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렌스 맬릭의 첫 장편. 태초에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성경에서 말한다. 그럼 선과 악의 경계를 누가 만들었나. 인간이다. 이 영화는 선과 악의 경계를 모르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스물 다섯 살 청년은 열다섯 살 소녀를 사귀게 된다. 소녀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소녀는 자신을 인기없고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소녀로 묘사한다. 소녀 눈에 청년은 꺼리낌이 없고 자신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하는 사람이다. 청년은 쓰레기를 치우거나(청년의 직업) 가축을 몬다.-청소부를 그만두고 카우보이로 이직을 한다. 그러나 기성세대인 소녀 아버지의 눈에는 소녀와 청년의 계급이 다르다. 다툼이 있어 우발적으로 소녀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소녀와 도피 행각을 하게 된다. 살인 후 청년의 관심사는 살아남는 것이다. 지명수배 당하고 있는 자신을 잡으려는 사람은 전부 죽이게 된다. 거대하고 아름답지만 황량한 자연 속에서 청년과 소녀는 그저 생존을 이어나가려는 피조물일 뿐이다. 살인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나 살인 후 심리적 변화를 이 영화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살인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다. 청년은 순간적으로 광기를 드러내지만 곧 온순해지며 대체로 무심하다. 마틴 쉰의 분위기는 백치 같으면서도 광인으로서의 면모를 잘 살린다.

 

선과 악은 학습된다. 열다섯 살 소녀에게 선과 악에 대한 학습이 미완성인 상태이다. 소녀 역시 무심하지만 청년을 관찰한다. 청년이 살인 이유를 말할 때 소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청년한테 들은 말을 서술한다. 소녀는 청년한테서 선과 악의 형태를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순간, 소녀는 청년을 "덫"으로 표현했으며 어느 순간에 더 이상 청년을 따라가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악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맛 있는 것도 못 먹고 씻지도 못하는 불편함을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 두 주인공은 카메라가 주로 담는 자연 풍광처럼 아주 평온한 표정이고 내적 갈등보다는 단순한 동기로 행동을 한다. 물질 문명을 떠나 광활한 서부를 달리는 영상도 그들의 행동의 단순함에 한 몫 거든다. 분명히 싸이코패스의 이야기지만 요즘 영화에서 보이는 싸이코패스의 기괴함은 없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싸이코패스의 이상 행동은 재미를 위해 설정해서 고착화시킨 작업을 통해 전형화됐다. 이 영화에서 청년의 행동은 살인 하는 순간을 제외하면 성실하고 심지어 친절하기까지 하다. 인간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원동력은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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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혁명 - 통증, 마음이 보내는 경고
존 E. 사르노 지음, 이재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부터 고백할 내용은 참담하지만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좀 적어보겠다. 3년 전부터 목, 허리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어깨 통증까지 찾아왔다. 나는 신체의 자연 치유력을 믿는다. 그러나 믿음은 믿음이고 나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원인을 찾기 위해 이러저러한 검사를 하고 척추, 관절로 이름난(실제로 명의라기 보다는 광고로 그 병원 브랜드를 믿게 만드는) 양방, 한방 병원을 전전했다. 근육인대 주사도 맞고 근육인대 강화를 위한 한약도 꽤 오래 복용했지만 치료를 받으면 일시적으로 통증은 잦아들다가도 다시 찾아오곤 했다. 얼마 전에 멜라니 선스트럼이 쓴 책에서 통증은 인지 영역이란 말에 심리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mri상으로 내 증상은 정상적인 퇴행과정이었다. 즉 지극히 정상이란 말이다. 의사들은 여기에 덧붙이기를 좋아했다. 지금은 젊어서 괜찮지만 나이들면 목, 허리 디스크가 될 수 있다고. 병원을 전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의사들마다 소견이 조금씩 다르며 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일반론적 치료법만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치료법과 증상이 맞는 사람은 낫고 의사의 치료법과 증상이 맞지 않으면 낫지 않는 것이다. 환자의 증상은, 의사들한테 치료법을 구사하는데 필요없는 정보인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 주에 통증 치료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정형외과에 방문했다. 카이로프랙틱 중 sacro-occipital technique으로 치료하는 병원이다. 척골(꼬리뼈)와 후두골의 교정을 목적으로 하는데 스포츠 마사지를 받는 느낌이었다. 3일을 연속해서 받았는데 첫날은 통증이 다 사라져 몸이 날아가는 듯 싶더니 둘째날은 그저그렇고 세째날은 몸살이 났다. 그리고는 다시 통증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듯싶었고 이번 주 월요일은 그저 그랬다. 내일 예약이 되어있는데 안 가기로, 과감하게 결정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내 통증은 긴장성근육통증후근TMS=tension myositis syndrome이다. 물론 내가 내린 병명이다.ㅋ 내 경우는 경솔한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정밀 검사와 치료 후라 이렇게 자가 진단해도 별 무리 없어 보인다.

