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를 좋아하냐고 질문 받는다면 말하기 힘들다. 세상에 좋은 영화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럼 좋은 영화는 왜 많은가. 지극히 내 취향 때문이데, 피상적으로 행복을 다루면서 강요하는 영화(주로 헐리우드 주류영화) 빼고는 모든 영화에는 미덕이 숨어있다. 자끄 오디아르 감독 영화를 격하게 애정하는데 미덕이 너무너무 많고 매혹적이다.

 

일단 오디아르 감독은 인물의 동요하는 심리를 영화 언어를 통해 관객한테 전달하는데 탁월하시다. 전작들 중 <내 심장을 건너 뛴 박동>에서 부동산 중개인이 피아노 연주에 대한 애착을 보이며 지역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레슨을 받는 게 소재로 사용된다. 액션이나 그 어떤 흉기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움을 연상케 하는 피아노란 매체를 통해 주인공의 불안하고 초조한 심리를 담았다. 건반을 두드릴 때 레슨을 받을 때,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지고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과 같이 긴장하게 된다. 아니 영화를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지 했었다.

 

<디판>도 상영시간 내내 심장이 쿵쿵 뛰게 긴장되는 영화다. 총격씬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무언가 일어날 거 같은 그 분위기다. 그렇다고 음악을 관습적으로 사용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가령, 디판이 살기 위해 함께 피난 온 가짜 아내가 샤워를 하는 소리를 듣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는 디판의 긴장된 눈동자 비춘 후 리판의 눈이 되어서 살짝 열린 욕실 문을 담는다. 그러니까 관객이 보는 건 여자가 샤워하는 장면이 아니라 살짝 열린 문과 물소리, 그리고 디판의 표정이다. 그런데 막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고 조마조마하다. 물론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조마조마한 원인은 집 밖에서 찾을 수 있다. 디판이 관리하는 건물들에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조폭 혹은 건달들이 하루 종일 진을 치고 떼지어 왔다가 갔다한다. 이런 장면을 본 뒤라서 그렇기도 하다. 그들이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일어날 거라는 막연한 불안을 잉태한 후 그 느낌을 간직한 채 영화를 지켜보게 된다. 카메라를 사용하는 방식도 핸드핼드도 많이 쓰긴 하지만 정지된 중에도 앵글을 어찌나 현란하게 사용하시는지. 두 인 물의 뒤에서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고 한 인물은 다른 한 인물을 바라보는 장면, 아래서 위로 비스듬히 잡아서 인물의 초조함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데 극대화된 효과를 준다.  

 

영화 형식적으로만 좋은 게 아니라 오디아르 감독이 다루는 주제 역시 훌륭하다. 소외된 개인을 주로 다루는데 개인을 다루면서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지만 기저에 사회 매커니즘의 문제점을 은밀하게 포석으로 깐다. <디판> 역시 스리랑카 내전으로 프랑스로 탈출한 세 사람을 다룬다. 가짜 가족을 이루며 유색이민자가 마주하게 되는 프랑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춘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우범지대에 놓여지고 범죄와 살인에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자국에 겪은 내전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나라를 택했는데 총격전은 이주국에서도 여전히 일어난다. 아이와 여자는 절대적 희생자이다. 이주민의 삶을 말하고 있지만 역으로 객관적으로 패권을 주도하려는,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도 폭력과 살인의 정도는 내전과 마찬가지라고 역설하는 거 같다. 여자가 가정부로 일하는 집주인 역시 전자발찌를 차고 있는 전과자다. 여자는 전자발찌의 개념을 모르기에 그 사람과 잠시 교감도 나눈다. 두 사람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언어소통 장애는 잠시 사람과 죄를 분리하는 힘이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자는 모르는 사이에 어떤 폭력적 세상에 쉽게 노출되는 함정도 있다.

 

오디아르 감독 영화는 과정은 몹시 어둡고 비관적인데 결말은 희한하게 긍정적적이다. 감독은 비관적 낙천주의자다. <디판>이 내전으로 진짜 가족을 잃고 이주해서 맞주한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사랑도 싹트고 적응해가는 과정을 아주 폭력적으로 묘사했다. 실제로 폭력은 많이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영화가 끝나고 나면 폭력에 대한 잔상이 남는다. 그래도 엔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라이프>지 이야기인가 했는데 꼭 그렇진 않다. 라이프지 사진작가 데니스 스톡과 전설의 제임스딘의 우정 아닌 우정을 다룬 영화다. 안톤 코르빈 감독의 전작 <컨트롤>, <아메리칸>을 보면, 뭐랄까, 고독한 개인의 심리에 몹시 관심있어 하고 고독 속에서 유일한 구원은 사랑이나 우정이라고 한순간 믿는다. 그러다 감정이 바닥까지 내려가면 모든 걸 포기하는 인물에 좀 관심을 보이는 것같다.

