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사무라이>는 집에서 편안한 자세로 절대로 볼 수 없고 반드시 극장의 좁은 좌석에 갇혀 불이 켜질 때까지 스크린을 응시해야하는 물리적 환경이 필요한 영화다. 207분이라는 긴 런닝타임도 있고 당시에는 몹시 스펙터클하다는 찬사를 받은 영화지만 지금 보면 액션씬들은 귀엽기만 하다. 영화는 세 파트로 나눠지는데 마지막 전투씬을 제외하고는 생각보다 정적이다. 지루한 이유 중에는 선명하지 못한 필름의 상태 탓도 있다. 한 시간 가량, 7인의 사무라이를 모으는 과정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진다. 각 사무라이들의 성격과 개성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시간인데 머리 모양이 모두 비슷한데다 화면도 어두컴컴해서 다 비슷해 보이는 주책맞은 눈으로 보게 된다. 심지어 후배는 모든 사무라이들 얼굴 속에서 고창석이 숨어있는 것 같다고.ㅋ 중요한 첫 파트에서 이럴 지경이니 마을 사람들과 사무라이들과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다루는 두번째 파트에서는 온 몸이 욱신거렸다. 전날 운동으로 덜 풀린 근육들이 돌봐달라고 달려드는 것 같은데 거의 만석이라 팔다리도 뒤척이기 조심스런 관람 환경이었다. 영화 관람 자체가 큰 일(!)을 하고 있다는 망상으로 빠져들게 했다.

 

중간에 인터미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 영화는 세번째 파트에서는 눈을 크게 뜨게 한다. 내가 유심히 본 건 산적떼를 잡기 위한 전술이다. 머릿수로는 맞짱 뜰 수 없기에 한 사람씩 마을로 들여보내서 포위해서 제거한다. 리얼리티가 있다기 보다는 영화에서 스펙타클이란 어떤 것인지 제공한다. 아키라 감독과 공동 시나리오를 쓴 하시모토 시노부가 쓴 <복안의 영상>에서 <7인의 사무라이> 작업과정을 재밌게 읽었다. 근데 나는 아키라 감독의 유머러스한 영화보다는 진지한 후반기 영화가 더 좋다. 그러니까 하시모토 시노부가 공동 작업이 아니라 갈 길을 잃은 영화라고 혹평했던 <란>이라든가 <가케무사>같은 비극적 요소들이 있는 영화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들은 컬러 영화기도 하다. 즉 비교적 선명한 필름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고 화면의 선명함도 영화 감상에 분명히 영향을 미치긴 하는 것 같다. 아무튼 드디어 <7인의 사무라이>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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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로사와 아키라 님의 영화는 언제나 퀄리티 보장이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어찌나 통렬히 꿰뚫고 계신지. 사무라이한테 성주가 되는 것을 이전의 성주를 죽였고 다음의 성주한테 살해될 위험에 24시간 노출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피는 피를 부르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겉으로는 용맹한 척하지만 내면은 공포로 가득 차 있다. 한 인간이 품은 심리적 공포가 자신을 죽이는 매커니즘에 대한 고찰이다.

 

2. 내용은 이렇다. 안개가 늘 자욱해서 빠져 나오기 쉽지 않은 거미숲에서 두 사무라이가 혼령을 만나 미래 계시를 듣는다. 한 사람은 장차 성주가 될 거고 한 사람은 그 아들이 성주가 된다는. 혼령의 말은 중요하지 않다. 혼령의 말을 들은 인간의 마음이 중요하지. 우리가 점쟁이나 타로점을 볼 때를 떠올리면 쉽다. 그들은 실제로 구체적인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에둘러 일반적인 말만을 하는데 거기에 해석을 붙여 맞네, 안 맞네 하고 판단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그러니 혼령이 뭐라 말했든 쿠데타를 일으키는 건 인간의 결정이고 인간의 몫. 아무튼 한 남자는 성주를 죽이고 예언대로 성주가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성주가 된 후 헛것을 볼 정도로 정신이 쇠약해진다. 이유인즉 함께 혼령을 만났던 이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불안의 늪에 점점 깊이 빠지기 때문.  

 

이 와중에 또 한 번의 혼령과 만난다. 거미숲이 일어나 공격하지 않는 한 모든 싸움에서 이긴다고. 숲이 공격할 수 없으니 기쁨은 잠시. 정말 숲이 움직여서 성으로 진격을 하고 성주는 제정신이 아니다. 우리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듯이, 이 성주의 판단력은 마비되고 그저 숲이 공격한다고만 믿는다. 실은 적이 나무로 위장하고 진격하고 있는데. 인간의 믿음은 너무나 불완전해서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듣는다. 낭패는 이 불완전함을 간과하고 자신의 믿음을 맹신하는데서 온다.