 

TMS의 요는 이렇다. 무의식 속에 불안과 분노를 지니고 있는데 표출하거나 인정하지 않아서 뇌가 신체로 주의력을 돌리기 위해 맵핑mapping하는 거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 무의식 속에 찌그러져 있는 분노와 불안을 들여다보고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즉 내 의식이 무의식을 끄집어내서 뇌가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그릇된 맵핑을 내가 의식적으로 다시 맵핑하면 된다. 저자가 재활의학과 교수라 헛소리는 아닌 것처럼 들린다. 저자의 의학 지식을 빌리자면 신경 이상이 있으면 마비가 오지 통증이 오진 않는단다. 나는 정보를 대체적으로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라 활자화된 정보는 의사의 말보다도 더 도움이 된다. 어깨에 통증이 있어도 팔을 움직이는데는 문제가 실제로 없단다. 팔을 움직이지 못하는 건 두려움 탓이란다. 어제 오늘, 병원 대신 수영장으로 가서 실험을 했다. 어제는 이 책을 다 읽기 전이라 조금 두려웠지만 오늘은 확신을 가지고 평영을 했다. 처음에는 역시 좀 망설였지만 십 분 쯤 후 내 사악한 무의식의 뇌와 싸우고 팔을 정상 각도로 휘둘렀다. 정말 통증은 참을만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증상 모두가 내게 해당하는데 특히 자세근, 꼬리뼈부터 엉덩이, 척추, 경추가 앉기만하면 쓰라리거나 말로 할 수 없는 찌릿한 불쾌한 통증이 있어왔다. 이상한 건 일할 때는 모든 신경이 통증에 가 있는 거 같은데 주말에 친구들을 만날 때면 통증을 잊고 집에 오는 길에 내가 오늘 안 아팠구나, 하고 놀라게 된다는 점이었다.

 

성형외과가 강남역이나 압구정역 중심으로 성업 중이라면 다른 모든 지역에서는 척추관절 전문병원이 성업 중이다. 월요일 아침 병원 대기실은 하얀 머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가득 차 있다. 나도 가끔 섞여있었고. 저자가 지적하듯이 의사들은 엑스레이나 엠알아이 결과에 의존해 신경차단술을 권하고 시술을 받으면 얼마 동안 괜찮지만 또 통증은 재발해서 병원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모든 의사들이 올바르지 못한 자세를 꼽지만 환자의 심리는 돌보지 않는다. 따라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한테는 기계 따위가 보여 줄 수 없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도 의대에서 가르쳐야한다! 저자는 자신의 논문을 의학계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종의 미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 역시, 저자처럼 인체의 무한한 능력을 믿는다. 암인데 병원을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검사로도 별 병이 나타나지 않는데 통증이 계속 된다면 한번 쯤 TMS를 의심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현대 의학은 인체의 극히 일부만을 알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다. 요즘 병원들은 통증에 대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적극 활용해서 정상인 사람한테도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을 것을 권한다.  건강염려증도 현대인의 덕목으로 만들어놓고 마케팅하는데 의학적으로 무지한 환자들이 가상의 위험에 겁에 질려 포로가 되버린 거 같다. 부끄럽지만 나는 전형적인 의학 마케팅의  포로고.

