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다빈치 art 18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신성림 옮김 / 다빈치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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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미술책이라기 보다는 르 클레지오란 저자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전기글 쯤 된다. 그림은 그냥 부록이고. 그림책을 살 때, 구매 심리는 화가의 일생만을 원하는 게 아니라 플러스 알파를 얻기를 기대한다. 일생은 좀 간략하고 그림을 보는 각도를 얻고 싶을 때 그림책을 산다. 물론 내 경우에.  

그림 읽어주는 책, 혹은 화가에 관한 책을 독자 마음에 들게 쓰는 일은 소설 쓰는 일보다도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럼 난 그림 분석을 원하는가. 그렇진 않다. 그림을 분석만하는 책은 상상력을 방해하고 금방 지루해진다. 일대기와 그림 분석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 어우러진 책을 원하는 거 같다. 이 책은 이런 내 구매 심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은 책이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일대기가 심층적이지도 않고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자료수집 부족일 거 같기도 하고.ㅋ 전기문이 그렇지만 작가의 절대적 상상력을 요구하는데 실제 인물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르 클레지오의 상상력은 부실하다.   

그만 투덜거리고, 

프리다가 주로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이유는 늘 병마와 싸우느라 침대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4,5월은 가벼운 교통사고와 저질 체력이 감당 못해 큰 후유증으로 이어져 사경까지는 아니어도 밤 잠을 설친 날이 많았다. 체력은 급저하되고 한약으로 연명하는 시간을 보냈다. 머리는 혼미해지고 밥 맛은 없고 독서가 왠 말이냐, 극장도 못 가고, 커피도 끊고 맥주도 끊는 아주 암울한 두 달을 보냈다. 커피와 맥주가 없는 삶을 살려니 죽을 맛이다. 책은 주문만 해 놓고 쌓아놓기만 했다. 방전된 체력으로 무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걸 깨닫고 있을 때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읽었다. 오랜 투병 생활 중에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리다니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은 아름답지 않다. 나는 일반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아름다움을 묘사한 그림에 끌리는 단순한 관객이다. 그러나 서경식 씨가 말했듯이 왜 아름다움만 그림의 대상이 돼야하나. 추함이나 고통 또한 그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고통을 그린 것이고 그 속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힘이 꿈틀댄다. 조각난 신체 부위를 널어놓는다거나 피가 여기 저기 있는 그림은 말보다도 몇 만 배는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웟는지. 약한 몸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통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 그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예술은 예술가의 행복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예술가의 고통에서 탄생한다. 칼로한테 고통은 그림의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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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y 2014-12-08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지금 이 책을 빌려서 읽고 있는데요, 읽다보니까 비슷한 말을 자꾸 반복하는건 사실이더라고요. 중간중간 그림에 대한 설명이 나오기는 하는데, 글과 그림이 따로 있어서 그림에 대한 이해가 아쉽달까요. 아무튼 이 책과 관련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들려 공감하고 가게 되네요.

넙치 2014-12-14 21:35   좋아요 0 | URL
비루한 기억력 탓에 희미하게만 기억이 나네요. ^^;
 
싱글맨 - 아웃케이스 없음
톰 포드 감독, 니콜라스 홀트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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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독에 몸부림치는 한 남자를 시적으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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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카피하다 - Certified Cop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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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1.
한 대상이 예술품이라는 판정은 누가 내리며 그 기준은 뭔가. 찾아 보는 이가 많고 보면서 감흥을 얻는 모든 것은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원본보다도 더 그럴듯한 복제의 풍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철 지난 담론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예술품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결국 예술은 삶의 파편일 뿐이다. 그렇다면 원본인 삶과 사랑도 원본과 복제가 있을까. 영화는 원본과 시뮬라크르에 대한 지루한 대화 사이에 한 남자와 여자의 삶에 관한 대화를 끼워넣는다. 여자가 예술품이라고 여기는 삶은, 남자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는 삶이다. 남자한테 예술적 경지의 삶은 자신의 영역을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굳건하게 막는 일이다. 길을 걸으면서 두 사람의 삶을 막 시작한 신혼부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중년부부, 걸음을 옮기는데 서로의 팔이 필요한 노부부를 카메라에 담는다. 그 누구의 삶도 가짜가 아니지만 누구의 삶이 예술적인지 알 수 없다. 누구의 삶이 예술의 경지라고 말하는 건 순전히 구경꾼의 입장이므로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예술의 조건 따위 보다는 그 순간의 소소한 즐거움에 더 관심이 있을 터이다. 문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함께 볕 쬐며 지나가는 사람들 보는 즐거움은 예술품을 보는 것보다 더 가치있을 수 있다.  

영화 속 남자와 여자는 일상에 대한 근본적 시각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다. 남자는 사소한 습관도 버릴 수 없으며 여자는 남자의 그런 점이 못마땅하지만 지친 마음을 내려놓을 곳이 남자라고 여긴다. 두 사람이 실제 부부였는지 아님 처음 만난 사람인지 모호한 경계 속에서 여자의 고단한 삶이 퍼즐처럼 조금씩 드러난다. 
 

2.