 

이 영화는 제임스 딘을 재현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데인 드한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를 45도 쯤 숙이고 눈을 치켜뜨면 제임스 딘이 슬쩍 보이긴 하는데 결정적으로 너무 통통하다. 살을 좀 빼셨어야지. 안톤 코르빈의 영화는 분위기는 참 좋은데 인물의 심리를 다루는데 항상 2% 부족하다. 제임스 딘의 우수나 공허한 표정은 왜 그런건지. 묘사가 부족하다. 실제로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컨트롤>도 영화 전반적 분위기로 시대상을 전달하는데 아주 세심한 연출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정작 조이 디비전의 보컬이었던 이안 커티스의 내적 불안과 동요를 잘 표현하지 못했다. <라이프>도 당시의 시대상과 배경은 잘 재현했다. 워너 브라더스 사장이나 인터뷰 장면 등등. 특히 비오는 타임스 스퀘어에서 코트 깃을 한껏 올리고 담배를 물고 있는 제임스 딘의 재현은 거의 넋이 나갈 정도다.

 

하지만 왜 제임스 딘은 삐딱했는지에 대한 고찰은 좀 부족하다. 사료상 알 수 없더라도 바로 그 부재한 정보를 메꾸는 일이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역할이 아닐까. 아쉬운 점이다. 데니스 스톡이 우수에 찬 예술가를 찾아봐야지, 하는 말을 한다. 안톤 코르빈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데니스 스톡이 제임스 딘의 공허한 표정에 끌려 사진을 남겨서 우리는 그 공허하고 반항심 가득한 눈빛을 감상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199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기문은 항상 흥미로우면서도 전기 작가의 시선을 통해 인물을 보기에 어떤 부분에서는 매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점이 있는데 츠바이크의 명성 그대로 끝까지 흥미진진하다. 발자크 인생 자체가 파란만장하다. "인생은 건설한 대상이 아니라 연소할 대상"이란 까뮈의 말처럼 발자크는 철처하게 인생을 연소하면서 살다간 게 아닌가. 우리는 인생을 주로 건설만하다 어쩡쩡하게 건설도 못하고 불사르지도 못한 아주 찝찌름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누군가가 인생에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했다. 일생에서 주어진 발광의 양을 채우기 마련인데, 츠바이크가 묘사한 발자크의 삶은 그 자체가 발광(發狂/發光)이다.

 

발자크는 어머무시한 몽상가이다.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발자크는 벌써 실행까지 나아간다! "내 생애의 모든 시기에 걸쳐서 나는 언제나 용기가 내 불행보다 더 큰 것을 보았다."(156) 그에게 좌절이란 우스운 것이다. 실패하고 일어나서 또 계획하고 실행하고 실패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글을 썼다. 소설을 쓰는 일은 그에게 아주 현실적 수단이었다. 원고료를 미리 계산해서 일을 저지르고 탕진한 후 남아있는 건 땡겨쓴 원고료를 갚기 위해 글을 써내는 거 였다. 무모한 계획에 대한 끊임 없이 도전하고 실패 후 재정 악화를 만회할 방법은 글을 쓰는 일 밖에는 없었다. 작가는, 발자크 한테 일종의 직업이었고 엄청난 재정적 파산 상태는 그가 끊임없이 글을 쓰는 추진력을 제공했다. 당시에도 엄청난 인세를 받고 인기를 누렸는데 그는 평생 빚에 허덕이며 살았다. 하루에 16페이씩 쓰는 일이 가뿐했다고 하니.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실패하고. 안정 따위와는 천성적으로 거리가 멀다. 돈에 대한 그의 관점은 이렇다. "빚이 전혀 없거나 아주 조금일 경우에는 아끼지만 엄청난 빚은 사람을 오히려 낭비하도록 만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162) 궤변같지만 일리가 있다.