 

아무튼 어제보다는 오늘 훨씬 통증이 줄었고 앞으로 내 힘으로 통증을 퇴치할 수 있을 거 같은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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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에 관한 주제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기 때문일까,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영화는 수도 없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간단하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에서 게르트루드라는 여인의 이야기다. 게르트루드는 사랑이 전부라고 믿으며 남편(들)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믿는다. 운명은 예정되어 있다는 보수적 사회에서 운명은 개척하는 거라는 신념을 지켜내는 여인이 네 명의 남자와의 사랑을 통해 감독이 생각하는 사랑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난다.

 

게르트루드가 남편한테 공허한 결혼생활을 끝내고 싶다면서 시작한다. 남편은 잘 나가는 변호사며 수상이 되려는 무렵이다. 아내의 선언에 남편은, 황망해한다. 남편의 관심은 게르트루드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지이다. 남편은 아주 현실적 인물이며 현재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에 다른 그 무언가가 있다는 걸 이해하려들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인물이다.

 

게르트루드가 현재 사랑하는 젊은 음악가다. 이 젊은이는 예술가답게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며 밤 문화를 즐긴다. 게르트루드는 그의 충동적 기질을 포옹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맞춰 줄 것을 요구한다. 젊은이는 결정적 순간에 게르트루드를 사랑한 적이 없노라고 말한다. 젊은이한테 게르트루드는 계급이 다른 여인에 대한 스쳐지나가는 호기심 대상이었고다. 게르트루드는 자신의 사랑이 젊은이를 구속할 수 없는 걸 알게 된다.

 

게르트루드가 결혼 전 사랑을 알게 해 준 이는 현재 남편의 친구다. 그 사랑을 떠난 이유는 남자가 일이 바빠지면서 게르트루드를 버거워했기 때문이다. 게르트루드는 남자한테 일이며 우주이길 원했지만 남자한테 게르트루드는 현실적 존재였다.

 

게르트루드가 세 남자를 사랑하면서 원한 건 한 가지였다. 그녀가 남자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었다. 사랑은 다소 관념적이고 정념적이지만 현실에서 사랑은 관념적일 수 없고 이상적일 수는 더더욱 없다. 게르트루드는 이 사실을 깨닫고 자아를 찾아 혼자 늙어간다. 마지막 장면에서 게르트루가 파리에 가도록 도와준 교수가 등장한다. 게르트루드의 집은 소박하게 꾸며져있고 책상에 앉아 있다. 교수가 자신이 출판한 책을 가지고 와서 묻는다. 뭘 하면서 지내는지. 청소를 하고 속옷을 빨고 다림질을 하면서 보낸다고. 교수와의 친분이 30,40년이 돼 가고 교수는 이따금씩 편지를 보냈지만 게르트루드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느새 나이가 들어 만나 죽음을 이야기한다. 게르트루드는 자신의 묘비에 새길 말은 '사랑은 모든 것'이며 아네모네를 심어달라고 했다고. 말한 적 없는 사랑이 무덤가에 와서 아네모네를 보며 자신의 사랑을 기억해준다면, 그게 사랑이라고. 이 노교수에 대한 사랑을 이상적으로 지키기위해 게르트루드는 우정이란 겉모습을 유지했다. 사랑의 완성은 이별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교수의 마지막 방문도 서둘러 배웅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는 여인을 보면서 대단한 여인이란 생각이;;; 자신의 신념을 현실에서 지켜내기 위해 고독함을 택했다. 이상을 이상으로 지켜내려면 현실의 쾌락을 희생해야하느니...... 권위적 사회 질서 속에서 게르트루드가 보여준 강인한 주체 의식에 찬사를 보내긴 하지만 꼭 그렇게 이상을 지켜야하나...현실과 타협을 좀 할 순 없나, 하는 꼼수가 떠오르기도.

