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도 제목이 안 외워져서-.-; 구글링을 좀 해봤다. 제목에 담긴 함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 좀 적어보면 이렇다. 영화 줄거리가 메타픽션으로 진행되는데 영화 속 연극 제목이 말로야 스네이크Maloja Snake다. 이 연극의 대사가 너무 좋아서 찾아보니 파스빈더의 <페트라 폰 칸트의 눈물>의 연극버전이란다. 아무튼 말로야 스네이크는 기상학 용어다. 말로야 길의 경사를 따라 바람이 불때 따듯한 공기가 올라가서 짙은 안개나 구름이 생기는 매혹적 현상이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 마리아(줄리엣 비노쉬)와 비서 발렌틴이, 스위스의 실스마리아에서 등산을 하면서 말로야 스네이크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실제로 그 광경을 카메라가 담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마리아가 공연하게 될 말로야 스네이크란 제목의 연극을 연습하는 장면은 현실과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연기력, 대중성 모두 인정받는 여배우 마리아는 늙어가고 있다. 그녀의 옆에는 젊은 비서 발렌틴이 있다. 마리아는 젊은 날, 말로야 스네이크에서, 당연히 젊은 여주인공 역할을 했지만 이제 마리아는 나이든 여인의 역할 제의를 받는다. 나이는 참 주관적이다. 실제 늙어가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청년이지만 외부의 시선은 더 이상 청년으로 보지 않는다. 외부의 시선으로 인해 나이는 환기되고 젊음은 퇴색하는 거 같기도 하다. 마리아 역시 영원히 젊은 여인으로 남고 싶어했지만 주변의 시선은 그녀의 나이에 걸맞는 역할이라며 제안을 한다.

 

마리아의 심정은 복잡해지고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발렌틴의 젊음에 매료되고 발렌틴을 붙잡고 싶어한다. 마리아가 붙잡고 싶은 게 젊음 그 자체인지 발렌틴인지, 혹은 작품 속 인물인지 꼬집어서 말할 수 없다. 마리아가 원하는 것은, 시간 속에 사라져가는 것들일 수 있다.

 

이론상 시간을 상대적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정보와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심리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시간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절대적 힘을 갖는다. 그럼 왜 말로야 스네이크가 매력적인가. 바로 시간을 거스르는 자연현상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정의에 따르면, 낮에 밤바람처럼 부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상학자들이 아주 매혹당하는 현상이라고. 낮과 밤의 경계를 거스르는 자연현상을 보면 시간을 거스르는 일이 꼭 불가능한 거만은 아니라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현실에서 마리아는 늙어가는 여배우의 아우라를 밀어낼 패기로 가득찬 젊은 여배우를 본다. 스캔들을 일으키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현재가 더 중요한 젊은 배우를 보고, 마리아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그녀 역시 그랬다.

 

사람은 시간을 절대로 거스를 수 없다. 사람한테 말로야 스네이크의 순간이 있는데 바로 타인과의 관계이다. 한 사람을 둘러싼 여러 타인과 쌓은 각기 다른 관계의 깊이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친구든 동료든, 같은 길을 가고 있든 다른 길을 가고 있든,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의 궤적을 뒤죽박죽 섞어 상대적으로 보이게 하는 힘이 바로 사람과의 관계다. 영화나 소설이 자유자재로 시간을 재구성하는 허구를 보여준다면 우리는 관계를 맺은 타인을 통해 시간을 임의로 재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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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비에 돌란의 영화에서 다루는 정서적 이물감에도 나는 계속 자비에 돌란 영화를 보고 있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감독이 이미지를 다루는 스타일과 주제의식 때문인 거 같다. <마미>를 보고 있자니까 젊은 시절의 왕가위 감독이 떠올랐다. 슬픔이나 기쁨을 전달할 때 등장하는 느린 화면. 프레임 전환이 전반적으로 빠르고 감각적이고 마치 뮤직 비디오처럼 음악도 귀에 쏙 들어오고. 그러다가 어떤 특정한 감정에 방점을 찍고 싶으면 슬로우 모션으로 전개되는 특유의 영화 언어를 사용한다. 보고 있으면 눈이 즐겁고 귀가 즐겁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돌란의 팬이 될 수 없다. 돌란의 관심은 내밀한 관계, 특히 삼각관계에 있다. 그의 모든 영화가 그렇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 상대방을 사랑하는 또는 그 상대방에 호의를 가진 이에게 강한 질투를 느낀다. 질투야말로 사랑의 정점이기는 하지만 노쇠하고 있는 나는 그 질투를 따라가기에는 힘에 좀 부친다.^^;; 자신이 하는 사랑만이 순도 백프로라고 주장하는 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강렬함이 가져다주는 내적 갈등의 소용돌이를 보다보면 기가 빠지기도 한다.

