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수북
한소공 지음, 김윤진 옮김 / 이레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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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귀농 스케치 쯤 되는 수필집이다. 엎드려서 읽다가 앉아서 펜을 찾아 들고 밑줄을 긋게하는 책이다. 진리가 가득담겨 있어서 장점이어서 한계효용을 급격히 떨어뜨리기도 한다. 결국 반만 읽었다는 얘기다. -.-;; 시골에서 바라 본 도시를 이렇게 적고 있다. 

"도시의 생활이 매혹적으로 비쳐지는 까닭은 은자처럼 지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동료의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혹은 이웃의 대문 안에서 어떤 모습이 펼쳐지고 있는지 도시인은 알 길이 없다. 손님, 승객, 행인, 판매원, 송수관 수리공, 우체부, 보험 모집인 등등 도시는 매일 사람들로 붐비지만 너무 밀집되어 있다 보니 도시인들의 관심 밖이거나 한 번 보고 그만 잊어버리는 대상이다. 이들은 그림자의 움직일 뿐이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배경이나 세트 그리고 가면처럼 이름도 가짜요, 하는 이야기는 대사요, 옷은 분장에 불과하다....우리의 진정한 동료와 이웃은 영화에 나오는 유명 배우나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는 인물이거나 인터넷 채팅실에서 만난 익명의 인터넷 친구다....익명성에 대한 사랑!

도시인은 기능인이다. 노동을 제공하는 생산자이면서 물건과 서비스를 다시 사는 소비자란 촘촘한 그물 속에 갇혀있다. 마음이 허할 때, 친구를 찾기 보다는 피엠피나 엠피쓰리 플레이어서 송출되는 영상과 음악 속으로 들어간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승객은, 이어폰을 통해 철저히 그 공간에서 일탈해 자신이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으로 침잠한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트위터, 그리고 트위터와 비슷한 네이버 서비스 미투데이를 보면서-난 사용자는 아니고 사용자의 후기를 읽었다. 시사인 기자인가가 쓴-씁쓸하다. 주로 컴을 이용하는 업무를 가지고 있는 직딩들, 혹은 아무래도 인터넷 접속이 자유로운 사람들이 주사용자일텐데 한줄의 마력을 주장한다. 난 여기서 소통에 대한 갈증을 엿본다. 진짜 소통의 갈증이 해소되는 지 알 수 없지만 난 회의적이다. 한 줄 생각에 대한 댓글 놀이가 그 매력인가 본데 같은 업무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 단절을 에둘러 말하는 것 같다. 잠깐 짬나는 시간에 유저들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나 좀 봐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진짜 사람과 소통해야 할 시간에 모니터 뒤에 모르는 이와 나누는 댓글 놀이가 더 소통 친화적이라는 착각은, 깊은 소통의 부재를 암시한다, 고 생각지는 않는지... 도시인으로 살아가는 건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다. 트위터도 블로그도 지름신교도 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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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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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익숙하고 한국사를 읽어야겠기에 선택했는데 정보도 리뷰도 안 읽고 선택했다. 책을 펼치는 순간 후회..아, 퀘이커교도... 역사기술은 역사가가 사건을 취사선택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글을 쓰는 이의 관점이 제일 중요하다. 퀘이커교도라니...나만 몰랐나. 종교적 색채가 곳곳에서 배어나는 데 참 당혹스러웠다. 많은 절제를 한 것 같은 데도 씨알 사상이 자주 출몰하는 데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일독할 가치는 있다. 세계 역사계에서 역사를 뒤집어보는 대항역사가 활발한데 한국사 역시 식민사관이나 근대가 만들어낸 민족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서술한다는 점은 의미있다. 단군이래 신라,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훌륭함에 대해 제도교육이 가르쳤다면(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쉬운 점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기질을 정확히 읽어낸다. 