 

2. 사실 극의 흐름만 본다면 아침 드라마 줄거리다. 현재 남편이 있고 젊은 애인이 있고 뒤이어 과거 애인까지 등장한다. 막장에 가까운 흐름인데 이 영화는 막장이 아니라 예술이다. 프레임을 구성이 거의 회화처럼 이루어진다. 대화로 극이 진행되는데 게르트루드와 남자가 대화를 할 때 두 사람은 마주 보지 않고 허공을 응시한다. 어떤 표정도 없이 목소리에 감정의 무게가 실린다. 덴마크어를 모르지만 어떤 어조인지는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묘미는 대사가 일상어가 아닌 함축어로 이루어진 점이다. 가령 과거 애인이 함께 떠나자고 할 때 대사는 이렇다. "One should be the two. We should be one." 그러자 게르트루드가 "We should be the two. But we should be one."한국말로 옮기면 좀 많이 낯 간지러운데 이런 언어 유희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큰 즐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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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미치광이 사랑>을 두 편 봤다. 한 편은 자크 리베트가 감독한 255분짜리! 또 한 편은 피에르 소렌톤이 감독한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

 

프랑스인들은 fou란 단어를 애용하는 듯. 고다르 영화에도 <미치광이 피에로Pierrot le fou>가 있다. 한 달에 제목이 같은 영화를 두 편 보고 나니 불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들여다 보게 된다. 우리말로는 미친으로만 번역되는 fou는 영어 mad나 insane의 의미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fou는 말 그대로 미친에서 부터 열정적인, 분별없는, 멍청이, 요즘 감탄사로 대박까지 아우를 수 있는 의미다. 두 영화 속 인물들 모두 어딘가에 정신이 나가있다. 자크 리베트 영화는 사랑에 미친 여자가 나와서 광기로 보이는 행동을 한다. 연출가로 나오는 남자는 라신의 <앙드로마크>를 연출하는데 열정적이다.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는 이브 생 로랑이 애정했던 집, 그림 콜렉션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박물관 같은 집을 만들면서 이브 생 로랑이 지녔던 광기와 열정이 공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다가온다.

 

<미치광이 사랑>은 3주간에 일어난 두 가지 이야기가 각각 전개된다. 하나는 연출가인 남자가 라신느의 비극을 연습하는 과정을 담으며 배우와 감독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관객과 공유한다. 그러나 보면서 그런 고민은 좀 혼자 하시지, 하는 생각으로 살짝 괴로운 시간이었다. 리베트의 견해로 연출가는 그저 상황을 담는 사람이다. 그래서 리허설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영화 속 영화로 담아낸다. 라신느의 언어는 아주 난해해서 그 해석에 관객으로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려면 라신느의 극에 대한 기본 감성이 선행되야하는데 감독은 관객의 수준을 너무 높이 보신 듯. 라신느를 누가 읽겠는가. 어떤 비평가 말대로 라신느는 프랑스 국민도 접근하기 어려운 작가고 외국인한테는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작가다.

 

4시간에 달하는 상영 시간동안을 버텨 낼 수 있는 건 라신느의 극 외에 한 커플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덕분이다. 연출자의 아내인 클레르는 연극에서 배제된 후 남자를 의심하기 시작하며 광기를 보인다. 자신만의 관점으로 거리 소음, 광경 등을 녹음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여자가 배우에서 자신을 삶을 연출하는 연출가로 역할로 이동하면서 남자와 결별을 하고 싶어한다. 남자는 연극도 그렇고 실제 생활도 그렇고 어떻게 해서든 극을 완성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한다. 연출가로서 배우, 그러니까 아내의 광기에 맞춰주는 꽤 긴 시퀀스가 이어진다. 침실에 익숙한 벽지를 뜯어내고 벽을 허물고 텔레비전을 도끼로 부수는 과정이 의아하면서도 실감나게 담긴다. 리베트 감독은 이 장면을 두 배우한테만 맡기고 계속 그들이 하는 대로 두고 카메라에 담기만했다고 한다. 아무튼 두 인물의 광기어린 행동을 지켜보는데는 인내심이 좀 필요하다. 감독이 되는 인내보다는 관객이 누리는 가벼운 즐거움이 더 좋다;;;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는 이브 생 로랑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은퇴를 선언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되고 이브 생 로랑의 불안한 정신적 삶을, 그의 연인 피에르 베르제가 기억을 통해 주로 서술된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미적 환영이 필요하다"는 피에르의 말대로 이브 생 로랑은 비가시적인 생각에서 가시적 창조물을 만드는 창작자로서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물리적 도구들이 필요했다. 술과 마약, 세 채의 집과 미술 콜렉션들. 파리의 집은 작은 미술관과 같았고 마라케시에 있는 집은 이국적인 영감의 원천이었고 외진 노르망디에 있는 집은 마르셀 푸르스트의 인물들에게 바쳤다. ( 각 방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붙였다)