 

 

<마미>는 행동장애가 있는 십대 아들을 둔 엄마와 이웃집 여인의 이야기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잘 요약한 대사가 있다. 마트에서 아들이 딸기향 펜을 보고 이런 말을 한다. "똥이라고 써도 달기향이 나" 아무리 아들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사회적 격리와 치료를 필요로 한다해도 엄마한테 아들은 아마도 달콤한 딸기향이 나는 존재일 것이다.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는 친자관계에 제 삼자의 등장과 그 인물이 보내는 인정은 특별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주관적으로 행동하지만 끊임없이 다른 이의 객관적 인정을 필요로 한다.

 

두 모자에게 이웃집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 역시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서 말을 더듬은지 2년이 되었다. 하지만 두 모자와 있을 때 여인은 말을 더듬는 빈도가 줄어든다. 우정과 관심은 이웃집 여인의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행동장애가 있는 말썽꾸러기 십대 남자아이도 엄마가 아닌 타인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태도에서 공격성이 진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만이 진정한 치유라는 훌륭한 주제의식.

 

3.

나는 영화를 보고 별 감흥이 없었다. 물론 현재 내 심리상태와도 관련이 있긴하다. 영화 보는 동안 요즘 엄청 잡생각을 많이 한다. 머리 속에 멀티로 작동하는 거 같은 기분ㅠ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돌란 감독이 인물의 감정선을 묘사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1인칭 관점이고 관객에게도 강도 높은 감정이입을 요구한다. 그래서 사실 타인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타인은 화자로 혹은 감독의 분신으로 설정된 인물의 감정을 부연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배치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세상은 다양한 아픔을 지니고 다양한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느낌이다. 자신의 감정만이 중요한 거 처럼 묘사되는 방식에 내 마음이 자꾸 돌아선다. <로렌스 애니웨이>도 절절한 사랑이지만 사랑의 속성이 그렇다. 당사자가 아니면 절절함이 희석된다. 그런데 감독은 계속 절절함과 강도 높은 몰입을 강요한다.

 

4.

내가 보는 사랑은, 절절함이 없어도 이해해주는 거다. 너무 늙수그레한 관점인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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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월 들어서 처음으로 극장에 갔다. 극장에 가지 못했던 지난 시간은 암흑기로 죽을 맛이었다. 올해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책도 잘 못 읽고 영화 보는 시간도 현저하게 줄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내겐 비교적 일상이어서 하찮다고 생각했었다. 하찮은 시간을 박탈당해보니 그 하찮음이 얼마나 사치스러웠는지 깨닫게 되었다. 사치부릴 수 있었던 지난 시간들에 새삼 감사하는 겸손한 마음이, 기특하게 들었다. 올 한 해 마무리를 겸손하게 할 수 있다니, 행운이다.

 

2.

음...영화는 현대사를 감성적으로 압축해서 담았다. 한국전쟁, 파독광부, 월남전 파병, 그리고 이산가족상봉에 이르기까지 거시적 역사 속에 한 개인을 코믹하게 위치시킨다. 인물을 코믹하게 배치하면서 역사를 다루지만 그 무게를 덜어내고 좋게 말하면 감정에 호소하고 나쁘게 말하면 신파로 흐르는 조금은 뻔한 스토리로 흐른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이산가족상봉이었다.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는 하루 종일 가족을 찾고 부르는 사람들을 보여줬다. 잔인한 역사의 아픔을 이해하기에는 어렸던 터라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도 했었다. 지금보니, 꽤 희화화했는데도 웃음 속도 아픔이 보인다. 감독이 사건을 다루는 범위를 보면 영리하다. 연말 가족영화로 너무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게 가족애를 다룬다.

 

3.

