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예술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을 말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영화는 독특한 방법으로 사랑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 그 자체보다는 사랑을 하는 주체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을 말할 때 보통 사랑의 대상에 대해 말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의 관점은 대상보다는 사랑을 하는 주체에 무게가 실려있다. 사랑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바로 주체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으로 사랑의 씨앗은 싹이 튼다. 이 때 대상의 실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사랑은 타이밍이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사라지기로 결심한 여자, 에이미는 닉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후에 주체는 대상을 새로 창조하는 조물주에 가까운 위치로 상승한다. 닉은 원래 게으르고 둔감하고 낭비벽이 있다. 이런 부정적 캐릭터한테, 에이미는 부지런학고 예민하고 고급스런 취향을 입힌다. 즉 닉을 재료로 닉'를 창조한다. 에이미의 손길을 통해 만들어진 닉'는 사랑받기에 충분한 캐릭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에이미의 판타지가 깨지는 것 역시 시간 문제다. 닉은 바람을 피우고 불성실한 실체가 되어 현실로 귀환한다. 이제 에이미의 복수극이 시작된다.

 

2.

영화는 에이미의 복수극에서시작하는 스릴러 장르를 택한다. 에이미는 자신의 존재를 현실에서 부재시키기로 결심한다. 환상이 깨져버린 현실은, 에이미한테는 무의미하다. 현실에서 에이미는 더 이상 조물주가 아니다. 에이미는 자신의 부재를 통해 닉을 조각낸다. 환상 속의 이상형을 꺼내 산산히 부수고 현실에서 아내를 죽인 살인범으로 변모시킨다. 어떻게 아내가 남편을 살인 용의자로 몰아가는지가 관전 포인트이기도 하다. 에이미는 남편을 용의자로 만들기 위해 자해도 서슴지않고 과거도 조작(일기 쓰기를 통해)하고 또 부정하려했던 과거도 이용한다. 사라진 에이미의 행방을 찾는 현재의 이야기 속에 에이미의 과거가 플래시백으로 아주 촘촘하게 들어가있다. 현재와 과거의 경계가 불분명하게 섞이면서 에이미와 닉의 불화의 실체가 완성된다. 또 에이미의 정신세계 역시 구체화된다.

 

닉과 에이미의 불화를 보다보면 에이미는 남편의 외도에 광분한 단순한 사이코패스일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사실 남편의 외도는 일부일 뿐이다. 에이미는 자신이 만들어낸 결핍 욕망에 너무 매혹당해서 그 결핍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 아니라 헤어짐이란 말이 있다. 소유하지 못하게 되면서 결핍 상태가 지속된다. 사랑은 바로 이 결핍에서 출발하기에, 에이미는 그 결핍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실종을 계획했다. 하지만 닉이 에이미가 꿈꾼 환상 속의 인물로 다시 돌아온 거 같은 시점에서 거짓 실종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 속에 바로 닉이란 환상이 다시 존재하므로. 즉 현실에서 닉은 다시 부재하는 순간에 에이미는 자신의 실종 해프닝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3.

또 하나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에이미의 실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이다. 수사는 물론 증거 위주다. 에이미는  이 증거주의 수사를 영리하게 이용한다. 미리 예측해서 증거를 섬세하게 배치한다. 닉은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과학적 수사 혹은 논리적 추론이란 얼마나 함정에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또 하나는 TV쇼와 사람들의 반응이다. 카메라는 이미지와 말을 통해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듣는 것에 절대적 신뢰를 보낸다. 사람은 과연 진실을 사랑하나? 나는 점점 회의적이 되어서, 사람한테 진실을 추구하는 속성이 결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 직전이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을 뿐이다. 에이미가 자신의 실종을 성공적으로 연출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사람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비이성적 행위 덕분이다. 에이미가 지닌 악마성은, 그러니까, 우리 모두한테 있다. 그 악마성의 강도가 다를 뿐이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로 연출하는 능력이 어디 에이미만 가지고 있나. 매일 우리는 우리, 무의식 중에 자신을 편집하고 보여주고 싶은 것을 검열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단순한 싸이코패스 영화가 아니다.

