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판으로 입력하는 게 아니라 음성으로 입력하고 출력하는 시스템을 보고 꽤 근사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운영시스템이 인공지능이라니. 머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일 거 같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연락이 안 닿아 정신줄 놓고 계단에 주저앉는 장면이 있다. 그 때 테오도르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많은 행인들이 자신처럼 운영시스템과 대화를 하며 손에 든 폰을 들여다보는 장면이다. 우리 지하철 내부 장면과 비슷한데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아직 말을 하지는 않는다. 언제가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 속에 있는 실체가 없는 대상과 말하기를 더 즐거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등골이 오싹하다.

 

테오도르의 직업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편지를 대신 써 주는 작가다. 이런 직업이 실제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테오도르는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대신하는데 익숙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테오도르만이 아니라 사람이란 자신의 감정에 너무 몰입해 있어서 객관적일 수 없고 그러다보니 실수를 저지르고 낙담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혼을 앞두고 행복한 과거는 고독을 더욱 깊게, 그리고 처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행복했던 기억의 파편들은 신경을 툭툭 건드리고 내면으로의 침잠을 부추긴다. 사람은 다양하고 나와 같지 않다는 걸,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막상 자신과 다른 게 느끼는 걸 알 때 분노하거나 당황해서 관계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실체 없는 인공지능을 가진 운영체계와의 연애라니. 어떤 메일을 보내고 받았는지, 단순하고도 중요한 일부터 메일 발신자의 정서 변화까지 알아주는 소울메이트. 과연 운영체계 사만다는 살아있는 걸까, 죽은 걸까. 나는 어떤 면에서 사람이 사람한테 위안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인간은 영리해서 각자 위안을 받을 방법을 찾는다. 어떤 이한테는 종교일 수 있고 또 어떤 이한테는 지름신일 수 있듯이, 나는 영화나 책에서 위안을 찾는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앞을 응시하며 희노애락을 현실에서 보다 더 극적으로 느끼면서 나는 과연 살아있는 삶을 사는 걸까, 하는 질문을 문득문득 던진다. 내가 살아야 하기에 나는 살아있다고 대답을 해야한다. 테오도르 전처가 말한다. 실제 사람을 대할 자신이 없으니까 운영체계나 만나고 있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는 사만다도 시간이 흐르자 테오도르에게 흥미를 점점 잃는다. 테오도르가 인간계에서 두려워했던 지점이다. 사랑이나 흥분의 감정은 영원하지 않고 실체가 없어도 둘의 관계에서 기복을 필연이다. 정점 후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하강 곡선에서 어떤 적극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영화는 관객에게 과제를 던져준다. 정답은 없다. 기계나 다른 게 아닌 인간한테 다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걸 탐구하는 과정이 정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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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우 혹은 등장인물

세상에, 세 배우 모두 훌륭하다. 한 번도 배두나가 이쁜 얼굴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영화를 보고 배두나는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아우라가 있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공허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외부에 대한 방어와 불안, 공허를 읽을 수 있다. 밤마다 맥주잔에 소주를 따라 벌컥벌컥 들이키는 행동과 표정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를 짐작한다. 대체 저 여자는 왜 밤마다 술을 물 마시듯이 마시는지 궁금해서 이야기가 전개될 때까지 숨을 죽이게 된다. 전반부를 지나서야 그 공허한 눈동자와 표정의 정체를 서서히 알 수 있다. 대사가 많지 않은 캐릭터인데 배두나의 표정은 그 어떤 대사보다도 서늘한 감정을 전달한다.

 

영화 줄거리를 다 알고 다시 송새벽이 연기한 용하란 인물에 대해 생각을 좀 해봤다. 용하는 개망나니가 맞다. 술 먹으면 개가 되고 의붓딸을 폭행하고. 불법체류자들을 구타하고 임금을 착취하고. 정황상 용하는 줄거리가 드러나지 않았던 영화 초반부터 무언가 구린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한다. 마을의 유일한 청년, 용하가 무슨 일을 하는 지 나중에 드러나도 저 인간은 그럴 인간이지, 라는 공감을 끌어내는데 그게 바로 송새벽의 힘이다. 용하가 도희기 왜 온 몸에 피멍이 들었는지 말해도 관객은 용하의 말을 믿지 않는다. 영남이 믿지 않듯이.

