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 (500) Days of Summ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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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로맨틱 코미디를 그닥 즐기는 편이 아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옥신각신하다 결국 사랑한다는 꿈을 주는 영화가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현실은 더 가혹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평이 좋길래 기대를 너무해서 그런지 별점이 네 개까지는 줄 수 없는 영화다. 영화가 아주 나쁜 건 아니지만 기대치, 이런 걸 갖는 건 조심해야겠다. 실망은 기대의 부산물이다. 기대가 없다면 실망은 없다. 부작용은 건조함이지만.  

사랑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상대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알 수도 없고 조절할 수는 더욱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안 믿는 여친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쿨한척 하지만 사실은 여친, 썸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어 괴로워하는 한 남자 이야기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의 환희에 찬 삶의 상승 곡선에서 차였을 때의 괴로움으로 이르는 하향 곡선을 경험한 후, 500일이 지나 새로운 사랑으로 상승 곡선의 새로운 출발점에 서는 이야기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저절로 연상되는 대사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 영화는 사랑에 빠졌을 때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헤어진 후부터 시작한다. 사랑을 곱씹어보는 시간은 바르트가 말했듯이, 이별 후다. 곱씹는 기억들이 배열되는 방법은 시간 순이 아니라 감정의 농도순이다. 기억이란 불완전하고 파편적이란 사실을 상기시켜주듯이, 썸머를 만난 첫날이 시작이 아니라 300일 째, 한 달 째, 이틀 째, 이런 식이다. 7시간을 함께 있었다면 썸머가 했던 인상적인 말, 웃음 등을 배치한다. 머릿속에서 뒤죽박죽된 생각의 꼬리를 재치있게 재현해서 배열했고 공감지수는 급상승한다. 남자는 여자를 300일쯤 만나고 차이고 200일쯤 운명은 없으며 세상에 널리 퍼진 가식을 저주하며 보낸다. 사이사이에 썸머를 잊으려고 하면서 썸머를 떠올리기도 하고 실제로 만나기도 하고 썸머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헛꿈을 꾸기도 한다. 결국 남자가 새로운 사랑일, '가을'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여름이 다음에 가을이를 만나는 반전이 있는 특별한 해피엔딩이다. 생각지 못한 엔딩에 크레딧이 올라가도 히죽거리고 있게 된다. 가을이와 남자 생각을 하면서 극장 밖으로  나왔더니 어둠까지 짙어져 바람은 여전히 차고 겨울은, 그 끝이 멀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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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조각들 - Summer Hou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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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녹음으로 우거진 고풍스러운 집 안뜰에서 식사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어머니의 75세 생일을 맞이해 뉴욕에 사는 딸, 중국에 사는 아들 가족,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아들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죽은 후 삼남매는 다시 모인다. 장례식 풍경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남긴 문화재급 유품들을 처리하면서 어머니를 들여다본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란 감정은 배제하고 남매는 유품처리를 의논한다. 우리 문화권에서 호로자식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껄끄러운 문제들일 수 있다. 삼남매 역시 잠깐 언성을 높였지만 유품처리에 대체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독립을 하는 게 일반적인 문화권에서 가족은 애틋함보다는 과거의 흔적들이다. 자식들의 미래에 대해 부모가 갖는 권리는 결정을 청취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한때는 품안에 있었던 자식들이 각자 자기 길로 가면서 어머니 폴은 19세기 그림들, 가구들, 인테리어 소품들을 집안에 품고 숨결을 불어넣었다. 물건이란 게 사용하는 사람의 온기가 있어서 유의미한 대상이 되지만 사용자가 없는 물건은 냉기가 감돈다. 꽤 이름있는 화가인 어머니가 쓰던 역시 유명한 디자이너의 책상이 오르세 미술관 유리벽에 덩그러니 갇힌다. 단체관람객들이 우르르 몰려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잠시 눈길을 던지지만 곧 다시 혼자 유리벽 안에 남아있는 신세다. 작업실에서 봤던 어머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가구와 짐들이 처리되고 빈 집은 스산하다. 미처 못 치운 쓰레기 잔해만이 뒹군다. 새로운 주인을 만나 다시 온기를 찾기 전 집은 십대 손녀와 친구들이 파티를 열면서 영화는 끝난다. 손녀가 남친과 유년기를 떠올리며 들판 속으로 사라진다. 소녀는 나중에 자식에게 할머니에 대한 작은 기억만을 이야기해 줄 것이고 소녀의 자식들도 소녀처럼 할머니의 추억을 처분하느라 의논하는 시간이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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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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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오래된 도시이면서 새로운 도시다. 오랫동안 한국의 수도지만 조선시대의 사대문을 표시해주는 징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콘크리트 숲 속에 왠 문, 쯤으로 인식될 수 있다. 사대문 안의 풍경 역시 과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서울을 이루는 건물들은 새롭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조금만 낡아도 헐어내고 새 건물을 짓는다. 새로운 건물 재료 전시장 같다. 내가 보기에는 대체로 시커먼 건물이 다 그 건물같아 보인다. 더구나 우리의 시선 반경을 수십 배도 넘는 건물 높이는 건물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데 힘들게 한다. 우리의 시선은 주로 간판에 머문다. 건물만큼 많은 간판들은 건물을 가리고 눈에만 띄게 하려는 욕구를 드러내며 고함치고 있는 거 같다. 서울 거리 풍경에 대해 말하라면, 어둡고 흉물스럽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의 눈은 역시 다르다. 평범하고 어두운 거리에도 차이를 구별해내고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책에서 다루는 많은 건물들과 다리들은 우리가 늘 지나다니는 곳이거나 한 번쯤 지나친 적이 있을 법한 익숙한 대상들이다. 그저 높고 네모난 건물들과 한강 남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철교들에 숨어있는 건축가의 의도를 찾아 보여준다. 사방이 콘크리트인 서울에도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데 우선 놀랍다. 저자의 서술방식도 큰 역할을 한다. 쉽고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냈고 설명을 끌어가는데 풍부한 감수성이 흉한 건물들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한 사람의 전문성과 감수성으로 빚은 건물 다시 들여다 보기는 책을 옆에 두고 책 속 건물을 지나칠 때마다 펼쳐보고 싶게 한다. 어제는 길을 걸으며 차를 타고 고개 높이 들어 꼭대기까지 올려다봤다. 건물 모서리나 창도 유심히보고. 이 책의 미덕은 이렇게 한 번 다시 봐 보라고 권유하는데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반인은 건축가가 아니니까 건물을 보면서 저자처럼 건축가의 생각을 읽어내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어떤 건물이 미적 가치가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서울은 일반인이 보기에 아름다운 건물들은 사실 드물다. 자연을 고려하고 행인을 고려하는 건물물을 떠올릴 수 없다. 우리의 최신식 건물들은 하늘이나 태양을 즐기도록 만들기보다는 차단하고 실내를 따뜻하고 시원하게 만드는데 치중하는 거 같다. 현대식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조금 낡고 불편해도 반짝반짝 닦여 정감있는 건물, 불편함을 기꺼이 참을 수 있는 건물이 담긴 서울을,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 일반인의 눈으로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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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침묵 - Into Great Silenc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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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나니..." 

