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ly Planet Portugal (Paperback)
Regis St Louis / lonely Planet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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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리 플래닛 시리즈는 자유여행 혹은 배낭여행자의 바이블이.었.다. 어디까지나 과거 시제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인터넷은 론리 플래닛을 대체하기 충분한 게 아니라 론리 래닛이 업데이트하지 못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한다. 나 역시 틈나는대로 구글링을 한다. 구글의 정보 수집력은 탁월해서 내가 검색한 도시의 호텔이 계속 따라다닌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한 사실을, 구글은 알고 있는 묘한 현상이 발생한다.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기 전 가장 중요한 숙소 정보를 론리 플래닛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기에 론리 플래닛에 대한 충성도가 상당했다. 하지만 이제 론리 플래닛은 서브 머티어리얼이다. 그럴 수 밖에 업는 게 포르투갈 편은 2011년 판이다. 무려 2년 전이다. 여행자한테 2년은 엄청난 시간 이동인데 론리 플래닛은 업데이트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부킹닷컴, 베네르닷컴, 호스텔부커스 등 어디서 자야하는 문제를 이 사이트들이 해결해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론리 플래닛을 구입했을까. 첫째 관성의 법칙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겠다. 대체로 내 여행의 동반자는 론리 플래닛이었다. 관성의 법칙을 거스르는 건, 꽤 용기가 필요한데 나는 모험을 싫어하고(어찌보면 아이러니다. 늘 떠날 여행자이고 싶으면서도 돌아올 곳을 모색하기에) 익숙한 것에 뒹굴거리고 싶어하는 심리가, 하나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동선을 짜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에 시각을 사용하는 자료가 필요했고 론리 플래닛은 루트를 짜는데는 여전히 가치가 있다.ㅎ다만 동선을 계획하는데만 유용한 자료로 전락한 론리 플래닛의 운명에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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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의 밤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5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경호 엮음 / 범우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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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에 대학입시 면접을 보면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해서 즉흥적으로 에리히 레마르크라고 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열여덟 무렵 <개선문>을 읽고 감동받아 뱉어낸 말일 것이다. 그리고는 레마르크를 잊고 살다가 몇 년 전 적립금에 눈이 어두워서 레마르크의 <리스본의 밤>을 펼쳤는데 별로 감흥이 없어서 적립금은 고사하고 내 십대의 기억마저도 의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레마르크에 끌린 점이 무었이었던가...안타깝게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떤 책은 십대에 인상적이었는가하면, 어떤 책은 인생의 굴곡(?)을 경험 한 후에야 다가오기도 한다. 레마르크는 전자의 경우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아무튼, 지금부터 두 달 후 나는 리스본에서 인천행 새벽 비행기를 탈 것이다. 새벽 비행기라하니 뭔가 사연있어보이지만 사실은 구차하게도 할인 항공권 시간에 맞춘 것이다.-_-; 이 책을 다시 펼쳐 든 이유는 바로 이것.  이번 독서의 중심은 리스본 방문을 앞두고 왜 제목이 <리스본의 밤>인가, 밝히는 거 였다. 안타깝지만 못 찾겠다. 다 안 읽었고 앞으로도 다 읽을 가능성이 요원해보인다.

 

레마르크는, 알려져있듯이, 전쟁을 소재로 소설을 쓴 작가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름 모를 한 남자, 슈바르츠다. 게슈타포한테 쫓겨서 몇 년을 슈바르츠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남자다. 몇 년을 위조한 여권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남자다. 이 남자는 여러 도시를 떠돌면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려 시도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나는 고향을 떠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서울을 떠나는 일에 적극적이고 서울을 떠나는 일에 설레면서 새벽까지 폭풍검색을 자처한다. 아이러니하다. 떠나려고 애쓰는 이가 돌아오려오 애쓰는 이의 이야기를 읽는 건. 그러나 돌이켜보면,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에 떠나는 것과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가는 이의 삶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궤적이다. 슈바르츠는 대체로 불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멋진 말을 했다.