 

3. 이 영화를 보다 일본 피의 역사에 유독 궁금증이 일어났다. 성주의 영광은 잠시 뿐이고 언제나 전쟁이고 피를 볼 수 밖에 없는 사무라이 문화에 평화 개념이란 없나? 평화로운 성주 계승 전통은 부끄러움인가? 교토 성에 갔을 때 궁금했던 게 가구가 하나도 없었고 그냥 넓은 다다미에 공간은 그저 문으로만 분할된 구조였다. 어제 영화에 성의 공간을 좀 유심히 봤다. 역시나 가구가 하나도 없고 성주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두툼한 매트를 까는 정도다. 언제 누구의 소유가 될 지 모르는 버라이어티한 공간이라서 그런가. 보물 하나도 없고 그저 목조나 석조 건축물일 뿐인 성을 위해 사람의 목을 쉽게 쳐버리고 그 하찮은 공간을 차지한 성주는 좌불안석이니. 뭐 성주란 명예직이란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높은 곳에 앉는 순간 죽을 날을 세는 것과 마찬가지니....문득 쉬크한 젠스타일의 기원 배경이 이런 섬뜩함에서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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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기력이다 - 인지심리학자가 10년 이상의 체험 끝에 완성한 인생 독소 처방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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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하고 운동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고..겉으로는 무기력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주말에 교보에 들렀다 몇 페이지 읽는데 지금 내 상황이 무기력이란 진단을 내리고 차분히 읽어봤다. 특별히 새로운 말이 있거나 충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진 않다. 하지만 시기적절한 독서다. 자기계발서 같은 이 책은 위로의 말을 늘어 놓기 보다는 진단을 내리게 한다. 잠재의식 속에서 애써 피하고자했던 문제의 샘으로 걸어가게 한다. 문제의 원인을 알면 해결책도 있나니.

 

무기력은 우울증 등과는 좀 다르게 정상적 생활이 가능하기에 간과하기 쉽고 성격이나 기질로 분류하기 쉬운 듯. 아무 것도 안 하고 싶은 게 무기력아닌가, 하고 생각했다면 그릇된 생각이다. 무기력은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상황을 회피하려고 다른 행동을 하게 되니,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활동적일 수도 있어서 은밀한 무기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럼 무기력은 왜 생기나? 경험에서 나온다. 즉 무기력은 학습으로 생긴다. 어떤 일에 대한 실패나 좌절로 인해 자신만의 인지 프레임을 형성하고 새로운 상황에서도 기존의 인지 프레임화가 작동해 비건설적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제일 중요한 건 이 잘못된 인지 프레임을 다시 설정하는 것. 인지 프레임을 바꾸는 방법이 꽤 실용적이고 구체적으로 쓰여있다. 인지 프레임을 먼저 바꾸면 그 뒤에 따라오는 행동 패턴도 달라진다는 말. 그럴듯하다. 무기력도 학습이니까 새로운 학습 패턴을 습득하면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침에 왜 눈을 뜨나, 저녁에 왜 늦게까지 깨어있나, 를 묻는 칸에서 나는 무너졌다. 이유를 쓸 수가 없다.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운 좋게도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들을 해 볼 수 있었고 내 뜻대로 살아봤다고 믿는 편이다. 그 중 원치 않은 두 번의 실패가 나를 한량(?)으로 만들었고 무목적을 목적으로 만든 듯. 사람마다 바닥의 기준이 달라서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고 고마운 줄 모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유유자적한 삶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마음 속 고독의 우물은 몇 달간 계속 커지기만 했는데 이제 조금 줄일 수 있을 거 같은 빛을 봤다고 해야하나. 두고 볼 일이지만 인지 재프레임화, 책이 가이드한대로 꼭 해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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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된 시간 - 영화 예술의 미학과 시학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지음, 김창우 옮김 / 분도출판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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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흥이 안 날 때 집어드는 책 중 한 권이다. 종교가 없는 내게 성경과 같은 역할을 하는 책다. 책의 내용 면에서도 형식적 면에서도. 어느 챕터든 내키는대로 펼쳐서 읽기 시작하면 떠돌던 마음이 비틀거리다 가만히 주저앉는 거 같다. 게다가 내 머리속에 초강력 성능을 발휘하는 지우개가 있어 책을 펼칠 때마다 매번 새로 읽는 듯한 기분이다. 어느 날은 도스토예프스키 인물들에 대한 예리한 지적에 감탄하고 또 어느 날은 타르코프스키가 추구하며 구현하는 영화 언어에 고개를 끄덕인다. 또 어느 날은 영화 산업에 대한 통찰에 깜짝 놀란다. 20세기 후반에 쓰였지만 21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유효할 안목을 보여주신다.

 

오늘은 내 인생의 연출자는 나란 생각과 맞물려 역시나 랜덤하게 읽다가 몇 줄 적는다.

 

"예술은 이리저리 실험하도록 허용하는 학문은 아닌 것이다. 실험이 다만 실험의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면, 즉 한 예술가가 한 편의 영화를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극복하는 은밀한 작업 과정을 묘사해 주고 있지 못한다면 예술의 본질적 목표는 이룩되지 못한 것이다."(121)

 

인생도 진정한 예술처럼 실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만의 삶의 스토리를 완성하는 중에 여러가지 실험은 필수지만 실험 속에서 파생된 본질을 간과하면 그 삶은 스토리를 잃고 단편적인 파편만으로 남는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공포란 게 등 뒤에서 와락 껴안는 거 같다. 다행히 타르코프스키는 해결책도 주신다!

