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에는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가 출연한다. 어찌 안 보겠는가. 마리옹 꼬띠아르는 묘한 매력이 있다. 마리옹 꼬띠아르는 전형적 미인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얀 도화지처럼 극중 역할을 흡수하는 표정을 지녔다. 화장기 없을 땐, 지치고 피로해 보이기도 하고 립스틱을 바르면 정말 거리의 여자처럼 고급진 표정과는 대척점에 있기도 하다. 호아킨 피닉스 역시 비슷하다. 선 굵고 발성도 남다르고 목소리마저도 색깔있는 배우다. 두 배우의 연기는 역시나 훌륭하다.
에바(마리옹 꼬띠아르)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뉴욕에 입성하지만 첫날부터 그녀를 기다리는 건 시련. 이 시련이 문제다.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극단적 상황으로 몰아간다. 브루노(호아킨 피닉스)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뉴욕에 입성한 여자들을 관리하는 일종의 포주이다. 에바의 인생은 브루노를 만나면서 꼬이기 시작하고 브루노가 만든 사나운 운명이란 파도에 아주 몸을 맡겨버린다. 그 와중에 브루노가 에바한테 품은 사랑은 에바한테 도달하기도 전에 일그러진다. 두 인물이 축인데 에바의 수동성과 브루노의 도착적 태도에는 도무지 공감이 가질 않는다.
영화를 보고나면 남는 건 짜증이다. 두 훌륭한 배우를 가지고 삼류 신파를 연출한 감독에 짜증이나서 평이 비교적 좋은 <투 러버스>를 찾아봤다. 역시나 호아킨 피닉스가 나온다. <투 러버스> 역시 사랑이야기다. 사랑의 상처를 안고 있는 남자가 양다리를 걸친다. 집안에서 지지하는 여자와 한 눈에 반해버린 여자. 그를 사랑하는 여자와 그가 사랑하는 여자. 남자는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사랑의 다각형.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허세 가득한 채 베프인척하고 그를 사랑하는 여자한테는 깎듯하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인간의 양면성을 다뤄서 재미나게 봤다. 좋아하는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사람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아쉬운 건 감독은 여자 캐릭터를 도구로 사용해서 굉장히 수동적으로 그린다. 유부남을 사랑하는 미쉘(기네스 펠트로)가 레너드(호아킨 피닉스)한테 징징거리면서 연애상담을 하는데 왜 저 여자는 눈치없이 징징거리나, 하는 짜증이. 물론 그 징징거림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지만 기본적으로 미쉘의 주체성없는 의존적 정신세계가 도르라져 보인다. 그래도 3분의 2지점까지는 <이민자>보다는 훨씬 재밌게 봤고 레너드가 미쉘을 따라 모든 걸 버리고 떠나려고 계획하면서 엄마한테 행복하다고 말하자 엄마는 (자신의 마음에는 정말 안 들지만) 그럼 됐다고,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나 돌아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뭉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예상했듯이, 계획은 틀어진다. 결과론적으로 미쉘은 알뜰하게 레너드를 이용했고 레너드는 미쉘의 이용을 당했다. 레너드의 선택지에는 그래도 그를 사랑하는 여자가 남아있다. 여기까지도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미쉘한테 줄 청혼반지를 바다에 던졌다가 건져서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한테 재활용할 때, 나는 이 남자의 빰을 때려주고 싶었다. 대체 감독은 왜 저러나. 그리하여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이성관 내지는 인간에 대한 태도는 실용주의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실용주의적인 것 까지는 용서할 수 있지만 최소한 배려는 담겨있어야 하지 않나. 배려 없는 이기심은 한 개인의 삶을 축을 흔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