 

"지난 5년간의 도망생활을 통해 내가 지니고 온 것은 예민해진 감각, 삶에 대한 의지, 범법자가 갖는 조심성과 체험뿐이고 다른 것들은 완전히 파산 상태였던 거지요. 국경과 국경 사이의 그 숱한 밤들, 보잘것 없는 식사와 몇 시간의 수면뿐이었던 생존만을 위한 권태감, 그 모든 것들은 거실 무지방을 넘는 순각 사라진 것이었지요. 비록 파산을 하기는 했으나 부채는 없습니다. 나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 경계를 넘는 동안 5년이란 세월이 준 자아는 자살을 한 것이었지요. 따라서 그건 단순한 귀환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었지요. 나는 죽었고 다른 자아가 살아남았는데, 그건 책임이 따르지 않는 세월이 준 선물이었지요. 중압감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88쪽)

 

슈바르츠에 내 삶을 시뮬레이션해보면 , 실제 내 삶은 슈바르크의 삶과는 백팔십도 다른 위치에 있다. 나는 언제나 떠나기를 갈망하면서도 제자리에 있고, 늘 돌아올 수 있고, 실제로 돌아온다. 나는 이것을 그리스의 비극에 대항하는 르네상스식 인간이라고 격상해서 말하고 싶다. 하지만 실은 내가 겁쟁이라는 것. 내가 떠나는 삶을 갈망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비겁하게도) 돌아올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다른 자아를 얻는 행운은 영원히 거세된 것이지도......(나는 금성좌인데도 왜 토성좌같은 멘탈을 소유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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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전쟁 화폐전쟁 1
쑹훙빙 지음, 차혜정 옮김, 박한진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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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경제란 뭔가에 대한 강한 회의심이 들었다. 결국 소수 금융재벌들의 패권 다툼으로 출렁이는 한 분야가 경제란 말인가? 우리는 경제란 기차에 탑승해야 한다. 것도 꼬리칸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임금상승률은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하게 설정된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아는 게 사는데 무슨 차이가 있나. 언제나 물가는 임금보다 비싸다는 걸 알아도 유산상속자가 아니라면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한다. 물가 상승률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노동자들이 행동을 취하면 마지못해 임금은 오른다.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공공요금을 비롯해서 물가는 줄줄이 오른다. 그러니까 기업들은 임금상승을 기다렸다가 오른 임금 상승분을 날쌔게 채가는 거다.

 

이 책은 현재 화폐 시스템으로 정착하기 까지의 화폐 및 금융사를 전반적으로 다룬다. 케네디가 죽은 것도, 레이건이 피습당한 것도 모두 배후에는 국제 금융재벌이 있다고 추측한다. 두 사람 모두 금 본위제 화폐를 다시 부활시키려고 했었다. 저자는 중국의 위안화가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금 보유량을 늘려야한다고 한다. 왜 금인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궁금하긴 햇지만 왜 금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IMF때 온 국민이 국가를 구하기 위해 금을 내놓을 때도 의아해 하기만 했다. 화폐는 사실 일종의 약속이다. 누군가 마음이 변해 약속을 어기면 그 화폐는 가치가 없어진다. 서브모기지 사태로 달러의 위상은 약화되면서 기축통화로 어떤 화폐가 대안일지를 다루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유로는 너무 불안정한 화폐라고 했다.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혀서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화폐지만 자국의 이익에 위반될 때는 언제든 깨질 수 있는 화폐라 기축통화로서의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위안화를 대안으로 조심스럽게 점쳤다. 일단 사용 인구가 많은데 아직까지 국제 사회에서 중국이 행사하는 경제적 입김이 기축통화로서 시기상조라고.

 

이 책을 읽다보니 간과한 게 금의 가치다. 금은 통화로서의 가치가 역사 내내 떨어진 적이 없다. 나도 책 한 권 읽고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을 왜 간과하게 된걸까? 선물이나 하고 액세서리나 만드는 값 나가는 금속쯤으로 보게 된 걸까. 저자에 따르면 근대 금융재벌들의 음모 탓이다. 금융재벌들은 은행을 통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고 돈을 늘린다. 현재 금융파생상품의 수익률이 현저히 떨어졌는데 미국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종류의 파생상품은 경악 그 자체다. 최근에 죽으면 보험금을 받는 생명보험을 담보로 대출을 하는 상품이 있단다. 사망보험금의 30-40%를 미리 쓸 수 있는 상품이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으면 사망보험금은 은행이 가져간단다. 아직까지 수익률이 높진 않다고는 하지만 돈의 흐름을 좇는 인간의 머리 속에는 숫자로만 가득 차 있는 게 아닌지. 현대판 파우스트가 아닌가.