이 영화의 영어제목이 "아버지를 위한 서정시ode to my father"이다.  덕수는 꼬마일 때부터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하는 아버지였다. 덕수는 결혼 전에는 동생들과 어머니를 위해 살고, 결혼해서도 아내와 아들, 그리고 역시 동생들과 어머니를 위해, 즉 평생 아버지로 살았다. 가장의 삶이란 가장이 안 되면 그 무게를 모를 거 같다.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에 간 에피소드를 보면 힘겨움은 본인 이외의 인물에게는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위험이나 어려움은 말로 전해들으면 그 무게가 현저하게 가벼워진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 아들이어도 사람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 것 같다.

 

4.

아무튼 12월 처음 본 영화고 감독의 의도대로 눈물도 흘렸다. 또 거짓 눈물일지라도. 눈물을 흘렸다고, 친구한테 문자를 보냈더니 "사는게 눈물겹다"란 답장을 받았다. 머쓱했다. 진짜 눈물 앞에서 거짓 눈물이 부끄럽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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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1 0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01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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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1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우주나 행성에 대한 이미지 외에는 대체적으로시각적으로 평온한 영화다. 또 하나는 시선을 잡아 끄는 특수효과 대신에 상대성 이론에 대한 꽤 진지한 접근법에 놀랐다. 그럼에도 꽤 재밌게 볼 수 있다는 데 놀랍다.

 

우리는 21세기 양자역학 시대에 살고 있어서 20세기 상대성 이론이 더 이상 충격이 아니다. 뉴튼의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전면 부정하는 상대성 이론. 시간은 더 이상 선형적이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다. 중력의 크기와 공간의 차원에 따라 시간의 흐름은 가변적이다. 중력의 크기가 다른 행성에서 파도는 한 시간만에 칠 수도 있고 다른 행성에서의 한 시간은 지구 시간으로 수 년과 같을 수 있다, 는 어디서 한 번 쯤 들어봤음직한 말을 시각화한다. 특히 실제 파도가 쳐서 그 파장을 보여주기 보다는 거대한 파도가 집어삼킬 듯이 위로 올라가는데서 이미지를 멈추고 스크린이 아니라 머리속에서 파도의 후폭풍을 상상케하는 방법에 두근두근했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 급속도로 하강하기 위해 뜸 들이면서 서서히 올라가는 단 몇 초가 가장 두렵듯이, 상상은 최고의 공포를 만들어낼 수 있다.

 

2.

그런데 양자역학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불확정성의 원리는 "관찰자가 관찰 대상을 변화시킨다. 관찰 행위가 어떤 것이 관찰되고 어떤 것이 관찰되지 않는지를 결정한다." 상대성 이론을 보면서 나는 자꾸 불확정성 원리가 떠 올랐다.

 

인간이 우주로 가는 이유는 뭘까. 아폴로13호가 달 착륙 성공은 이제는 공공연하게 부정된다. 냉전시대에 구소련을 파산으로 몰아넣은 프로젝트가 바로 우주탐사였다고, 말해진다. 냉전 종식은 하이젠베르크가 아인슈타인한테 보낸 도전장 만큼 획기적이다. 반공영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첩보영화에서는 적도 새로 설정해야하고 나사의 임무도 국력 입증이 더 이상 아니다. 나사의 새로운 임무는 지구의 종말에 대비해 지구를 대체할 행성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소수의 훈련된 사람들한테, 인류 구원은 대의명분으로 약하다. 거시적 동기는 개인을 추동하는 힘이 되기 힘들 수 있다. 이 영화의 서사는, 그래서 가족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인류 구원보다는 자신의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우주 미아가 될 위험을 기꺼이 무릅쓸 수 있다. 지구를 대체할 후보행성에서 만난 맷 데이먼이 이런 말을 한다. 그 행성 탐사는 로봇이 할 수 없고 사람이 해야한다고. 죽음이 순간에 찾아오는 공포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데 로봇한테는 죽음 앞에서의 공포를 프로그래밍할 수 없다고. 쿠퍼가 위험한 탐사에 적합한 이유가 바로 죽음의 순간에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릴 거고 그게 쿠퍼를 살게 할 거라고.

