죄라고 판결을 받는다. 노동당원이며 북한을 스무 번 방문한 이력 속에 한 개인의 소신이나 신념이 숙고되진 않는다. 그의 소신은 남북한의 평화적 교류를 원했다는데 주입식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사회는 그를 간첩으로 규정짓는다.  그의 바람은 외로운 영혼이 조국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는데 조국과 조국의 법은 다른 입장이었다. 그가 만난 모든 이가 전향을 권유했다. 전향란 말 속에는 이미 그의 유죄를 인정하는 집단심리가 들어가있으며 전향하면 한국사회는 관용을 베풀거라고..

법을 전달하고 강제하는 건 권력집단이고 네트워크란 말이 있다. 다수의 의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가 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행동을 규제하는 게 법이기도 하다. 국가 질서를 위협하는 기준이 애매모호한데, 그리고 애매모호하다고 생각해야 당연한데 다큐 화면에 담긴 모든 이가 법의 확고한 전달자이면서 집행자로 보인다. 수구든 진보진영이든 언론이든 일반인이든 모두 하나였다. 

한 개인의 신념이 적색으로 분류돼 관용을 구해야하는 입장에 대해 분개하는 건 그의 아내가 유일했다. 그의 아내는 전향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현했다. 송두율 교수는 그저 침묵만 지켰다.

 2. 미디어의 경박함이다. 송두율 교수가 지난한 과정으로 유도한 게 언론이다. 그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한 말이, 가장 실망과 상처를 준 게 언론이라고 말했다. 언론의 경박함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언론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거의 모든 곳에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있는 나라에서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이 다큐에서 인상적인 뉴스 인용을 한다. 시청앞에 있는 건물들에 설치된 LCD화면으로 나오는 두 줄짜리 제목이다. 자세한 상황을 가지치기한 제목은 송두율 씨 간첩, 유죄..이런 극단적 활자화는 정보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한테는 폭탄과 같다. 간략한 활자화는 광고처럼 일방적 수용만을 강요하는 일방통행이다. 바쁜 우리는 아무리 경계해도 때때로 간략한 활자의 편리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편리함을 이겨내고 언론이 제시한 일방적 정보를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시각을 가지려면,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노출되기를 즐겨야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3. 송두율 교수는 자신의 신념을 뒤로 물러놓고 한국사회가 원하는대로 일단은 일을 마무리지었다. 타향에서 외로운 영혼이 돌아와 쉬기위해 받아들일 관문이라고, 인천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말했다.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도 그 생각이 변함이 없는지 궁금하다. 조국은 정말 뭘까? 

4. 한국에서 겪은 일을 책으로 쓰고 싶다고 했는데, 그의 책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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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 활 - War of the Arr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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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언 웨스턴같은 마지막 20분 추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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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 활 - War of the Arr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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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전반부에 박진감있고 후반부에 처지면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사람의 기억력에 한계까 있어서 재밌는 초반부보다 지루한 후반을 비난하기 쉽다. 반대로 전반부가 늘어지고 후반부가 재밌으면 한 시간 정도 하품하며 앉아있던 걸 모두 잊고 웃으면서 극장을 나온다. 이 영화는 지루한 한 시간 이십분 쯤을 버티다보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아쉬움까지도 끌어내는 묘한 영화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재밌기 시작하는 지점은 추격전이 벌어지면서다. 추격전은 기시감을 심하게 준다. 서부영화에서 많이 봤던 추격 대형과 비슷하다. 추격당하는 한 사람과 추격하는 무리가 있다. 추격당하는 일인은 추격자들을 매복해서 볼 수 있지만 추격하는 이들은 늘 한 박자씩 늦는다. 서부영화에서 추격당하는 일인이 살아 남은 이유는 산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하고 다가오는 이들을 따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런 익숙한 패턴에 무기가 총이 아닌 활이라는 것만 다르다. 활의 위력이 실제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 속에서 활은 총 보다도 훨씬 근사한 무기였다.  