 

마지막 장면에서 한 경찰이 영남이 한테, 도희를 보면 안 됐지만 왠지 무섭다, 고. 보통 사람이 도희한테 갖는 감정을 잘 전달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거짓말을 진짜처럼 할 수 있고, 또 자신도 진실이라고 믿는 아이. 아이는 그 누구한테도 사랑받아 본 적이 없다. 친엄마 마저도 자신을 버렸다는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 폭력적 어른한테 길들여져 있으면서도 폭력적 어른한테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아이. 폭력은 학습이다. 아이는 의붓 아버지의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법을 익혀간다. 아이의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도 폭력과 함께 할 것이라는 걸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2

자라나는 폭력적 성향을 누그러뜨리는 건 우리도 다 알고 있듯이, 관심과 사랑이다. 영남은  (부정적) 관심을 지나치게 받았던 사람이라 타인의 시선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일종의 도주 중인 시간에 영남이 도희한테 순수한 박애주의적 행동을 보여주지만 영남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계기가 된다. 영남이 마음에 커다란 메울 수 없는 구멍을 가진 표정을 왜 갖게 되었나.

 

잔잔하지만 긴장감이 팽팽한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에는 사건들로 휘몰아친다. 후반에 굵직한 사건들이 한꺼번에 터진다. 작은 마을 공동체가 폭력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면서 유대감을 갖는 사건, 영남의 과거, 도희의 폭력성 등등.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뒤에 있다보니 중심이 흔들리는 면이 있다. 인터뷰를 보니, 남을 돕는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걸 전달하고 싶었다고. 영화는 그래서 그렇게 끝이 난다. 영남은 도희를 도와서 한차례 고통을 겪었다. 손 털고 등을 돌렸다가 동료한테 무서운 아이라는 말을 듣자 다시 도희한테 손을 내미는 품성. 이 결말로 이 이야기는 현실이 아니라 영화란 허구라는 걸 환기시킨다. 현실이라면 영남은 도희한테 다시 손을 안 내밀지 않았을까. 현실과는 다른 해피엔딩을 위해 영화가 존재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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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 말이 참 많으면서도 이 영화에 대해 조금만 찾아 보면 너무 많은 글들이 있어서 할 말이 없기도 하다. 누벨바그란 네임텍을 붙이고 다니는 영화. 누벨바그는 말 그대로 새로운 물결인데 어떤 영화적 공통점으로  묶는 게 아니라 제작 환경의 변화로 일어난 하나의 경향이다.  문학을 사랑하고 하드보일드 미국탐정소설을 애정하고 영화, 특히 미국탐정영화를 즐겨 봤던 젊은이들이,극장과 세트장을 나서 거리로 나왔다. 가벼운 카메라를 들고. 그 전 영화들이 제작여건상 세트 촬영에서 이루어졌는데 가벼운 카메라의 장점인 이동성이 지닌 매력은 어마어마했다. 사용하는 이들의 사유에 따라 만들어진 영화는 획기적 혁명과도 같다. 기술의 진보는 사용하는 하는 이의 의지와 총명함이 있으면 재난이 아니라 혁명이 될 수 있다는 테크놀로지의 긍정적 미래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

 

2

이 영화는 핸드헬드 카메라로 찍은 파격적 영상으로 유명하다. 핸드헬드는 요즘 일반화된 기법이어서 독창적 영상이라고 알려진 평가에 물음표를 던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영화가 만들어진 때는 1959년이란 걸 상기해야한다. 무순으로 고다르 영화 네 편을 다시 보니까 고다르는 단 한 편도 영화를 비슷하게 찍지 않았다. 흔히 누구누구 감독하면 어떤 전형이 떠오른다. 감독도 모르는 사이에 본인이 좋아하는 장면이나 씬을 비슷하게 찍기 마련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럴 수 밖에 없는, 그런 관습을 고다르 감독은 지니고 있지 않는 거 같다.