 

쿠퍼는 한 때 우주비행사 훈련을 받았다. 아마도 냉전시대에 교육을 받았던 그는, 탈냉전 시대에 과학적 지식을 농기구 고치는데나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중력의 이상으로 나사의 비밀기지를 발견하고 사랑하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다시 우주선에 오른다. 우주선에 오르는 순간  쿠퍼는 그 누구보다도 살 의지가 강해진다. 지구에 지켜야할 아이들이 있으므로. 하지만 남겨진 아이들은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는다. 살 땅이 없어질 거라는 상실감보다는 곁에 있어야할 존재의 부재가 더 큰 상실감을 만든다. 쿠퍼는 우주에서 지구를 지키려고 애쓰지만 그 노력이 과연 아이들을 위한 것일 수 있는지.

 

3.

영화는 한편으로 해피엔딩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해피엔딩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상대성 이론으로 시공간의 얽힘을 알고 5차원의 공간에서 3차원 공간으로 귀환한다. 물론 지구에 있던 딸이 아빠보다 더 나이가 많고 늙어서 젊은 아빠 앞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 총명한 어린 딸이 자신보다 더 늙어서 죽는 걸 지켜보는 걸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지. 시간은 선형적이지도 않고 물질적이라면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것이다. 어떤 공간, 어떤 시간에 속해있느냐에 따라서. 사랑하는 이의 부재는 실제로 자신이 속한 공간과 시간에서만 부재할 뿐이고 다른 공간과 시간에서는 얼마든지 현존 할 수 있다.

 

4.

매튜 맥커너히는 심히 거슬렸다. 발성이 지나치게 말을 씹어먹는 편인데, 긴장되고 단호한 순간에 그런식으로 말하니까 무게감이 사라진다. 충분히 좋은 배우인데 이런 식의 발성이 절박함을 지닌 우주비행사 역에는 안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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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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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제일 주요한 기능은 묻혀있던 작가나 작품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해석만이 아니라 나아가 어떤 비평가의 글을 읽고 나면 그 작품 혹은 그 작가를 찾아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글이, 좋은 비평글이라고 믿는다. 신형철의 글은 바로 이런 면이 있다.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해석자다. 해석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해석은 기술이기 때문에 비평은 직업이 될 수 있다. (...) 해석자는 이미 완성돼 있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면서 전달한다. 그러므로 해석은 일종의 창조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 유를,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 유를 창조해낼 수는 있다. (...) 해석으로 생산된 인식이 심오할 때 그 해석은 거구로 대상 작품을 심오한 것이 되게 한다. (...)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이다. 해석은 인식의 산파술이다."

 

신형철 비평글이 두 권째인데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 그 이유는, 해석에 대한 저자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보통 비평글은, 그 작품을 읽거나 보지 않으면, 읽는데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다. 독자가 작품을 봤다는 가정하에서 쓰기도 하지만, 이런 가정 때문에 많은 독자들을 배제시키고 특정한 독자들만을 대상으로하는 게 비평글의 타고난 숙명이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신형철의 글은, 작품을 안 보고 안 읽어도  비평글 자체만으로도 읽는 재미가 있다. 그의 말대로 작품을 다시 쓰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럼 그는 어떻게 작품을 다시 쓰나? 비평글에서 감정적인 문장은 에세이처럼 느껴지기 쉽다. 그러나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감정이 배제되면 학술논문처럼 돼 버려 어떤 정보만을 전달하기 쉽다. 신형철은 논리와 감수성이 만나 화학반응을 일으키게 글을 쓴다. 이 역시 해석에 대한 저자의 태도 덕분인 거 같다.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하며 "해석 대신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라고 했다. 즉 해석자한테 가장 필요한 게 작품에 대한 애정과 감수성인데 신형철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가진 애정이 행간 사이에서 걸어나와 내게로 오는 거 같다.

 

이 책은 <씨네21>에 연재했던 글모음이다. 나도 대부분 봤던 영화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과연 내가 그 영화를 본 게 맞나, 의심할 정도로 섬세하게 독해를 하고 있다. 나는 영화에 대한 애정어린 태도 보다는 '깔' 준비를 하고 영화를 봤었던 게 아닌가. 일차원적 관객이라는 자괴감이들기도 한다.

 

사람을 비롯한 세상 만물에 애정어린 시선을 가진 자의 온기가 더욱 필요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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