 

이 독서의 목적은, 뭐 거시적으로 경제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내 노후 준비에 도움이 될까였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가 아니다. 보편적 복지가 거론되고 있기는 하지만 가야할 길은 멀고 증세에 대한 저항도 크다. 나부터도 국가로부터 받은 게 없다고 생각해 세금은 아깝다고 여기는 후진적 마인를 소유한 1인이다. 그러니다보니 내 노후, 유사(질병, 사고) 시를 모두 내가 책임지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 틈새를 이용하는 게 보험회사고. 건강 관리에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데이터나 기사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오늘 기사에는 먹고 사는 게 가장 부담이란 머릿기사를 봤다. 전세는 희귀하고 월세 부담에 관한 기사가 줄줄이 이어진다. 현재도 과거에도 부동산 정책에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돈의 흐름을 좇는 이들의 머리속에 문제가 있다. 정말 금이 대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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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자의 욕망을 우아하고 실실 웃음이 나게 묘사한 영화다. 두 달 후 결혼할 제롬이 휴가지에서 친구 이웃집 자매를 알게 된다. 십대인 자매, 로라와 클레르. 로라는 단번에 제롬한테 호감을 보이지만 클레르는 열애 중이라 제롬을 그냥 이웃집 아저씨 취급한다. 제롬의 도덕성으로 무장해서 사리분별력도 있고 쿨해보인다. 그러나 절친 오로라와 대화 속에서 제롬의 도덕성 가면 뒤에는 초식남으로서의 면모가 있다. 자신한테 관심없는 여자를 쫓아다닌 적도 없고 이성과 일정한 거리를 편안하게 여기고 사랑보다는 우정이 인생의 동반자로 좋다는 주관의 소유자다. 오로라는 제롬의 숨겨진 욕망을 부추기고 제롬은 못 이기는 척 십대 자매한테 차례로 접근한다. 물론 십대들이 중년 아저씨한테 관심있을 리 없다. 로라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고 과감하게 키스를 하지만 로라가 놀라자 제롬은, 너의 반응을 보려한다는 식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리고 클레르가 등장한다. 로라가 지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클레르는 섹시한 면이 있다. 제롬은 클레르의 무릎에 집착하는데 왜 무릎인고 하니, 머리칼을 쓰다듬거나 어깨를 만지면 클레르가 뒤로 움츠러들 것을 예상한다. 그러니까 클레르의 무릎은 제롬한테 허용된 마지노선인 셈이다. 위선적인 면이 있는 제롬은 자신이 거부당하지 않을 선을 잘 알고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클레르는 또래 남자친구와 열애 중인데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친구를 만난 걸 제롬이 보고 고자질한다. 클레르는 동요하며 울고 제롬은 클레르의 무릎을 쓰다듬을 기회를 얻는다.

 

이런 이야기인데 웃음이 실실 나온다.ㅋ 제롬을 보면 찌질남과 쉬크남의 경계가 한끝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롬은 한 번도 떠나가는 여자한테 매달려 본 적이 없는 쿨한 사람이지만 십대 자매들한테 보여준 은밀한 추태(?)는 찌질이의 모습이다. 제롬은 소녀들보다 인생의 다채로운 맛을 많이 경험했다. 여러 경험을 통해 도덕으로 무장도 하고 자기 통제도 배운다. 비겁함이나 열정없음을 포장하는 법도 터득하게 된다. 이 아저씨, 이성에 대한 열정은 사라졌다고 말하는데 실은 열정을 바쳤다가 상처받을까봐 두려워서 이성으로 포장했다. 나이에 아주 알맞은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욕망하였으나 절제하였노라. 근데 내가 이 아저씨 나이쯤 되니 이 아저씨의 비겁한 찌질함이 완전 이해된다는 것.

 

덧. 한 달 간의 바캉스 동안 일어난 일의 기록이다. 바캉스 전과 후에도 어떤 일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한 달동안 미묘한 내면의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한 영화다. 바캉스가 한 달이라면 이런 사소한 일을 관찰하는 힘이 커져서 이야기로 발전시킬 힘도 생길지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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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8-29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재밌을 것 같아요. 찾아보니 최근에 아트나인에서 상영했었군요. 에릭 로메르 영화..늦여름에 어울리는 것 같아요. 영화를 보며 자신의 지난 여름날들을 생각하면서 말이죠.

넙치 2013-08-31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트나인 8월 프로그램 다 좋았어요. 로메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지적인 버전으로 언제봐도 므흣합니다.ㅎ전에 봤을 땐 웬 아저씨 얘기인가했는데 이번에 보니 감정이입 90프로였습니다.ㅋ
 

 

 

 

 

 

 

 

 

 

 

1. <감시자들>도 그렇고 <숨바꼭질>도 그렇고 한국영화 스릴러 장르는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거 같다. 아주 정교하진 않아도 스릴이 파생하는 지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다만 범인에 대한 정보가 중간에 드러나고 그 이후에는 좀 긴장감이 덜 한 면이 있다. 이것도 몇 년 지나면 개선되어서 웰메이드 영화가 나올듯.

