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궁금했던 건 영화 제목이다. 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인가? 나처럼 궁금한 이가 있을지도 모르니 먼저 쓰면,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들이 FDA가 승인 안한 약을 사기 위해 가입한 클럽이다. 이제 영화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 한동안 에이즈가 조류독감이나 신종플루만큼 전세계 뉴스를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부터 에이즈에 관한 뉴스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에이즈 감염환자의 이야기인데 시점이 독특하다. 보통 환자가 주인공이라면 투병기로 흐르는 편인데 이 영화는 에이즈 환자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만들어 사업을 하는 이야기다. 아카데미 시상식 주간이라 미국영화를 몇 편 연속해서 봤는데 한국영화가 최루성 감수성을 강요한다면 미국영화는 냉소를 바탕에 깔고 있는 듯하다. 둘 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냉소가 지배하는 사회는 최루성 감수성 사회보다 삭막한 건 확실하다.

 

론 우드루프는 마약, 술, 섹스 중독자에 로데오 경기 출전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초다. 어느 날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는데 에이즈 진단을 받고 한 달 산다는 시한부 통보를 받는다. 보통은 울고 불고 투병기가 시작되지만 우드루프는 의사한테 욕을 날리며 퇴원하고 여전히 술과 마약으로 산다. 생존을 위해 식약청 허가를 받지 않은 약을 구하는데 적극적일 뿐아니라 자신을 생체실험대상으로 삼아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조직한다. 그의 병은 그가 약 유통 사업가로 변신하는 계기가 된다.

 

<노예 12년>과 비교하면 이 영화 감독은 연출이란 게 뭔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제약회사의 신약 개발과 병원의 네트워크가 위독한 환자들을 위한 게 아니라 제약회사를 위한 것이라는 메커니즘을 배경으로 깔아준다. 영화의 무게 중심은 전적으로 론 우드루프란 개인의 행적에 실려있지만 한 개인이 상황에 따라 변하는 과정을 담으면서 전반적인 메커니즘과 식약청의 무능함과 무지함까지도 에둘러 말하는 현명한 전략을 취했다.

 

우드루프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중증 환자인데도 동정을 하기 쉽지 않고 감독도 환자에 대한 동정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종이짝처럼 삐쩍 말라서 척추도 곧게 못 세우는 우드루프는 자신의 생을 연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제도권망에서 할 수 없는 선행을 한다. 그런데 이게 선행처럼 보이지 않는다. 술수를 쓰고 폭리를 취하기 때문인데, 나는 이런 접근이 지극히 현실적 관점이라고 생각해서 소름이 돋았다.

 

사실 병원에 발을 딛는 순간 환자는 약자의 위치로 내려가면서 의사의 말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현대의학이라는 게 숫자로 계량화된 학문이고 의사란 사람들은 인체에 대한 통합적 사고가 아니라 지극히 일부만을 알고 있고 환자 개인의 특성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나는 의사한테도 인문학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환자 입장에서는 의사의 말은 절대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라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누구나 우드루프처럼 배짱이 있는 게 아니어서 의심을 누르고 무너지는 신뢰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게다가 의사들은 간단한 병도 미래까지 예측하면서 부풀리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별 일 아닌 일도 병원에 가면 큰 일이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다. <질병판매학>이란 책이 있듯이 과잉 진료와 과잉 처방을 알아채기는 하지만 적절하게 타협할 수 밖에 없다. 환자는 약자이므로.

 

우드루프는 본의 아니게 식약청과 싸우는 상황에 직면한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불법으로 만들기 위해 법이 개정되고 의사의 처방전 없이는 약을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이 과정에서 식약청의 태도인데 부작용이 없는 고농축 단백질도 허가를 안 주는 식약청의 모순과 싸운다. 우드루프는 철저하게 자신을 위해서 싸웠지만 결국 그의 싸움으로 많은 죽어가는 환자들도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영화에서 대의라는 건 없다. 철저하게 개인을 위해 살다보면 대의도 만들어진다.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진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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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0 0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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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0 14: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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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적 마르크스주의 Trans & Cross 3
앤디 메리필드 지음, 김채원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일단 글쓰기 스타일이 영국사람 같지 않고 프랑스 사람같다. 두 번이나 이 사람 프랑스 사람인가하고 책 날개를 들여다 보았다. 책 날개에 소개글에 보면 프랑스에 살고 있다고 한다. 구글링을 해봤더니 데이비드 하비의 제자다. 자신의 주장-공간을 이동하는 나비처럼 살고 있다. 어느 문화의 자장권 안에 놓여있나는 창조적 생산자한테 중요한 거 같다.

 

마술. 참 모호한 단어다. 나는 마술이란 단어를 싫어한다. 마술하면 눈속임 아닌가. 실재하는 대상이 변하는 게 아니라 착시로 인해 사물의 환영을 보게 하는 게 마술이다. 그래서 마술이란 단어도 싫고 마술적 리얼리즘란 말도 싫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감수성없이 생겨먹었을까. 그런데 마술적 맑시즘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 궁금했다. 소제목을 보니 전복적 정치학과 상상력Subversive Politics and the Imagination이다. 이 제목이 이 책과 어울린다. 내가 생각하는 마술이란 단어는 한국적 개념이다. 영단어 마술적은 '매력적', '불가사의한'부터 '초자연적인supernatural'이란 의미가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문화권에서 마술이란 단어는 확실히 긍정적 단어는 아닌 듯하다.