 

4.

데이빗 핀쳐의 영화는 보는 동안에 정신을 후리는 특성이 있다. 하지만 보고 나면 텁텁하다. 나쁜 기운에 쭉 빨려들었다가 나와서 정신차려 보니 이건 뭐지, 하는 황망함이 늘 함께 한다. 사악한 기운이기라기에는 음...매우 미국적이다. 사방이 콘크리트 벽인데 창 밖을 내다봤더니 또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갑갑한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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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왜 부조리한가 - 경제학.철학.통계학.정치학으로 풀어낸 법의 모순
레오 카츠 지음, 이주만 옮김, 금태섭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제목과 달리 통계가 지닐 수 있는 허점에 관한 일반론이라 좀 실망했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루는 딜레마 접근 방식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극단적인 딜레마 상황 설정에 반감이 드는 편이다. 극단적 상황을 설정해서 선택을 강요하는 이분법적 논리도 마음에 안 들고. 원제가 <Why the law is so perverse>다. perverse를 찾아보니 우리말로는 "삐딱한, 삐뚤어진" 영어로는 "Someone who is perverse deliberately does things that are unreasonable or that result in harm for themselves." 이다. 이 말을 보면 고의로 불합리적인 것을 하거나 해를 끼치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아주 흥미로운데 결국 법은 입법시 처음부터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이란 역설로 들린다.

 

왜 그런가, 하는 이유를 밝히는 게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겠지만 실제로 저자는 실망스런 접근법으로 다가간다. 가령 이런 거다. 선거에서 A, B가 출마했고 유권자의 선호도가 B가 우세하다. 이 때 C가 등장하고 C보다는 B가 호감도가 높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B가 당선되어야하는데 A가 당선될 수 있다는 경우의 수를 예시로 든다. 뭐 이건 우리가 지난 대선 때 겪은 바다. 이정희 후보가 싫어서 그네 공주가 당선었다. 또 지난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연아양이 앞 순서로 연기하는 바람에 최고의 연기를 하고도 금메달이 아니라 은메달을 목에 건 걸 봤다. 뭐 이런 다기준 의사결정 관점에서 허점을 바라보는 예시를 마구마구 늘어놓는다.

 

하나의 맥락은 법에서도 피겨스케이팅에서 일어날 수 있는 허점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변호사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런 허점을 찾아서 이용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니 막상 법 앞에 서면 억울한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요즘 재판제도가 얼마나 모순된 제도인가를 직접 체험하고 있다. 내용을 잘 모르는 제삼자인 변호인인 더 내용을 모르는 제삼자인 판사한테 뭐가 진실인지 묻는 게 재판 원리다. 그래서 증거재판주의를 채택한다고 하는데 이 증거라는 게 또 하나의 허점이다. 이미 계획적으로 법을 이용하기로 하고 증거를 만들면 증거가 없는 이는 꼼짝없이 법의 구제를 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판사 개인의 신념이나 믿음과 위배되어도 증거라는 물적 형식에 집착해야하는 게 판사의 일이다. 과연 판사가 얼마나 진실을 알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든다. 진실을 모르는 이한테 사실을 입증하려고 하려고 노력하는 일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대체 왜 내가 이걸 입증해야하나, 하고 복장이 터지는데 내 복장 터지는 걸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기에 제도 자체의 모순을 선명하게 목격하면서도 모순된 제도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현명하지도 용기도 없기에 무변론을 택하지도 않고 자의로 사형을 선고 받지도 않을 것이다. 평범한 나는 모순된 제도를 힘껏 따르려고 애쓴다. 법은 이미 강제하는 성향이 있고 이 강제성을 따라야하는 게 법치주의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제도가 아무리 폭력적이어도 그 폭력에 따르는 일이라니,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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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십대 때 TV에서 보고는 처음으로 영상자료원의 큰 화면으로 봤다. 나는 더 이상 십대가 아니기에 영화가 상당히 다르게 보였다. 음...제국적 성향이 강하다. 물론 한 개인의 영혼이 전쟁의 광기로 파괴되는 과정을 아주 극적이게 그렸다. 긴장되고 극적인 장면들은 영화적으로는 훌륭하다. 하지만 관점을 영화 언어에서 영화가 그리는 내용으로 돌리면 과연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첫째, 유명한 러시안 룰렛 장면이다. 세 친구가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베트콩의 포로로 잡힌다. 이 포로들을 상대로 베트콩은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는데 화면 속에 비친 베트콩은 외모만 베트남인이지 하는 행동이나 표정이 너무 미국적인데 깜짝 놀랐다. 즉 미국인의 관점에서 베트콩을 묘사했고 미군병사들은 무고한 포로로 그려진다.