 

올해 깐느 영화제에서 상영된 <Adieu au Langage> 영어와 한국어 제목은 <언어와의 작별>에 대한 고다르 인터뷰 영상을 유투브에서 잠시 봤다. 고다르의 첫 장편영화와 초기작들은 물론이고 2014년에도 고다르의 관심은 단 하나였단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미 본 것만을 본다. 카메라가 잡는 프레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봐야한다"라고 말한다. 여든이 넘도록 고다르는 영화란 매체를 통해 실제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담는 데 골몰해왔다. 영화 미학은 그 다음인 것처럼 보인다. 삶을 영화란 매체를 통해 철저하게 탐구하는 자세를 변함없이 유지했기에 영화마다 다른 방식으로 만든 게 아닌가. 그게 때로는 실험적이고 관습을 배반하는 낯섦을 주는데도 개의치않고. 봐 왔던 게 아니라 프레임 밖, 즉 우리가 보지 않는 것을 담아내는 방법이라면 뭐든 해보는 탐구정신이 실험적 방법을 낳은 게 아닌가. 우리 나이로 치면 85세의 작은 체구의 노인이라 손에 든 작은 물병도 버거워 보이지만 쏟아내는 말은 열정이 넘치고 에너지로 가득차서 영원한 청년 고다르를 볼 수 있어 숙연해진다.

 

3

<네 멋대로 해라>는 원안은 트뤼포라고 한다. 트뤼포가 신문기사를 보고 트리트먼트를 썼고 고다르가 줄거리를 덧붙여 영화로 만들었다. <네 멋대로 해라>는 가장 고다르 영화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글을 썼던 이들이 펜 대신 카메라로 그 매체를 갈아타는 출발선에 있던 영화라 그렇다고 본다. 이 영화는 이중적 독해가 가능한 영화다. 먼저 러브스토리로 볼 수 있다. 갱인 미셸(장 폴 벨몽도)가 뉴욕헤럴드트리뷴 견습기자이자 유학생 파트리샤(진 세버그)와의 사랑.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끌리는 과정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누구인지도 모르는 파트리샤의 말대로 만나지 며칠 안 된 사람이 추근대지만 미셸의 그 알 수 없는 불안 속에 녹아 있는 솔직함에 파트리샤는 끌린다. 파트리샤는 미디어의 일부를 통해 사람을 바라보는 경험을 갖고 있기에 미셸한테서 가공되지 않은 날것을 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미셸은 험프리 보가트 팬이라고 짐작 할 수 있다. 미셸한테 파트리샤는 미국인이고 우리가 영화를 보고 현실과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을 갖듯이 파트리샤한테 미국이란 환상을 발견한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는 이유는, 사랑의 본질, 내가 사랑한 것을 상대한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 쓰니, 참 별 일 아닌 거 같네.-.-

 

두번째 독해는 미국화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시기적으로 미국의 소비주의 문화가 서서서 침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누벨바그 세대들이 프랑스 문화유산도 아끼고 사랑했지만 이들이 영화를 만드는 많은 원천은 미국 하드보일드 장르 소설과 미국식 탐정영화였다. 이들은 미국적인 것에 열광했지만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영화에 이런 양가적 초창기 감정들이 드러난다. 미셰은 험프리 보가트와 포드 자동차를 좋아하면서도 미국적인 것에 구역질이 난다고 한다. 파트리샤의 미국식 불어 발음 역시 영화의 커다란 미장센이다. 게다가 종종 미셸이 말하는 단어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무슨 뜻인지 다시 물어본다. 어린 아이같은 순짐함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미국인이 지닌 무지함을 에둘러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

 