 

이 영화는 유명인 이브 생 로랑이 아니라 자연인 이브 생 로랑의 삶을 조명한다. 그의 명성 뒤에서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한 번의 오뜨꾸뛰르를 여는데 드로잉만 4만 장을 했다고 한다. 얼마나 성실히 일했는지 가늠이 가는 수치일 뿐 아니라 같은 머리로 매번 다른 생각을 해내야하는 걸 요구하는 우리는 잔인하기도 하다. 가까이서 지켜 본 피에르도 디자이너의 삶을, 경탄한다. 사람이 그 무리한 일을 감당하려면 신의 보호가 있어야한다고. 이브 생 로랑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창작과 새로움에 대한 무한한 열정은 숙연하고 존경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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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너와 나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장폴 뒤부아 지음, 김민정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길을 잘 찾는 남자가 있다. 그가 어느날 길을 잃는다. 인생에서도 숲에서도.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아내와는 이혼을 하고, 생식 능력은 없는 남자. 그는 자신의 것이라고는 쌓으면 이십삼 센티미터 높이인 책들 밖에 없다. 십삼 년동안 졸음을 참아가며 책상 앞에 앉아 쥐어짠 결과물은 물리적 수치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남자는 길을 잃기로 작정해 본다. 미국에서 운전 기사, 건축 현장 잡일꾼, 정글 가이드 등 일용직을 해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몫의 문제가 있다. 정글을 1시간 동안 둘러보는 관광인들조차도 숨겨진 일상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 그는 거대한 숲으로 들어간다. 동물과 바람과 햇빛, 풀과 나무, 호수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인간의 나약함을 직시하기 위해서. 자연 속에서 남자는 한 마리의 짐승보다도 더 나을 게 없다. 조그만 상처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일용할 양식을 구할 방법도 모른 채, 할 줄 아는 거라곤 그저 걷는 일 뿐이다. 지도도 무용지물이다. 남자의 지도 읽기 능력은 인간이 만든 유형물을 읽어낼 때나 유익하다. 13일 간 살아 나온 사람이 없다는 숲을 헤매며 살아난 남자는, 일상이라는 행복에 잘 다다른다.

 

장 폴 뒤부아의 글을 나는 좋아한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을 바라보는 유머러스한 시각도 좋고 깊이도 좋다. "인생은 무수한 평범한 일과 아주 가끔 그럴듯한 일로 이우러져있다"는데(로알드 달님 왈) 우리는 대부분 평범한 일을 들여다 보는 재주가 없어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다른 이의 일상을 블로그로 읽는다. 장 폴 뒤부아는 아주 작은 일을 확장해서 그려내는 일을 잘 해서 타고난 이야기꾼 측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 문장들을 하나 하나 쌓아 사이를 정성스럽게 메꾸는 진 빠지는 일을 한다고 쓴다. 이야기 서술이 일인칭으로 되어 있어 허무를 느끼는 남자한테 몹시 감정 이입이 든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고 싶은 욕구나 에너지로 충만한 사람을 만나면 내 역할은 부러워하는 거다. 나이 드는 게 별게 아니라 욕구가 없어지는 게 아닌 가 싶다. 나도 남자처럼 숲에라도 들어 갔다 나오면 다시 원기를 회복해서 나오려나.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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