처음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영어로 대화를 한다. 마을 광장에 있는 조각상을 보고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여자의 모습에서 숭고한 예술적 기품이 들어있다고 여자가 말한다. 한 중년 남자가 남자에게 슬그머니 충고를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든 지금은 그저 여자의 어깨에 손을 가만히 얹어주기만 하면 된다고..남자는 주춤거리며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대화는 여자의 모국어인 불어로 바뀐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시 의견을 달라지는 지점에서 남자는 자신의 모국어 영어로 여자는 불어로 대화를 한다. 사람의 관계는 이런 게 아닐까.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에 친숙해졌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은 낯선 외국어가 돼버리는. 아무리 친근한 사람 사이에도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 존재하는 극복할 수 없는 뉘앙스의 벽이 늘 존재한다. 두 언어 간에 존재하는 뉘앙스의 벽이 무너지는 건 인간 세계에서 가능하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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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 펭귄클래식 105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명복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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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제목의 도발성 때문이다. 아편 중독자의 고백이라니...나는 태생상 뭐든 중독자가 못 된다. 저울이 늘 균형을 이루어야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양쪽 접시의 추를 같게 유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다보니 추의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는 사람들의 심리에 관심과 애정을 쏟게 된다. 중독이라는 게 한쪽을 버려야만 가능하다. 그게 자신의 영혼이나 육체를 갉아먹어도 쏠림의 성향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균형을 버릴 수 없는 성향인 것처럼.  

일 중독자,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 아편 중독자..어떤 매체가 됐든 중독이란 건 내게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미국영화나 소설을 보면 마약 중독자의 심리나 신체 현상을 다룬 작품이 꽤 있다. 나이가 들면서 그들이 마약에 의존하게 되는 배경을 유심히 보게 된다. 중독 후유증으로 겪는 물리적 고통과 맞서는 처절함을 그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보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현실보다는 쾌락을 좇는 경우도 있는데 쾌락의 절정을 추구하는 행동도 내 눈에는 그럴듯해 보인다..이렇게 말하면 내가 기회가 주어지면 마약 중독자의 길로 들어설 여지가 있을 것 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회가 주어져도 나는 아마 중독자가 되지는 못 할 것이다.  

아무튼, 이 책은 아편의 심각성에 대해 알리고자 쓴 글이라고 한다. 아편은 20세기 초반까지만해도 만병통치약으로 공공연하게 처방되었다고 한다. 머리 아파도 아스피린처럼 복용하고 가정 상비약으로 둘 정도였다고 한다. 저자는 위통 때문에 아편을 복용하다가 중독자가 되었고 아편을 끊고나서 그 경험을 통해 아편상습 복용에 대한 위험을 알리고자 했다. 흔히 아편은 쾌락을 위해서라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가 동경하는 중독자의 모습은 아니지만 글에 통찰력이 배어있다. 아편을 주제도 쓰고 있지만 아편이 유행하는 당시의 영국의 사회상을 단편적으로 다룬다.  

아편 중독자로서 거리 생활을 할 때 만난 어린 소녀가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걸 목격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런던에서 행해지는 자선 행위가 좀 더 신중하게 베풀어졌다면, 법이 개입해 그녀를 보호하고 보상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런던의 자선 행위는 깊고 강력하지만 소리도 없이 지하로 스며드는 강물을 따라가고 있어서, 집도 없고 가난한 부랑아들에게는 분명 쉽게 접근하기가 불가능하다. 런던 사회의 외부 환경 구조는 거칠고 잔인하며 배타적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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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빛 - Lights In The Dusk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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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쇼핑몰 경비원 코이스티넨을 바라보는 부정적 사회적 시선에서 출발한다. 어떤 연민이나 따스스함은 서늘한 헬싱키란 도시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밤에 불빛이 듬성듬성 켜진 도시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다. 야간 경비 근무를 하고 고급 식당에 어울리지 않은 작업복을 입고 보드카 한 잔을 위로삼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혼자서 묵묵히 견딘다.   

그런 그에게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는 여인이 나타난다. 코이스티넨은 봄날에 피는 꽃처럼 마음이 살랑이지만 봄날의 꽃 만큼 덧없는 게 세상에 또 있을까. 여인의 목적은 그가 근무 중에 지닌 보석상 열쇠였다. 흥미로운 건 그 이후다. 코이스티넨은 여자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걸 알고도 변명이나 항소할 의지가 없다. 그는 결국 1년이 넘는 수감생활을 하는 걸 선택한다. 어떤 말도 하지 않는데서 자존심을 지키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그가 어떤 말을 해도 결과는 같았을지 모른다. 법정에서 그는 이미 공범자로 분류된 채 재판을 받았다. 그의 결백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무죄를 증명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생리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 접시닦기를 하지만 그의 죄를 안 주인은 그를 해고한다. 상황에 대한 고려나 참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보석을 훔쳤던 절도범이고 감옥에 갔다왔다는 사실만이 그를 따라다닌다. 그는 어떤 절망이나 희망도 내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가 황혼의 빛이에서 '빛'을 찾으려했지만 난 빛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을 암시하는 데, 그를 이해라고 그에게 다가가려는 유일한 여인(핫도그 매점을 운영하는) 이 그의 마지막 숨결을 들여다보지만 코이스티넨은 이 여인의 관용과 이해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적 드문 바닷가에서 피 흘리며 조용히 눈을 감는 코이스티넨은 죽음으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한다. 가진 게 없는 사람, 혹은 비주류에 속한 사람에게 자존심이란 모든 것이다.  

미국영화라면 아마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하려고 복수를 하는 과정을 영화로 만들었을 것이다. 복수 과정에서 그는 악에 응징하는 영웅이 되거나 광인이 되거나. 그러나 이 영화는 핀란드 영화다. 고결한 한 영혼의 터무니없는 죽음을 그리면서 이래도 이 사람이 잘못했니, 하고 묻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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