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비에 돌란의 영화에서 다루는 정서적 이물감에도 나는 계속 자비에 돌란 영화를 보고 있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감독이 이미지를 다루는 스타일과 주제의식 때문인 거 같다. <마미>를 보고 있자니까 젊은 시절의 왕가위 감독이 떠올랐다. 슬픔이나 기쁨을 전달할 때 등장하는 느린 화면. 프레임 전환이 전반적으로 빠르고 감각적이고 마치 뮤직 비디오처럼 음악도 귀에 쏙 들어오고. 그러다가 어떤 특정한 감정에 방점을 찍고 싶으면 슬로우 모션으로 전개되는 특유의 영화 언어를 사용한다. 보고 있으면 눈이 즐겁고 귀가 즐겁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돌란의 팬이 될 수 없다. 돌란의 관심은 내밀한 관계, 특히 삼각관계에 있다. 그의 모든 영화가 그렇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 상대방을 사랑하는 또는 그 상대방에 호의를 가진 이에게 강한 질투를 느낀다. 질투야말로 사랑의 정점이기는 하지만 노쇠하고 있는 나는 그 질투를 따라가기에는 힘에 좀 부친다.^^;; 자신이 하는 사랑만이 순도 백프로라고 주장하는 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강렬함이 가져다주는 내적 갈등의 소용돌이를 보다보면 기가 빠지기도 한다.
<마미>는 행동장애가 있는 십대 아들을 둔 엄마와 이웃집 여인의 이야기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잘 요약한 대사가 있다. 마트에서 아들이 딸기향 펜을 보고 이런 말을 한다. "똥이라고 써도 달기향이 나" 아무리 아들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사회적 격리와 치료를 필요로 한다해도 엄마한테 아들은 아마도 달콤한 딸기향이 나는 존재일 것이다.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는 친자관계에 제 삼자의 등장과 그 인물이 보내는 인정은 특별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주관적으로 행동하지만 끊임없이 다른 이의 객관적 인정을 필요로 한다.
두 모자에게 이웃집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 역시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서 말을 더듬은지 2년이 되었다. 하지만 두 모자와 있을 때 여인은 말을 더듬는 빈도가 줄어든다. 우정과 관심은 이웃집 여인의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행동장애가 있는 말썽꾸러기 십대 남자아이도 엄마가 아닌 타인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태도에서 공격성이 진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만이 진정한 치유라는 훌륭한 주제의식.
3.
나는 영화를 보고 별 감흥이 없었다. 물론 현재 내 심리상태와도 관련이 있긴하다. 영화 보는 동안 요즘 엄청 잡생각을 많이 한다. 머리 속에 멀티로 작동하는 거 같은 기분ㅠ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돌란 감독이 인물의 감정선을 묘사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1인칭 관점이고 관객에게도 강도 높은 감정이입을 요구한다. 그래서 사실 타인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타인은 화자로 혹은 감독의 분신으로 설정된 인물의 감정을 부연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배치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세상은 다양한 아픔을 지니고 다양한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느낌이다. 자신의 감정만이 중요한 거 처럼 묘사되는 방식에 내 마음이 자꾸 돌아선다. <로렌스 애니웨이>도 절절한 사랑이지만 사랑의 속성이 그렇다. 당사자가 아니면 절절함이 희석된다. 그런데 감독은 계속 절절함과 강도 높은 몰입을 강요한다.
4.
내가 보는 사랑은, 절절함이 없어도 이해해주는 거다. 너무 늙수그레한 관점인가..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