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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적 마르크스주의 ㅣ Trans & Cross 3
앤디 메리필드 지음, 김채원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일단 글쓰기 스타일이 영국사람 같지 않고 프랑스 사람같다. 두 번이나 이 사람 프랑스 사람인가하고 책 날개를 들여다 보았다. 책 날개에 소개글에 보면 프랑스에 살고 있다고 한다. 구글링을 해봤더니 데이비드 하비의 제자다. 자신의 주장-공간을 이동하는 나비처럼 살고 있다. 어느 문화의 자장권 안에 놓여있나는 창조적 생산자한테 중요한 거 같다.
마술. 참 모호한 단어다. 나는 마술이란 단어를 싫어한다. 마술하면 눈속임 아닌가. 실재하는 대상이 변하는 게 아니라 착시로 인해 사물의 환영을 보게 하는 게 마술이다. 그래서 마술이란 단어도 싫고 마술적 리얼리즘란 말도 싫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감수성없이 생겨먹었을까. 그런데 마술적 맑시즘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 궁금했다. 소제목을 보니 전복적 정치학과 상상력Subversive Politics and the Imagination이다. 이 제목이 이 책과 어울린다. 내가 생각하는 마술이란 단어는 한국적 개념이다. 영단어 마술적은 '매력적', '불가사의한'부터 '초자연적인supernatural'이란 의미가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문화권에서 마술이란 단어는 확실히 긍정적 단어는 아닌 듯하다.
마술적 맑시즘을 끌어내기 위해 맑시즘사 계보를 훑는 방법을 사용한다. 계보를 훑는 서술 방법은 즐거움도 있지만 산만하기도 하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며 끼워 넣은 인용들이 산재해 있는 느낌도 받게 된다. 맑스주의자들의 주장만 보는 게 아니라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부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앙리 르페브르의 일상성까지 넘나들며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다. 그리하여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까지 인용한다. 이래서 내가 마술을 싫어한다.@.@ 과잉으로 넘치는 서술방법ㅠㅠ
"과거" 맑시즘이 현대로 넘어오려면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시적 감수성과 힘이다. 나도 동의한다. 시를 쓰란 말이 아니라 시가 지니는 정신이다. "반란의 물질성은 비물질적 성격이 있고 비물질적 반란의 유통은 구체적 전복에서 생산 요소"(46쪽)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게 시적 감수성이다. 현대 사회에서 시적 사고, 시적 행위가 가진 분열적이고 마술적인 에너지 때문에 권력은 시적 감수성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는 권력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말하고 권력이 거의 가늠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시는 곳곳에 있으면 권력이 접근할 수 없는 어딘가에 있다. 시는 감정을 자극하고 존재를 건드리며 이상한 언어도 말한다. 종종 시는 특별한 목소리, 유령 같은 목소리로, 권력이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억압할 수 없는 정신으로, 완전히 침묵당하지 않는 정신으로 권력에 말대꾸를 한다. 꿈과 행동의 통일이 시적 행위 속에서, 시적 계기 속에 일치되어 있으며, 그것은 번개와 같은 필연성으로 효과를 생산한다."(267-267쪽)
여기서 시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시가 아니라 시가 문자로 이루어진 다른 장르에 행사하는 전복적인 정신을 의미한다. 상당히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낭만은 왜 로망이 되었나? 낭만적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스탕달이 말씀하셨단다. 이 글에서 말하는 권력이란 기존 정치를 포함한 신자유주의란 기존 경제질서까지 아우르는 광의로 사용하고 있다. 지배계급만 계급에 의식적인 시대에 "비계급"의 상황에서 나아갈 길은 창조적 파괴, 부정적 긍정이란 말로 결론짓는다. 인식은 상상력으로 나가는 첫걸음이다. 이 책은 많은 사회과학서들이 저지르는 오류를 적어도 범하지 않는다. 많은 사회과학서들은 인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인식의 첫단계에서 피로로 기진맥진하게 되기 일쑤다. 이 책은 피로한 인식을 적절하게 강조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보다 낮에 나는 나비의 긍정성을 강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