화살이 시위를 벗어난 후 화살의 속도감과 돌진하는 소리, 그리고 과녁에 맞았을 때 나는 켱쾌한 소리는 음향을 뛰어넘어 고유한 리듬을 가진 음악같다. 미국 서부가 황량한 산이라 시원하고 매복자와 함께 추격하는 이들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다면 이 영화는 한국지형을 추격 당하는 이와 함께 누벼야한다. 눈 앞은 쭉쭉 뻗은 나무와 골짜기들이다. 추격전을 벌이는 이들의 발걸음을 따라 나무와 바위틈들을 함께 봐야하기에 답답하면서도 쫙 펼쳐진 시야가 주는 긴장감과는 또 다른 긴장감이 있다. 추격하는 이들이 달릴 때 머리가 보였다가 사라져서 공격의 시점이나 사건이 벌어질 시점을 가늠하기 힘들다. 서부 영화에서는 상대가 조준 거리에 다가왔을 때 총의 방아쇠를 당기지만 활은 나무 사이로 목덜미가 드러나면 시위를 당기고 화살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게 날아간다. 활을 당기기 전에 화살촉이 클로즈업 될 때는 총을 쏠 때 목표물을 사정권 두고 방아쇠 당길 타이밍을 찾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 있게 된다.  

인질들을 밧줄을 공중에서 빙빙돌려 사람 목에 걸어 죽인다. 서부 영화에서 말이나 동물을 잡을 때 카우보이들이 쓰는 방법을 연상시키는데,고증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민간인을 죽이는 아주 잔인한 방법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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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페미니즘 - 무슬림 여성학자가 밝히는 포스트모던 분석의 한계
하이다 모기시 지음, 문은영 옮김 / 프로네시스(웅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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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정치학의 기본도 모른다고 비난받겠지만 나는 젠더 정치학이 싫다. 젠더에 기반을 두는 게 이미 젠더의 차별을 인정하며 두드러지게 하는 게 아닌가. 최근에는 페미니즘이 그 한계를 인식하고 영역을 확대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젠더에 기반을 둔 게 나는 싫다. 어린 아이가 아니니 싫다고 하려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하니 가끔 젠더 정치학에 관한 글을 읽는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이슬람과 페미니즘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무슬림 디아스포라인 저자를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이슬람의 이미지는 서구에서 만든 것이다. 이슬람 사회를 직접 겪어볼 기회가 거의 없는 상황도 있지만 적극적인 정보를 찾지도 않는다. 그만큼 이슬람은 멀기도 하단 말이다. 기독교 사회라고 지칭하지 않지면 이슬람하면 하나로 묶이는 이미지가 있다. 기독교가 하나의 성서를 기반으로 하지만 여러 문화가 있듯이 이슬람도 코란(이 책에서는 꾸란이라고 표기했다)을 기반으로 각 국가가 처한 지리적, 사회적 상황에 맞춰져 다양한 문화를 형성했다고, 한다. 다양한 문화를 하나의 범주에 묶어버리는 게 얼마나 오류가 많은 지 모르지 않는다.

이슬람권 여자들하면 히잡이 대표적 상징이다. 모든 곳에서 히잡을 입는 게 아니지만 우리는 대체로 히잡을 떠올린다. 성별을 떠나 복장을 규제당하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학창시절에 두발 자유화 1세대, 사복 1세대를 보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사복 1세대 답게 우리는 청바지를 주로 입고 다녔다. 가정선생님은 일주일에 토요일 하루만이라도 치마를 입도록 명령했다. 왜 불편한 치마를 입어야하나 했지만 선생님과 맞장뜰 배짱은 없었다. 그래서 바지를 입고 등교하고 가정시간에만 치마를 가져가서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고 바지 위에 치마를 입었다. 이렇게 몇 주 가정선생님 눈을 속였지만 어느 재수없는 토요일이었다. 바지 걷은 게 내려와 선생님 레이더에 걸렸다. 선생님은 버럭 화를 냈지만 대신 그 다음주부터 의무적 치마 착용은 사라졌다. 만약 짧은 치마를 규제했다면 짧은 치마를 입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규제란 반발을 불러오기 마련이니까.  아무튼 히잡만큼은 아니어도 지금 생각하면 꽤나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러면 히잡을 철폐해야하나, 그것 역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괄적 철폐 역시 규제와 마찬가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포용범위가 여기서 등장한다. 그대로 내버려두는 범위 자체가 고민을 요하는 사항이다.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를 저자는 지적한다. 근대가 부재한 사회에 다양성 수용의 이름으로 전근대를 인정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한다.  

이 저자의 글을 이슬람 사회에서 특히 여성의 위치를 고찰하고 있지만 많은 생각거리와 고민을 안겨준다. 다양성의 범위와 수용 방법에서 하나의 옳은 방법은 없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길만이 옳다. 기존의 이미지를 의심해 보는데서 출발할 수 있겠다. 이슬람 문화권만이 아니라 삶의 큰 테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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