"한국사람은 심각성이 부족하다. 파고들지 못한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깊은 사색이 없다. 현상 뒤에 실재를 붙잡으려고, 무상 밑에 영원을 찾으려고, 잡다 사이에 하나인 뜻을 얻으려고 들이파는, 컴컴한 깊음의 혼돈을 타고 앉아 알을 품는 암탉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운동하는, 생각하는, brooding over하는 얼이 모자란다. 그래 시 없는 민족이요, 철학 없는 국민이요, 종교 없는 민중이다."(126)   

그 대안인 씨알 사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적극적으로 해체하는 관점에서 얻을 건 얻고 버릴 것 버리는 게 현명한 독자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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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아메리카 - Transameric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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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드 무비는 기본적으로 엣지(ㅎ) 있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뉴욕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 횡단하는 동안의 풍경은 고즈넉함, 강렬함, 단조로움이 뒤섞인다. 광할한 미국을 횡단하는 카메라를 통해 색색의 모자이크가 펼쳐지고 삶의 풍경도 이와 비슷하다. 웃음, 분노, 만남, 헤어짐 등등으로 모자이크 돼서 한 사람의 인생이 완성된다.  

2. 트랜스젠더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을 잘 담았다. 정신과 의사는 미국에서는 성전환을 심각한 정신병으로 본다고 말한다.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아들의 행동이 해괴망칙하다고 여긴다. 또 자식은 아버지가 사라지는 걸 고통스러워한다.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생물학적 성을 바꾸는 게 쉬울리 없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그런 고통을 모두 감수하면서 물리적 성을 바꾸려고 한다. 고통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성적 소수자에 시선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성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직 많다. 화려함이나 섹스에 대한 탐닉 때문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불일치한 존재의 고통이라고 여기려면 이런 소재의 영화가 더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단, 이 영화처럼 자극은 최소화하면서 인간 내면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3.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자식을 만나는 건 행운일 수도 저주일 수도 있다. 마음 먹기에 달렸지만 처음에는 대체로 탐탁치않은 선물을 받은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고, 공감과 유대의 싹이 튼다. '피'라는 근원적 뿌리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브리 역시 잘못받은 소포처럼 아들을 난감해하지만 반송하지는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망가져버린 십대 아들에게 브리는 개체의 존엄성을 가르치고 싶어한다. 돌보는 게 아니라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맹목적 사랑보다 더 발전된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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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 효형출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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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벤야민의 글은, 모호하고 아름답다. 본래 아름다움은 신비스럽나니....다리가 훤히 보이는  미니스커트보다 옆트임이 깊게 있어서 다리가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를 반복하는 중국식 옷이 훨씬 자극적이라고, 들었다. 보이지 않을 때 다리를 상상하게 하는 그 힘이 벤야민 글에 있다.

그러니까 난 왜 벤야민의 글들에 끌렸는지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벤야민이 대도시에 가지고 있는 애증이라는 양가적 태도 때문이다. 혼자 벤야민의 수수께끼 같은 글을 (당연히 대충) 읽으면서 혼동스러웠는데 이는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저자 역시 이런 양가적 태도에 대해 당혹감을 드러낸다. 벤야민의 텍스트가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건 이런 모호함 때문이다.

2. 첫부분이 나폴리에 대한 스케치로 시작한다.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질서정연한 데 비하면 나폴리는 혼돈 그 자체가 당연하다. 나폴리 기후는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부추기고 거리의 활기와 무질서가 나폴리의 독특한 풍경을 이루는 데 벤야민은,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그가 살아서 동양을 방문했더라면, 그리고 서울을 방문했더라면, 나폴리의 혼돈 쯤은 아무 것도 아닐 거라고 여겼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서정적 여행기를 읽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런 감상을 갖게한 건 벤야민의 인용구를 재구성한 질크로 덕분이다.  

3. 그리고 보들레르. 벤야민이 프랑스에서 어떤 위지를 지니고 있는지 그닥 아는 바 없지만 아무튼 프랑스는 벤야민에게 감사패 하나쯤은 줘야한다. 파리의 파사주 뿐아니라 보들레를 널리 알린 사람이니까.  