 

"상상력과 정신력의 흥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싸구려 모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발자크는 자기 내면에 충분히 긴장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긴장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202) 전체 삶의 궤적 자체가 그 어떤 소설보다 소설적이다. 예로, 오랫동안 구애를 한 러시아 귀족 부인이 있다. 그 부인을 사랑하기 보다는 그 부인이 가져다 줄 명예와 재산에 더 관심이 있었던 발자크는 그 여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으면 사랑이 샘 솟는다. 하지만 그녀 역시 발자크의 기질을 알았던 터라 발자크의 구애를 질질 끈다. 하지만 발자크는 그녀의 거절로 불행하지 않다. 오랜 기간동안 이런 식으로 관계가 이어진다. 발자크 기질의 단면을 알 수 있다.

 

"발자크의 운명의 법칙은 자신의 꿈을 오직 책에서만 만들어낼 수 있을 뿐 현실에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다"(657)츠바이크는 발자크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불행하면서도 행복하게, 여한 없이 살다 간 사람이 아닐까.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주관적이긴 하지만.

 

 

덧. 빵 터진 말이 있다. "마흔 살의 여자는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스무 살 여자는 아무 일도 안 한다."(127) 발자크는 어릴 때도 연상 여인만을 뒤쫒아다녔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3D로 우주 영상을 좀 기대하고 기회비용을 좀 썼다. 눈이 나쁜 사람한테 3D 안경은 안구 건조증을 촉진해서 영화 중간 쯤에는 이러다가 내 안구가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을 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눈이 빨개지고 급기야는 그 자리에서 드러눕고 싶은 비용을 감당했는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는 영화였을까, 하는 결론으로. 3D에서 내가 기대한 건 뭐였을까. 우주의 광할함이었던 거 같은데 광활함을 느끼기에는 좀 작아보인다. 평평한 화성 땅에 가끔 솟아있는 봉우리(?)에 대한 원근감이 두드러지고 우주선이 파괴될 때 파편들이 눈앞으로 달려들긴 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영화들이 원근감의 깊이와 파편이 눈앞에 달려들어도 허상이란 걸 알려줘서 감흥은 그저 그랬다. 보는 중간에 아 눈아파, 디지털로 볼걸 하는 생각이 지배적일 정도였다.

 

2.

난 이 영화가 NASA 홍보영화 아닌가 싶었다. 미국은 왜 우주, 아니 화성에 집착하나. 거슬러 올라가보면 냉전시대에 양대축인 미국과 구소련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경쟁한 게 우주탐사 프로젝트였다. 한 대의 우주선을 발사하기 위해 드는 고급인력과 그 비용을 지구가 당면한 문제를 위해 써야한다는 주장도 많다. 대체 (극소수의) 인간은 왜 우주탐사를 갈망하나. 미지의, 불확실한 것이 우주에만 있나, 인체의 신비로 못 푸는데 화성은 왜 흥미로운가. 희소성의 원칙을 들이댈 수 있겠는데 누구나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가면 못 올 수 있는 위험도, 인간의 의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작용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영화처럼 순간적 스펙터클을 위해서 우주탐사를 한다면 당장 우주탐사를 그만두고 우주탐사는 예술가들의 손에 남겨두는 게 어떨까, 싶다.

 

3.

오락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우습지만 난 현실적 비관주의자다. 마크가 혼자 화성에 남겨지자 한 일은 생존을 위해 집중하는 거다. 영화 엔딩 부분에서 마크가 지구로 귀환해서 장래의 우주비행사들한테 해주는 말이 있다. 우주에서 혼자 남겨지면 할 일이 많지 않다고. 살기 위해 당면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거라고. 실존적 대사고 마크는 화성에 혼자 있으면서 실존주의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실존적 영화로 안 보이고 오락 영화로 보이는가. 바로 마크의 심리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혼자서 생존하기 위한 수단에만 방점이 찍혀있다. 생물이 자랄 수 없는 흙에 자신의 배설물을 섞어 감자 싹을 키워서 수확하고 식량을 철저하게 계산해서 먹고 태양열을 이용해서 전지를 충전하고 이동하고 연료를 아끼고...등등. 이따금씩 지구인들과 메시지를 주고 받고. 마크는 사람이 없어도 잘 살 사람이고 혼자 견디는 두려움 따위는 없어보인다. 유일한 불평은 디스코 음악 말고 다른 음악이 필요한 거 였다. 물론 마크 덕에 우리는 우주에 대한 공포보다는 친근함,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본인이 노력한다면 언젠가 도움의 손길이 온다는 긍정적고 진부한 메시지를 얻는다. 이러니 미국영화고 NASA 홍보 영화다.

 

4.