 

2. 이 영화는 그럴듯하지만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많다. 낡은 아파트 사이에 벽과 벽이 허술한 점, 범인이 여자인데도 남자보다도 힘이 세다는 점. 물론 살인을 할 때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보통 때와는 다른 괴력이 나온다고 한다. 있음직하지만 범인은 연쇄살인범인데 초반에는 아주 지능적으로 보이지만 정체가 드러난 후에는 별 계획없이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힘이 나오는 게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 특히 손현주와 격투씬(?)에서는 더욱 리얼리티 감소. 게다가 인물들은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고 자신이 뛰어다니는지.ㅋ 뭐 사건을 이어가기 위해서인데 아이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엄마라면 자신이 뛰어가기 전에 먼저 경찰이나 누군가한테 도움을 청한 후 뛰어가야하는 거 아닌가. 아님 그 순간에 판단력을 잃고 달려가는 모습이 진짜 모성인가. 모성의 리얼리티가 뭔지 모르겠다.

 

3. 스릴러로서 허술한 점이 많은데도 이 영화는 꽤 미덕이 많다. 먼저 익명성에서 생길 수 있는 그럴듯함이다. 아파트란 공동주택과 택배기사로 분장한 범인의 모습이란 소재는 흥미진진하다. 허름한 아파트와 최신식 아파트가 이야기의 주요 배경이다. 최신식 아파트의 장점은 익명성을 보장한다. 키를 소유할 수 있다면 암묵적으로 그 공간에 대한 사용자로 권리를 부여받는다. 즉 출입통제 시스템은 공간에 사는 사람을 믿기 보다는 출입시스템을 통과하는 작은 키를 믿는다. 스릴은 여기서 파생된다. 입구를 통과하고 비밀번호로 현관문을 열어야하기에 우리는 대체로 집이 안전하다고 믿지만 그 비밀번호란 게 그렇게 믿을 만한 게 아닌 건 공공연한 사실. 편혜영의 단편 중에 이런 익명성을 풍자한 소설이 있다. 키를 안 가지고 담배를 사러 나온 주인공이 자신의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아이러니를 섬뜩하게 그렸다.

 

반면에 낡은 복도식 아파트는 최신식 아파트와 다르다. 입구 통제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긴 복도를 걸어가면서 몇 호에 누가 사는지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 영화는 여기서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옆집과 벽을 공유하는 구조를 통해 이웃집과의 경계를 허물고 이어진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그래서 주인공이 베란다나 벽장 벽면으로 다가갈 때마다 등장할 다른 풍경에 침을 꼴깍 삼키는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4. 전반부에서 범인은 택배기사로 변장을 한다. 매연에 찌든 파카와 두툼한 솜바지, 그리고 커다란 오토바이용 헬멧. 택배기사의 모습은 일상적 풍경이어서 무심히 넘어간다. 헬멧 안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건 현대인이 아닐터이니. 범인은 이 익명성을 이용한다. 영화 후반에 공포가 조성되고 보이지 않는 헬멧 에 대한 공포가 일어나 아파트 주민들이 경계를 하고 택배기사들은 곤란함을 겪는 소동이 일어난다.

 

5. 범인과 범인을 쫓는 인물 사이에 접점이 있다. 두 사람 다 트라우마가 있다. 범인은 집에 대한 애착이 도를 넘어 집착으로 발전하면서 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연쇄살인도 아무렇지 않은 캐릭터다. 얼마전 까지 있었던 한국인의 초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집을 사려고 막대한 대출을 받고 파산한 하우스푸어쯤이 아닐까, 하고 추론해볼 수 있다. 범인을 쫓는 이는 입양아로 친자인 형의 컴플렉스를 이용해서 재산을 가로챘다. 그리고는 죄책감에 결벽증을 갖고 사는 남자. 손이건, 바닥이건, 공공 화장실 변기건 닦아야하는 캐릭터. 외적 평온함과 달리 내적으로 쫓기고 불안한 사람. 이 캐릭터 역시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고.

 

6. 쓰다보니 할리우드 스릴러들이 밀도는 높은데 괴리감이 좀 있는 볼거리가 있는 영화라면 이 영화는 밀도는 좀 떨어져도 일상과 가까운 소재라 섬뜩함이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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