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거윅이 주연한 <프란시스 하>를 아주 재미있게 봤었다. <프란시스 하>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우왕좌왕하는 비혼으로 살 것만 같은 여자의 이야기이다. 사랑도 중요하고 우정도 중요하지만 프란시스 하는 사랑보다는 우정에 더 무게를 두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배우가 되고 싶지만 막연한 미래를 두고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그레타 거윅의 아우라가 영화에서 돋보인다. 그 그레타 거윅이 감독을 한 영화 <레이디 버드>.

17살의 소녀가 부모가 지어준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거부하고 직접 '레이디 버드'라고 이름을 짓고 레이디 버드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개성도 강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여과없이 생각을 바로 입으로 쏟아내는 열일곱. 무서울 거 없는 십대고, 이런 십대 소녀를 둘러싼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학교에서 우정, 그리고 막 피어나기 시작한 이성에 대한 관심과 이성의 육체, 그리고 애증의 관계에 있는 가족.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관계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한다.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절친과 소원해지고 마음 속 깊이 사랑하지만 늘 미움으로 대화를 시작하고 끝내는 엄마, 칭찬을 하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지 서로 헐뜯기만 하는 오빠.

레이디 버드의 일상은 아마도 평범하게 펼쳐지지만 사건을 만드는 건 레이디 버드 자신. 강한 성격으로 모든 사람과 부딪치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격적으로 대응하고...사실 이런 일은 몹시 현실적이다. 레이디 버드의 꿈은 고향, 새크라멘토를 떠나 동부로 가는 것. 우여곡절 끝에 꿈대로 뉴욕에 있는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레이디 버드의 꿈은 실현된다.

낮선 도시에서 아마도 신입생 환영회(?) 쯤 되는 모임에서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로 술을 마신다. 응급실에 실려가는 소동이 있고, 다음 날 레이디 버드는 다시 태어난다. 크리스틴이란 부모님이 준 이름으로. 카톨릭 고등학교를 나와 카톨릭에는 얼씬도 안 하겠다는 다짐과는 반대로 일요일 생경한 도시에서 성당에 찾아가 미사를 보며 자신의 뿌리를 강하게 느낀다. 무의식은 이렇게 의식을 지배한다. 벗어나려고 했던 그 모든 애증의 대상은 어느새 성인이 된 소녀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소녀는 어떤 삶을 살게 될 지 모르지만 아마도 가족, 우정, 사랑이 분리되고 선명한 것이 아니라 서로 혼재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어젯밤 엄마랑 커다란 말다툼을 했고, 엄마는 내게 자신은 말로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나와 엄마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점이 서로 닮았다. 나는 말의 폭력성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굴면서 정작 나는 다른 이들에게 자꾸 폭력적인 말을 해서 기분이 몹시 안 좋은 요즘이다. 마음 속에 화의 불길이 치솟을 때, 한 템포만 입을 다물어야지 다짐하는데 쉽지 않다. 요즘 내 최대 고민이다. 내 마음에 안 들면 안 든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이 공격성을 좀 누르고 완곡하게 말해야할텐데. 열입곱도 아니거늘 뭐 때문에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졌을까. 레이디 버드를 보면서 어제 엄마와 싸운 찝찝함이 내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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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마당 Vol.10 어른 찾아 삼만리 - 2018
언니네 마당 편집부 엮음 / 언니네마당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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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찾아 삼만리'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어른은 어디있을까,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한다. 어른의 다양한 정의부터 책은 시작한다. 여러 사람이 생각하는 어른, 아이들이 생각하는 어른, 여러 문화권이 정의하는 사전적 정의 등등.

 

그리고 어른에 대한 단상이 이어진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관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들여다본다. 자유를 찾는 스무살, 마흔살 비혼으로 살아가기, 마흔살 워킹맘으로 살아가기, 딸이 나이든 아버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들 속에서 슬며시 겹치는 감정들이 있다.

 

어른이라면 당위성, 책임만 무게를 둔다면 '어른 찾아 삼만리'는 책임과 당위성보다는 개념있게 사는 게 어른이 아닐까를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소비사회에서 관계지향적이고 개념 소비를 하는 이의 경험, 적게 벌고 덜 쓰는 삶을 사는 청년, 은퇴 후에도 자신의 정신적 자산을 주변과 나누려는 건강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이사이에 지하철 빈자리를 연마하는 촉 등 찌질하지만 생존(?)과 관련된 어른의 기술, 방학이 없는 어른을 위해 잠시 쉬는 시간에 동심으로 돌아가 '어른이표 탐구생활'을 해보고 '비공인꼰대감별모의고사'로 꼰대인지 어른인지 생각해보면서 피식 웃음을 선사하는 시간을 부록으로 싣는다.