1. 시적 감상 

도를 수행하는 것 또는 신의 제자가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하는 행위다. 사계라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추우면 추운데로 더우면 더운데로 순응하는 자세다. 춥다고 거위털이나 밍크털로 내 몸을 두르려고 동물을 대량으로 길러 죽이지도 않고 덥다고 에어컨을 가동해서 온실가스를 집이나 사무실 밖으로 내뿜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가 가진 일부를 포기한 거 일 수 있다. 아주 사소하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힘들다.  

수도원은 물질적 욕구를 모두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만물을 살핀다는 신의 교리대로 따르기도 약속한 공간이다. 물질적 삶의 간소함은 일부일 뿐이고 정신적으로 신을 향한 하나의 생각만을 남기도 온갖 욕망과 시기를 버리기로 하는 일이다. 최소한의 가구가 있는 독방에서 지내면서 주로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필사하면서 지낸다. 다 같이 예배를 드리는 의식 속에서도 대화는 거세되고 신을 찬양하는 나지막한 노래를 합창한다.  

그들의 소박하고 절제된 일상은 번잡한 내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종교활동을 하지 않고 신의 존재를 필요할 때만 믿는 내 눈에도 그들의 삶은, 한편으로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수도사들은 철저하게 비우는 삶을 지향한다. 한 끼 식사조차도 눈과 혀의 즐거움을 금지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고립된 수도원에서 신을 위해 기도만 하는 게 과연 신이 원하는 삶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눈이 쌓인 수도원 산길에서 수도사들이 미끄럼을 타면서 천진한 어린 아이들처럼 즐거워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 금욕적 생활 속에서도 작은 즐거움은 누려하는 게 인간 아닐까..하는 처연함도.