덧.디지털 복원 상영이었는데 좋은 점은 균질한 화면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빛의 콘트라스트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거리 씬은 물론이고 실내 씬도 조명을 안 사용했다고 한다. 거리에서 태양광이 만들어내는 음영을 거의 느낄 수 없어 좀 아쉽다. 그래서인지 기억 속에서 보다 훨씬 영화 묘사톤이 밝다. 화면 탓인지 내 감정 탓인지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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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Art and Life (Paperback)
존 러스킨 지음 / Penguin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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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 책 번역본들로 나와 있는 건 너무 지엽적인 것만 돼 있다. 원서를 검색하다가 제목을 보고 주문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책이 해외주문인데 이 책은 국내에 이미 들어와 있는 책인지라 더더욱 주문할 수 밖에 없는 구조. 막상 읽어보니 내용은 좀 뜻밖이도 하다. 두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고딕의 본질The Nature of Gothic과 나머지 하나는 철의 작품 "The Work of Iron.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책을 주문할 때 대체로 목차를 안 보는 걸 깨달았다. 주로 제목만으로 주문을 하는 내 경향을 파악함. 앞으로는 목차도 훑어볼 것.고딕건축 및 고딕예술에 관한 글이라는 걸 알았을 때, 왜 제목에 라이프가 들어가나 분노했으나 책장을 넘기면서 분노는 잦아들고 밑줄 긋는 자세로 바뀌었다. 내가 아는 고딕이란 기독교 문화 절정기에 사치스러운 건축물이라는 단편이다. 러스킨이 제시한 고딕의 특징은 고딕의 기원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러스킨이 주장하는 고딕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Savageness

2. Changefulness

3. Naturalism

4. Grotesqueness

5. Rigidity

6. Redundance

 

고딕의 원시성 내지는 야만성이라니. 원래 고딕이란 단어는 북유럽의 고트족이 풍기는 야만적 특징을 지칭하는 비난조의 용어라고 한다. 남동유럽의 건죽과 대조적으로 견고함과 조잡함rudeness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한다. 어찌보면 고딕을 당연시 받아들이고 그 기원에 대해 의문조차 갖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고딕의 기원은 알려진 바대로 위대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거침 혹은 무례함을 설명하는 러스킨의 시각도 무지 흥미롭다. 러스킨은 거침을 자연주의와 연결시킨다. 그리스인들이 예술에서 완벽을 추구하고 이집트인들이 완벽하진 않지만 "평균"에 도달하는 장인정신을 추구한 반면에 고딕은 "Do what you can, and confess frankly what you are unable to do; netiher let your confession silenced for fear of shame. And it os perhaps, the principal admirableness of the Gothic of the labour of inferior mind; and out of fragments full of imperfection, and betraying that imperfection in every touch, indulgently raise up a stately and unaccusable whole."(12쪽)

 

즉 고딕은 더 높은 것에 대한 완벽보다는 더 낮은 본성의 완벽함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리스 예술이 허용하지 않고 이집트인들이 간과한 점을, 고딕이 성취한 셈이다. 변화의 특징에 대해 러스킨은 고딕을 넘어 일상성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변화란 일상의 단순함을 인식하지 못하면 일어날 수 없는 일다. 우리가 변화란 단어의 의미를 매우 편협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변화 혹은 변화 가능성은 일상성에서 파생한다. 러스킨이 구름을 예로 든 대목이 있다. "wether the clouds be bright or dark, there will be transfiguration behind and within them."(15쪽)

 

이 대목에서 왜 이 책 제목이 삶에 관하여, 로 정해졌는지 알게되었다. 예술은 언제나 변화를 주어야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 우리가 변화란 단어에서 기대하는 정도는 무지 큰데 러스킨이 주목하는 변화는 그야말로 주목해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일 수 있다. 변화가 너무 자주 반복되면 변화가 주는 기쁨은 곧 단조로움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변화의 미묘한 정도나 강도에 주의를 기울이면 기쁨은 나의 몫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삶의 원리가 아닌가!

 

덧. 두번 째 꼭지는 철의 산화과정 예찬이라고 해도 될 듯한 글. 시각은 새롭지만 수긍하기에는 갸우뚱하게 만드는 예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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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책, 실은 청소년기에 읽었던 많은 고전들을 청소년기에는 이해하지 못한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을 즈음, 고전을 다시 읽으면 유레카를 외치게 된다. 나는 책만 그런 줄 알았다. 이번 달에 고다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영화도 책과 마찬가지란 걸 깨닫고 있는 중이다. 고다르가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데 영화를 일종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각종 실험적 기법과 끊임없이 쏟아내는 대사를, 어린 시절에 이해하지 못했다. 기록을 뒤져보니<주말>을 보고 나는 기괴하다고 적어놨다. 지난 주에 <주말>을 보면서 청년 고다르가 지닌 끓어오르는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고다르의 흘러 넘치는 에너지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청년기를 지나니 청년이  보인다.