 

넘쳐나는 자기계발서 속에서 서둘러 자기계발을 하라고 부추기거나 질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자리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잠시 멈춰서 내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불안한 고민이 아니라 생산적 고민을 하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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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미 어떤 시선으로 그 사람의 삶을 판단하고 편견을 갖게 된다. 꼭 계몽주의자가 아니어도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권하고 조언을 하려고 안달한다. 누군가의 삶을 그대로 바라보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일상에서도 이런데 영화는 더군다나 더 힘들다. 카메라 자체는 이미 하나의 시선이고 권력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나오는 이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도 이 보다 더 시선이 개입할 거 같은데. 이 영화는 극장편영화인데도 시선의 개입이 없는 것처럼 보는 이에게 다가와 더 놀랍다.

일정한 거주지가 모텔인 이들의 삶. 모텔은 잠시 머무는 공간으로 약속된 공간인데 임시 거주지가 집이 되는 이들의 생활 속으로 영화는 들어간다. 장기투숙자에 아이들이 있다. 이 아이들은 서로 친구가 되고, 방학 내내 시간을 같이 보낸다. 모텔 주변을 뛰어다니면서 소리지르고 웃는다. 재미있는 놀이가 있으면 서로 알려주고, 폐허에 들어가 불장난도 하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지나가는 손님에게 구걸을 하기도 한다. 득텍한 아이스크림을 한 입씩 돌려가며 그 달달함을 공유하고 애정하는 게 사라지는 허망함도 경험하고, 때론 그 허망함을 견디는 법도 터특해간다. 장기투숙자 아이들의 엄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으로 아이들을 세심하게 배려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 아이들을 안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최선의 방식으로 사랑한다.

극 중에서 무니 모녀가 있다. 무니의 엄마가 왜 아이와 모텔 생활을 하게 되었고, 왜 파트타임이라도 한 곳에서 일하지 않는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 영화는 개연성을 설명하기 보다는 무니 모녀의 일상을 그저 보여준다. 주 단위로 방세를 내야하는데 돈이 없어서 고민하고 모텔 관리인과 언성을 높이며 화를 못 참아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근처 고급 리조트 관광객들에게 접근해서 향수를 파는 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지만 무니와 함께 할 때면 당당하고 아이의 시선과 노력하지 않아도 같아보여서 무니와 노는 것은 곧 무니 엄마의 놀이처럼 보인다. 몹시 불안정해 보이는 삶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관객은 무니의 앞날에 대해 슬그머니 고민한다. 무니 모녀는 행복한데 이 행복은 경제적 무능력, 사회적 편견으로 보면 아이에게 옳지 않은 행복일 수도 있겠다, 하는 지점에서 아동국 직원들이 등장한다.

무니 엄마는 SNS를 통해 성매매를 해서 방세를 내는 일이 기관에 알려지고 이웃 장기투숙자들에게도 알려진다. 무니는 어른들의 개입으로 갑자기 친구들을 잃게 되고, 유일한 친구 엄마만 남는다. 다른 사람의 이해와 공감이 없는 상태에서 모녀의 관계는 변함없다. 아이에게 사회가 지향하는 윤리적 태도를 알져주지 못 하는 엄와와 아이를 분리시키려는 시선에 모녀는 흥분상태가 되고 무니는 결국 아동국 직원의 손에서 달아나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무니가 엄마와 헤어지는 것을 저항하는 표정에서 과연 기관이 엄마와 아이를 떼어놓는 게 맞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무척 충격을 받았다. 무니의 탈출은 진정한 탈출일까,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하지만 무니의 탈출을 지지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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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러브>를 감독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영화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지독한 사랑에 대해 말한다. 사랑은 지독하게 주관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제도를 거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사랑이 없어도 잘 산다. 하지만 사랑이 있다면 사랑 없는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사랑 없는 삶으로 돌아가는 게 옳지도 않으니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몸과 마음을 던져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감독이다. 사랑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게 어떤지 감이 안 오고 사랑의 세계는 내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이고 중독성이 있어보여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에 절대적 지지를 보낸다. 무언가를, 심지어 사랑도 머리로 이해하고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나란 사람은 사랑의 세계가 무엇인지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절망이 찾아오기도 한다. 요즘은 더욱 방황(?) 중이기도 하고.