 

 

마술적 맑시즘을 끌어내기 위해 맑시즘사 계보를 훑는 방법을 사용한다. 계보를 훑는 서술 방법은 즐거움도 있지만 산만하기도 하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며 끼워 넣은 인용들이 산재해 있는 느낌도 받게 된다. 맑스주의자들의 주장만 보는 게 아니라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부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앙리 르페브르의 일상성까지 넘나들며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다. 그리하여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까지 인용한다. 이래서 내가 마술을 싫어한다.@.@ 과잉으로 넘치는 서술방법ㅠㅠ

 

"과거" 맑시즘이 현대로 넘어오려면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시적 감수성과 힘이다. 나도 동의한다. 시를 쓰란 말이 아니라 시가 지니는 정신이다. "반란의 물질성은 비물질적 성격이 있고 비물질적 반란의 유통은 구체적 전복에서 생산 요소"(46쪽)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게 시적 감수성이다. 현대 사회에서 시적 사고, 시적 행위가 가진 분열적이고 마술적인 에너지 때문에 권력은 시적 감수성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는 권력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말하고 권력이 거의 가늠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시는 곳곳에 있으면 권력이 접근할 수 없는 어딘가에 있다. 시는 감정을 자극하고 존재를 건드리며 이상한 언어도 말한다. 종종 시는 특별한 목소리, 유령 같은 목소리로, 권력이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억압할 수 없는 정신으로, 완전히 침묵당하지 않는 정신으로 권력에 말대꾸를 한다. 꿈과 행동의 통일이 시적 행위 속에서, 시적 계기 속에 일치되어 있으며, 그것은 번개와 같은 필연성으로 효과를 생산한다."(267-267쪽)

 

여기서 시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시가 아니라 시가 문자로 이루어진 다른 장르에 행사하는 전복적인 정신을 의미한다. 상당히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낭만은 왜 로망이 되었나? 낭만적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스탕달이 말씀하셨단다. 이 글에서 말하는 권력이란 기존 정치를 포함한 신자유주의란 기존 경제질서까지 아우르는 광의로 사용하고 있다. 지배계급만 계급에 의식적인 시대에 "비계급"의 상황에서 나아갈 길은 창조적 파괴, 부정적 긍정이란 말로 결론짓는다. 인식은 상상력으로 나가는 첫걸음이다. 이 책은 많은 사회과학서들이 저지르는 오류를 적어도 범하지 않는다. 많은 사회과학서들은 인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인식의 첫단계에서 피로로 기진맥진하게 되기 일쑤다. 이 책은 피로한 인식을 적절하게 강조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보다 낮에 나는 나비의 긍정성을 강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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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듯이 인종차별도 그 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긴 역사를 가진 이야기를 다루는건 힘이 들다. 새로워야하니까. 물론 너무 먼 과거라 잊혀진 역사를 소환하는 기능을 하는 장점이 분명히 있긴하다. 그러나 잊혀진 과거 역사 소환에서 그친다면 좋은 영화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영화는 과거 인간의 잔인함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적으로는 많이 아쉽다.

 

이 역시 감독의 탓이라고 생각하는데 <셰임>에서도 그랬는데 인물한테 감정이입을 시키게 하는 면이 감독한테는 결핍되어 있다. 이 감독이 관객이 인물과 하나가 되길 바랄 때 음악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방법은 잘 못 만든 스릴러 영화에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려고 음악을 사용할 때같은 효과를 낸다. 그러니 미리 짐작이 가버린다. 사실 플랫이란 인물의 개인사를 통한 노예의 비참한 상황을 알리려면 좀 더 플랫에게 렌즈를 가까이 들이대고 플랫의 내면을 담아내야했다. 플랫은 누가 봐도 억울하고 학대받을 때는 가엾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인물인데 감독은 이상하게 플랫과 잔인한 주인, 그리고 그 주인이 애정하는 여자 흑인 노예랑 자꾸 삼각구도를 만든다. 차라리 대놓고 삼각구도를 만들고 백인 농장주의 잔혹함과 흑인노예에 대한 애정, 양가적 감정을 좀 섬세하게 다루던지. 여러 가지 감정선을 사용하는데 어떤 감정선도 섬세하게 처리되지 않고 깊이 있게 다가가지 못한다.