2. 영화적 감상 

영화가 늘 새롭고 흥미로운 이유는, 플롯 때문이 아니다. 플롯은 영화를 이루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일 뿐이다. 영화 속 화면에는 현실에서는 잡아둘 수 없는 빛에 관한 기록이 있고 시간을 가둬둘 수 있어서 언제든지 되감아서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찰라의 빛과 시간에 관한 기록이다. 찰라를 모아 놓으면 세월이 되고 매일의 똑같은 일상이 이를 수 있는 곳을 암시한다.  

수도원은 양면적 가치를 가진 곳이다. 계몽주의 시대가 되면서는 수도원은 성스러운 곳이 더 이상 아니었다.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에서처럼 수도원은 부패와 악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고 또 피터 뮬란 감독이 만든 <막달레나 시스터즈>에서는 인권을 말살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수도원의 일상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수도원에서 무엇을 하는지 대체로 모른 채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는 책과 영화들을 봐왔다. 픽션이고 부조리한 부분만을 확대해서 가공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다큐로 일체의 인공조명을 안 쓰고 촬영했고 실제 수도사들의 삶을 담았다. 그러나 이것도 일부일 뿐이다. 수도사들의 묵상과 기도할 때 기록했다. 그들의 기도 내용이나 마음의 동요 혹은 평온은 카메라로 담을 수 없다. 감독은 씬과 씬을 원하는대로 배치해서 카메라가 담지 못한 생각을 담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이름이 "위대한 침묵 속으로"이고. 우리는 카메라가 말해준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 수도사들이 들어간 침묵 속으로는 아쉽게도 들어갈 수는 없다.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수레 바퀴소리, 돌 바닥에 신발이 부딪치는 소리, 심지어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에도 청각이 반응을 한다. 기도문을 외우는 소리는 음악같다. 신을 믿는 의식 중 하나가 기도문이나 찬송가다. 기도문이나 찬송가로 신심을 엿보는 건 비신자한테는 조금 힘들고 아름다운 의식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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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왈츠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박
대니얼 J. 레비틴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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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은 뇌와 사고의 상관 관계에 관한 독서 기간으로 잡았다. 한 분야 혹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의 사유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적어도 몇 권의 책을 읽어야하니까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과 함께 주문했는데 핑커의 책은 내 기대치에 못 미쳤던 터라 대니얼 레비틴의 책은 더 반가웠다. 저자는 인지 신경과학자(이런 분야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인데 인지 신경과학에서 다루는 게 내가 궁금하게 여겨왔던 거다! 브로카 영역이 손상되면 통사론에 문제를 일으켜 문장을 말하지 못하고 베르니케 영역이 손상되면 단어발음이 힘들어진다는 이런 뇌의 지도를 만들어가는 게 궁금했던 게 아니라  사고할 때의 뇌의 변화다. 또는 사고할 때 뇌는 어떻게 작용하나.  

그동안 내가 몰라서 그렇지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한 거인들이 수도 없이 많다. 베르그손이 왜 <물질과 기억>을 썼는지 알거같고, 들뢰즈과 말하는 운동과 이미지의 실체의 윤곽에 이제서야 조금 다가간거 같다. 왜 인문학을 다루는 학제에서 들뢰즈나 베르그손을 읽기 전에 이런 뇌 과학 개념 책을 읽으라고 아무도 말 안하는가. 삽질을 덜 할 수 있는 독서루트인데. 쩝. 

이 글은 음악을 들을 때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로  집약되지만 전반적인 뇌 작용에 대한 개괄적 설명을 동시에 한다. 그러면서 음악개론 같기도 하다. 음악적 요소 개념에서부터 음악과 소음과의 차이를 이론적으로 친절히 설명해준다. 음악을 들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청각기관을 거쳐 뇌 뉴런들이 연쇄적으로 작용하면서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흡입할 때처럼 도파민이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 대략적 틀은 알 수 있지만 아직까지 현대과학으로 뇌의 정교하고 복잡한 연산작용에 대해서는 신비를 풀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결과가 아니라 뇌에서 곡조를 기억하는 과정과 음색이나 조가 변해도 곡조를 저장소에서 불러내는 과정이다. 음악 뿐 아니라 기억 일반과도 관계가 있다. 문장을 기억할 때와 노래를 기억할 때, 뇌에서 연산작용이 일어나는 곳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내 관심은 기억일반에 관한 것이다. 모든 기억은 왜 왜곡인가,에 대한 대략적 설명이 명쾌하게 나와있다. 철학자들이 어려운 말을 사용한 게 과학에서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극복하려고 여러 가지 개념들을  사용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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