이 영화는 금기된 사랑과 성장, 성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지만 사랑에 금기란 게 사회적 인식이고 그 사회적 시선을 따르겠다는 전제가 있어야 금기가 성립된다. 여름 휴가에서 만난 미국인 연구원을 보고 알 수 없는 마음의 동요에 괴로워하는 한 소년이 있다. 아버지의 손님에게 몸과 마음이 저절로 반응하는데 낯설어하고, 자신의 감정인데도 정체를 모르고, 느끼는 바를 말하는 게 옳은 지 확신도 없으며, 상대가 자신을 받아줄 지는 더더욱 불확실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금지된 선을 넘는다. 그 후에는 겉잡을 수 없는 감정 속으로 빠지고 이별은 예정되어 있다. 미국인과 이탈리아인은 휴가가 끝나면 물리적으로 헤어진다. 소년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혼동스럽고 사랑이란 감정에 열병을 앓는다. 소년의 감정은 이탈리아 시골을 배경으로 바흐를 재즈풍으로 편곡해서 연주하는 피아노 곡, 뜨거운 볕 아래서 페달을 밟는 움직임, 식탁에서 자신의 감정이 사람들한테 들킬까봐 불안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다 먼저 일어나는 일, 미국인 연구원과 2층에서 같은 화장실을 쓰는데 그가 화장실 출입을 할 때마다 곤두서는 감각들. 소년의 불안과 동요를 일상적 행위에 아주 세심하게 배치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소년의 감정이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의 감각과 세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가 있고, 그 경험을 함께 할 것을 영화는 권한다.

열병 같은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헤어질 수 밖에 없고, 고통은 영원할 거 같지만 일상은 잘도 돌아간다. 사랑의 고통은 고통이고 일상은 일상이니.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애도 의식은 결국 소년의 서러운 울음으로 나온다. 사랑 때문에 울어본 적이 있다면 그 울음의 끝은 그 사랑을 가슴 한편에 묻고 또 다른 사랑을 기다리는 희망의 방을 만든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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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언어의 무용함에 관한 영화다.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짓는 기준은 언어이다. 말, 특히 문자의 발명은 획기적 수단이었다. 문자로 생각을 기록할 수 있고,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도 있어서 인류는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고 시간을 절약하고 문명을 발달 시킬 수 있었다. 또 언어는 인간을 다른 종들에서 분리되어 언어를 공유하는 이들과 결속시킨다. 언어는 하나의 권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는 글을 읽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기도 했다. 글을 읽고 사고하는 힘은 인간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언어의 유익성과 유용함에만 몰두해 있다. 기능적 면에서 언어는 확실히 발명품이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으로 넘어오면 언어는 위력을 잃어버린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백만분의 일도 전달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감정을 언어화하는 작업은 아주 작은 부분만을 옮기는 게 가능하고, 그것 마저도 때로는 오해를 일으킨다. 발신자와 수신자의 감정 체계가 다르다면 언어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이끄는 수단이 된다.

<쉐이프 오브 워터>의 여주인공 엘라이자가 듣기는 하는데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언어 체계로 사고 하는 인간이 아니라 감정 체계로 사고하는 인간의 상징이다. 그녀는 비언어권에 속해 있고, 인간의 언어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체의 비언어적 체계에 익숙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괴생물체가 그녀에게는 그냥 자신과 같은 생명체일 뿐이다. 언어 쳬계에 속한 인간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인 생물체라 해부를 해야한다고 결정한다. 수수께끼를 푸는 인간의 방식은 상대가 언어적 정보를 보내야하는데 비언어적 단서들은 인간에게는 때로는 위협적인 것으로 보이고, 때로는 하등한 것으로도 보이고, 때로는 성가신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 인간의 결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스트릭랜드이다. 언어계, 즉 선명한 기호체계에 종속되어 있는 인물이다. 스트릭랜드는 희귀한 초록색 캐딜락을 타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 혹은 멋진 사람이라는 기호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에게 괴생물체는 그야말로 '괴'기스러운 것일 뿐이고 성공을 위한 임무이다.

반면에 그와 대척점에 있는 엘라이자는 인간계와 생물계의 경계에 있다. 그래서 괴생물체를 보자마자 친근함을 느끼고 인간의 학대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을 한다. 그저 보살펴주고 사랑을 주는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단번에 교감을 느끼는 게 가능하지, 하면서 흥미가 급감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아늑한 카페에 앉아서 소통의 어려움에 대해 영화를 같이 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이 영화를  스트릭랜드처럼 보려고 했다. 스트릭랜드같은 사고 쳬계에 속한다면 이 영화는 재미없는 그저 잘 만든 영화로 보인다.

엘라이자는 괴생물체를 학대와 죽음에서 구출하기로 하고, 영화는 판타지라 엘라이자의 결정을 도와주는 이들이 곁에 있다. 인간의 언어계에 속해 있지만 마음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다. 현실에서도 마음의 움직임에 귀를 움직이는 이들이 드물게 있다.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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