 

노예제 전반을 다루는 걸 포기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세부를 잡아서 전체를 떠올리게 하는 방법이 좋았을 텐데.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원작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원작이 있어도 영화화 하는 건 전적으로 감독의 몫이다. 책을 바탕으로 해도 어떤 부분을 취사 선택해서 극대화하는 게 영화고 그게 감독의 역량이다. 아무튼 스브 맥퀸 감독이 인물들을 배치하는 방식을 통해 보면 인물들은 이성적으로는 안스럽지만 감정적으로는 별 느낌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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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6 18: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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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9 2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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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9 2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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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9 2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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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즈 미켈슨, 이 분 <더 헌트>에서 아주 진지하고 강직한 인물을 연기했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이미지다. 메가박스에서는 상영 전에 <한니발>시리즈물 광고가 나온다. 이 분이 한니발 렉터로 나오던데 이 분 때문에 보고 싶다. 역할이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외모도 강직하게 생기셨다. 프랑스 영화라 이 분이 불어를 하시는데 아주 낯설었다. 발음은 그닥 좋지 않은데 목소리와 표정이 안 좋은 발음을 압도하는 위엄을 지니셨다.

 

2.

나는 평소에 어떤 물리적 폭력도 반대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내 극단적 생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부유한 상인인 미하엘 콜하스가 부당하게 자신의 재산을 귀족한테 빼앗겨서 재판을 청구하려했으나 기각당하고 청원하러 갔던 아내를 잃고 악덕 귀족과 전쟁을 벌이는 서민 대장이 된다. 그러나 현명한 공주가 나타나서 폭력을 종식시키고 미하엘의 소원대로 재판을 한다. 이게 두 시간 가량의 줄거리인데 강한 인상을 남긴 건 재판 결과다. 미하엘은 법이 집행할 수 없는 걸 무력으로 이루었다. 무력은 상대편 뿐 아니라 아군한테도 피를 요구하는 속성이 있다. 미하엘도 알고 있다. 공주가 대화를 하기를 원했을 때 무장해제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재판을 하기를 원했다. 재판으로 부당하게 뺏긴 좋은 말 두 필을 찾고, 다른 이들의 희생도 보상을 받았다. 재산을 뺏은 귀족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미하엘이 원하는 모든 게 이루어졌다. 이제 미하엘의 차례. 그는 사람들을 모아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했다.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교수형을 미리 짐작하면서 진짜 그가 교수형을 받으려고 나무에 걸린 목줄로 올라갈 때 받는 배신감. 법은 그러니까, 공평하면서도 억울한 심리는 끝까지 어루만질 수 없는 허점을 지니고 있다. 법치주의의 맹점이지만 공공질서와 안녕을 위해서는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이 영화는 미하엘한테 감정이 이입될 수 밖에 없다. 재산과 아내를 잃은 그를 외면한 법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폭력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미하엘이 교수형을 받으니까 분노같은 게 치민다. 그가 왜 폭력을 선택했는지, 법은 이해하지 않고 그가 폭력으로 저지른 결과만을 판단한다. 폭력을 피하려면 미하엘은 부당함을 참았어야했나. 이 영화를 보니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폭력은 나쁘다는 명제를, 나는 참으로 만들어 놓았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모든 폭력이 나쁜 건 아니다, 를 참으로 만들어야하는 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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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독이 조지 클루니고, 출연진을 보면 어떻게 극장으로 안 달려갈 수 있는가.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나는 믿는다. <굿나잇 앤 굿럭>에서 연출력을 보면 조지 클루니는 감독으로도 소질있어 보였다. 꼭 주연만을 고집하지도 않고 단역으로도 나오고 독립영화에도 나오고..영화적 행보만을 본다면 조지 클루니는 영화 작업이란 자체에 대한 성실성을 지니고 있고 배우란 직업 의식보다는 영화란 매체를 몹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재미없다는데도 기대를 다 버릴수는 없어서 조금쯤 기대감을 가지고 봤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욕부터 나온다.-.-;

 

2.

의도는 알겠다. 양괄식으로 주제를 배치했다. 2차세계대전 중에 예술품을 지키느라 사람 목숨을 잃는 게 가치있는가, 하는 주제의식에서 출발한 듯 보였다. 내가 생각하는 조지 클루니란 바로 이런 사람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은 그렇다 치더라도 훌륭한 배우들이 존재감 없이 밋밋하게 나열되는 건 감독이 모두 떠 안아야할 실패다. 케이트 블란쳇만이 이 영화에서는 살아있는 캐릭터였다. 캐릭터가 잘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케이트 블란쳇이 평면적 인물을 해석한 것으로 보이니 전적으로 케이트 블란쳇의 개인기 덕분이다. 가끔씩 피식 하는 실없는 웃음도 영화 스케일에 맞지 않는 가벼운 대사 몇 마디 탓이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는 말이 어울리는 대사들이다.

 

3.

조지 클루니가 던진 화두 예술품은 사람의 목숨과 맞바꿀 수 있나? 어쩌면. 예술은 관객을 필요로 한다. 관객이 없는 예술이 있을 수 있을까? 이조백자, 고려청자가 당시에는 생필품이었지만 미적 가치 기준을 적용해서 예술품으로 분류하기 시작한 건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의 기준은 자의적이니까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는 사람이 최소한 전제한다는 필요조건이 성립되어야한다. 모뉴멘츠맨의 활약은, 그러니까 후방에 있을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사람들의 심미적 기쁨을 위해 희생한 셈이다. 물론 후세도 그들 덕분에 재로 사라졌을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에 많은 군인들이 후방에 있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사라져갔다면 모뉴먼츠맨들 역시 같은 이유로 사라져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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