나는 왜 이런 대책없는 긍정성이 거짓말처럼 보여서 그 어떤 판타지보다도 영화가 판타지로 보이는가. 가을이니까.ㅎㅎ;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맥거핀 2015-10-1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D로 봐야하나,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 글을 읽고 그냥 보기로 했어요. 그래비티 생각해서 3D 생각했었는데, 또 그와는 많이 다른 모양이죠.

넙치 2015-10-15 14:2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비티> 생각해서 기대를 했었던 거 같아요. <그래비티>는 참 우아한 SF였어요. <마션>은 팝콘 먹으면서 보는 영화 같아요, 저는. 물론 과학적 지식으로 이루어진 대사가 꽤 많지만 영화가 과학은 아닌지라...맥거핀님은 어찌 볼 지 궁금하답니다.^^
 

<이민자>에는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가 출연한다. 어찌 안 보겠는가. 마리옹 꼬띠아르는 묘한 매력이 있다. 마리옹 꼬띠아르는 전형적 미인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얀 도화지처럼 극중 역할을 흡수하는 표정을 지녔다. 화장기 없을 땐, 지치고 피로해 보이기도 하고 립스틱을 바르면 정말 거리의 여자처럼 고급진 표정과는 대척점에 있기도 하다. 호아킨 피닉스 역시 비슷하다. 선 굵고 발성도 남다르고 목소리마저도 색깔있는 배우다. 두 배우의 연기는 역시나 훌륭하다.

 

에바(마리옹 꼬띠아르)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뉴욕에 입성하지만 첫날부터 그녀를 기다리는 건 시련. 이 시련이 문제다.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극단적 상황으로 몰아간다. 브루노(호아킨 피닉스)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뉴욕에 입성한 여자들을 관리하는 일종의 포주이다. 에바의 인생은 브루노를 만나면서 꼬이기 시작하고 브루노가 만든 사나운 운명이란 파도에 아주 몸을 맡겨버린다. 그 와중에 브루노가 에바한테 품은 사랑은 에바한테 도달하기도 전에 일그러진다. 두 인물이 축인데 에바의 수동성과 브루노의 도착적 태도에는 도무지 공감이 가질 않는다.

 

영화를 보고나면 남는 건 짜증이다. 두 훌륭한 배우를 가지고 삼류 신파를 연출한 감독에 짜증이나서 평이 비교적 좋은 <투 러버스>를 찾아봤다. 역시나 호아킨 피닉스가 나온다. <투 러버스> 역시 사랑이야기다. 사랑의 상처를 안고 있는 남자가 양다리를 걸친다. 집안에서 지지하는 여자와 한 눈에 반해버린 여자. 그를 사랑하는 여자와 그가 사랑하는 여자. 남자는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사랑의 다각형.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허세 가득한 채 베프인척하고 그를 사랑하는 여자한테는 깎듯하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인간의 양면성을 다뤄서 재미나게 봤다. 좋아하는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사람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아쉬운 건 감독은 여자 캐릭터를 도구로 사용해서 굉장히 수동적으로 그린다. 유부남을 사랑하는 미쉘(기네스 펠트로)가 레너드(호아킨 피닉스)한테 징징거리면서 연애상담을 하는데 왜 저 여자는 눈치없이 징징거리나, 하는 짜증이. 물론 그 징징거림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지만 기본적으로 미쉘의 주체성없는 의존적 정신세계가 도르라져 보인다. 그래도 3분의 2지점까지는 <이민자>보다는 훨씬 재밌게 봤고 레너드가 미쉘을 따라 모든 걸 버리고 떠나려고 계획하면서 엄마한테 행복하다고 말하자 엄마는 (자신의 마음에는 정말 안 들지만) 그럼 됐다고,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나 돌아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뭉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예상했듯이, 계획은 틀어진다. 결과론적으로 미쉘은 알뜰하게 레너드를 이용했고 레너드는 미쉘의 이용을 당했다. 레너드의 선택지에는 그래도 그를 사랑하는 여자가 남아있다. 여기까지도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미쉘한테 줄 청혼반지를 바다에 던졌다가 건져서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한테 재활용할 때, 나는 이 남자의 빰을 때려주고 싶었다. 대체 감독은 왜 저러나. 그리하여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이성관 내지는 인간에 대한 태도는 실용주의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실용주의적인 것 까지는 용서할 수 있지만 최소한 배려는 담겨있어야 하지 않나. 배려 없는 이기심은 한 개인의 삶을 축을 흔들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