 

2.

이 영화는 시퀀스숏이 두드러진다. 먼저 오프닝. 베란다에서 내려다 본 길에서 폭력 장면이 일어난다. 그리고 실내에서 마치 인터뷰처럼 진행되는데 여자의 담담하고 무심한듯한 진술을 통해 기이한 부부가 소개된다. 뼛속까지 속물인 부르주아지 부부의 정체성을 한 여인의 대사를 통해 전달한다. 부부의 비틀린 섹스 라이프를 통해 부부를 머리속에 그리게 된다. 그리고 부부가 나타나 유산상속을 받으려고 길을 나선다. 무슨 일인지 도로에는 사고 차들이 추돌 혹은 충돌했고, 또는 전복되거나 불타고 있다. 사람의 사지가 잘리기도 하고 몰골은 처참한데 길 바닥에 주저앉아 느긋한 채 있기도 한다. 우리는 이 모든 끔찍한 광경을 유명한 긴 트랙킹샷으로 본다. 부부가 결국 걷기로 결심하고 지나가는 길을 측면에서 카메라가 따라가면서 우리가 보는 건 전쟁이라도 난 게 아닐까 싶은 정도의 도로 상황이다.

 

이제 부부는 여자의 부모님집, 우앵빌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가지 일을 겪는다. 걷다 지치면 히치하이킹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보여주는 부부의 관계는 하나의 공동의 목표-유산상속-을 위한 연대일 뿐이란 걸 보여준다. 배려나 사랑 따위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동차가 사고가 나서 불에 탈 때 여자는 남편이 이마에 피가 나는데도 내 에르메스백을 외친다. 남편보다 에르메스백을 소중히 하는 여자와 연대하는 남편은, 유산을 위해서 장모도 죽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명장면,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부부는 피아노 연주자를 만난다. 그 연주자가 어느 시골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시퀀스가 꽤 긴데 이 장면에서 엄지 두 개가 아니라 가능하다면 열 개라도 주고 싶다. 연주자를 중심으로 카메라가 먼저 왼쪽으로 천천히 360도 회전한다.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회전했다가 다시 왼쪽으로 회전하면서 끝이난다. 이 영화는 급진적 다큐멘터리 기법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보이스 오버가 계속 되는데 이미지와 개연성이 부재한다. 이미지와 카메라의 관계 조차도 떼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면서 인물이 서 있는 열린 공간을 360도 회전해서 보여준다. 그것도 세 번이나. 그러면서 우리는 집 기둥, 무질서하게 놓여있는 농기구들을 본다. 이런 식의 프레임화나 카메라 움직임에서 잠시나마 부부의 약탈적 본능이 멈추는 것 같다. 음악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 장면이 <주말>에서 가장 평온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여기까지가 2차 세계대전을 거쳐 드골집권기까지의 시기 묘사일 거다.

 

우여곡절 끝에 부부가 우앵빌에 도착해서 여자의 엄마를 죽이고 재산을 갖고 집으로 다시 향하는 여정에서 혁명군을 만난다. 거액의 돈은 혁명군한테는 무의미한 휴지조각이다. 부부는 인질이 되었다가 여자는 마침내 동화되는 거 같은 분위기다.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데 알제리 학살의 은유를 담고 있다. 여기서 카니발리즘까지 확장되는데 혁명과 전쟁의 본질에 대한 고다르의 격한 표현 방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프랑스 혁명력을 사용해서 알제리 학살을 암시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혁명이나 전쟁 모두 학살을 피할 수 없는 폭력적 본질을 말하려는 걸까.

 

3.

이 영화는 내용적으로는 쉽지 않은데 프랑스 근현대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다르가 프랑스 근현대사에 대한 기본 이해를 전제로 하지는 않았겠지만 영화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려면 근현대사를 참조해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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