후반 삼분의 일은 보들레르 속에 등장하는 군중과 고독을 다시 차용하는 벤야민에 관한 기술이다. 보들레르의 시를 읽지 않고 보들레르론을 읽는 꼴이지만 아쉽게도 집에는 보들레르 책이 한 권도 없다! 그리하여 내가 알고 있는 보들레르의 위치(상징주의 대표시인, 세기말 등등으로 내 뇌 속에는 입력되어 있다)로는 벤야민 해석은 그야말로 반전이다.  물론 시에 벤야민식 해석을 붙이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난 문학이 갖는 서정성보다 사회텍스트적 역할에 훨씬 매혹되는 편이다.  

4. 그리하여 보들레르를 다시 읽어보자는 과제를 즐겁게 부과하고, 또 하나는 벤야민 주변을 께속 서성거리는 진짜 이유인데 서울을 어떻게 대립시켜 볼 것인가. 벤야민의 글쓰기 스타일은 장점 없는 내게 대안일 수 있지 않을까. 벤야민 글이 쉽다는 게 절대 아니라 몽타주 기법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해체적이면서도 거칠게 봉합해서 봉제선을 유의미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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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I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16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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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정판인데 주가 책의 절반을 차지한다.  꼼꼼하게 읽으려면 꼭 필요하겠지만 교양서적으로 본문과 같은 두께가 주는 장점은 거의 없다.-.-;; 

2. 플라톤은 어마어마한 철학자임에 틀림없다. 미학이나 문학에서도 거론되고 역사철학이나 정치철학에서도 거론되니. 이 책이 칼 포퍼가 밝혔듯이, 역사철학 내지는 정치철학이니 당연히 플라톤의 이론 중 역사관이나 정치관을 삐딱하게 보는 데 재밌다.  플라톤의 역사관 내지는 정치관 요약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플라톤을 섭렵한 거 같은 착각이 든다. -.-

3. 플라톤이 살았던 시기를 고려하면-노예제도가 있었고, 노예의 인권은 무시되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플라톤의 오류는 넘어갈 수 있다. 역사란 게 과거를 추적하고자 하는 의도보다는 현재성을 찾아내 적용하고자 하는 인간의 가상한 노력이다.  

4. 에코가 언급했듯이 첨단 문명으로 무장한 현대 속에 중세는 여전히 존재한다. 신이 지배하는 암흑 사회의 알레고리인데 이 신이란 게 현대에서는 무수하다. 유일신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신의 위치랑 치환할 수 있다. 기술사회에서 기술이나 과학이 절대적 믿음을 받고 소비사회에서는 지름신이 계신다. 어떤 신이든 신이란 존재는 인간에게는 버거운 데 왜 인간은 신을 만들었을까?  신은 본래 자비롭지 않다. 자비를 강조하는 건 인간의 몫이었고 신은 벌도 많이 주고 희생도 강요한다. 그래도 우리는 신의 섭리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난 신의 섭리를 때로는 믿지만 인간의 의지를 더 믿는 편이다. 인간의 의지가 작동할 때 신이 정해 논 운명이란 것이 작동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운명이 작용하려면 인간 의지가 필요조건쯤 되겠다.

6. 쓸데 없는데도 가고 있는데 책으로 돌아오면 문제는 탐욕이라고 포퍼는 지적한다. 탐욕이 신을 만들었고 운명을 믿게 했다. 뭐 이런 엉뚱한 결론이... 

7. 역사는 정말 발전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노예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서 현대에도 여전히 노예와 치환할 수 있는 소수자와 약자들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소수자에 대한 의식을 하고 있다. 아니 의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난 전에는 과두정치를 강하게 믿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믿음을 다 털어내지는 못했다. 포퍼의 글을 읽으면서 조금은 이런 믿음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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