 

"현실을 단순히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거만함 없이, 현실의 영원한 의미를 추구(했다). 그리고 이 관찰이 예리하면 예리할수록 그만큼 독창적이 되고, 독창적이면 독창적일수록 그 관찰은 형상에 그만큼 더 근접해 있는 것이다."(130)

 

이 말은 하이쿠 시인들에 대한 찬사를 보내면서 관찰이 영상화로 나아가는 계기를 적은 거지만 영화 이외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영화 언어를 설명하기 위해 책을 썼지만 영화는 현실과 유기적 관계를 이루고 있기에 삶과 사물에 대한 기본 자세에 대한 언급이 많다. 삶의 태도에 도움되는 말이 수두룩하다. 삶에 대한 성실한 태도가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전제조건이다. 내일부터는, 서두르지 말고 겸손하게, 주춤거리기는 해도 멈추지 말고, 태양을 맞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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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뇌 - 기쁨, 슬픔, 느낌의 뇌과학 사이언스 클래식 9
안토니오 다마지오 지음, 임지원 옮김, 김종성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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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주 게을러져서 책도 몇 권 안 읽는데 그나마 읽은 책 기록 남기는 것도 귀찮다.-.-; 아무 것도 안 남기면 나중에 뭘 읽었는지 전혀 기억 못하니 귀차니즘에서 잠시 탈출해보자.

 

뇌과학에 관한 책을 몇 권 읽다보니 분과학문 분야가 다루는 세부 사항보다는 대체적인 지도를 그리게 되는데 그간 읽은 건, 음악, 언어, 기억, 계획과 실행에 관한 뇌 신경학적 관점 다룬 책들이다. 이번 책은 정서emotion와 느낌feeling을 다룬다. 사람이 오감과 육감으로 구현하는 물리적 것들에 대한 공통점이 있다.

 

느낌은 유기체의 가장 윗단계에 있는 작용이다. 저자는 느낌과 정서를 조금 구별한다. 정서가 얼굴표정, 목소리, 특정 행동에서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즉 정서는 행위나 움직임는 가시적 요소를 통해 발생한다. 느낌은 정서가 선행되어야하고 일종의 심상으로 유기체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사적 현상으로 정의한다. 실제 신체 상태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어떤 주어진 순간 뇌의 체성 감각 영역에서 구성되는 실제 지도에서 비롯된다고 함. 음악이든, 언어든, 기억이든, 실행이든, 느낌이든, 그러니까 모두 선행하는 외부 입력이 존재해야한다. 그리고 개체는 그 외부 입력을 자신만의 회로에서 패턴화해서 저장했다가 제3의 외부의 물리적 자극이 있을 때 생긴다.

 

스피노자는 뇌과학과 대체 무슨 관계인가 하면 저자는 마음과 신체의 일원론을 주장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종종 인용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마음의 작용은 신체의 작용이라는 것. 마음은 뇌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뇌가 없다면 마음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뇌사상태에 빠진 사람을 생각하면 일리있기도 한데 완전히 동의하게 되진 않는다. 신체 상태 변화는 분명히 심적 변화로 이어진다. 몸이 피곤하면 짜증이 난다든가 무기력해진다든가, 반대로 몸 상태가 좋으면 기분도 상승 곡선을 그리는 건 분명하다. 저자는 마음의 임무를 몸의 생존을 위해 기능한다고 보는 점이 함정인듯. 스피노자까지 가져온 노력이 좀 물거품처럼 보인다. (사실 스피노자 이야기가 저자의 주장과 잘 섞이지 않고 두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거 같다. 스피노자 일대기와 뇌과학으로. 덕분에 스피노자의 간략한 일대기를 알게 되었지만) 마음이 신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결론내리는 건 과학자의 시선이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한테 일반적으로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말한다. 마음을 고쳐 먹으면 신체 세포나 유익한 화학물질들이 증가한다. 이게 신체 보존을 위해서라니...마음과 신체는 상호작용을 해서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저자의 결론은, 글쎄.

 

아무튼 6월도 나태하게 보내고 있는데 내 마음을 좀 들여다보고 고등생물로서 머리 좀 쓰고 살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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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6-18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만 보고, 스포노자의 뇌를 분석했다는 이야기인줄 알았어요. (하긴 스피노자의 뇌가 남아있을 리가 없죠. 아나톨 프랑스나 투르게네프의 뇌를 분석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는데..) 스피노자의 철학과 뇌과학을 연결하는 이야기이군요.

넙치 2013-06-19 01:41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 스피노자의 사상과 뇌구조일거라고 생각했어요. 기대하고 읽었는데 실망감이 없진 않지만 철학이 늘 의문시하는 부분을 과학이 채워주는 면도 있어 결론은 꽤 흡족한 편이에요.

아나톨 프랑스나 투르게네프의 뇌를 분석했다니, 처음 들어요! 그런 책 알고 계심 귀뜸을...

이태희 2014-04-29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반사 / 정서 / 느낌 / 의식
분명한 구분과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서술적 이해가 아닌 논리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