 

둘째, 러시안 룰렛 도박장이 나오는 장면이다. 많은 베트남인들이 룰렛 게임을 하는 이들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손에 내기 돈을 흔들면서 열광한다. 난 이 장면이 아주 낯설었다. 이런 장면은 전형적인 미국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장면 아닌가. 자본주의를 거부하느라 전쟁을 했던 베트남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셋째, 미군을 희생자로 표현한 부분이다. 영화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결혼식 피로연 한 시간, 베트남 전쟁 한 시간, 그리고 전역한 후 고향으로 돌아 온 한 시간. 입대하기로 결정한 세 친구가 사는 곳은 미국의 작은 산업도시다. 낡고 누추해보인다. 이들은 입대 전에 술에 질주하고 사냥을 하며 젊음을 낭비한다. 이런 장면을 보면 이들의 입대 결정은 순간의 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젊음을 낭비하는 이들이 전쟁터에 가서 죽음을 경험한다. 젊은이들은 미래를 꿈꾸지 않았지만 전역 후에도 미래는 없다. 당시 청년의 암울한 보고서라는데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왜 베트남 전쟁을 이용했나.

 

수 년 전, 호치민에 갔었다. 베트남의 생기과 활력에 완전히 반했다. 베트남은 슬픈 역사를 지녔는데 그 슬픔을 자원으로 승화시키는 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베트남전은 미국의 관점에서만 서술되나, 하는 의문점이 들었다. 언제나 핵심은 미군병사들의 피폐해가는 영혼이었다. 사실은 베트남 민간인이 더 많이 죽었을 것이다. 미군병사들은 자원입대를 했고 베트남 국민의 삶의 터전으로 싸우러왔다. 물론 실상을 알고 많은 젊은이들이 정신적 갈들을 겪기는 한다. 하지만 베트남인의 입장에서 서술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이 또한 카메라의 권력이다. <디어 헌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디어 헌터>가 칭송받을 만한 영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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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10-26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시 미군들은 자원 입대가 아니라 징집으로 알고있으며.. 클린턴은 징집을 피하여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했지요.. 기본작으로 전쟁의 참상을 그린 반전영화이자 전쟁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그리는 심리 영화로 보았습니다. 어차피 미국에서 만들었으니.. 베트남 입장에서 만들기는 기대하기는 ..

넙치 2014-10-29 10:14   좋아요 0 | URL
처음에는 자원입대로 알고 있어요. 나중에 징집으로 바뀌면서 중산층 자녀들이 베트남에 가면서 중산층의 반발로 미국이 베트남전을 끝낼 수 밖에 없었다고요. 이 영화에서도 징집이 아니라 자원입대로 나와요... 저도 어릴 때 충격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반전영화로 봤는데 나이들어 보니 반전영화라기에는 그 시기가 반공시대여서 그런지...좀 괴리감이 있더라구요. 시대가 많이 변했으니까요.^^
 

 

 

 

 

 

 

 

 

 

 

<천안함>이 개봉 삼일 만에 극장에서 사라졌단다. <다이빙벨>도 사라질까봐 서둘러 가서 봤다. 남다은 평론가가 <씨네21>에서 쓴 <한공주>에 대한 비평글이 있다. 글의 요지는 윤리적 폭력에 객관성을 유지하는 게 미덕이 아니라 주관적 시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한다고. <다이빙벨>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구성된 다큐이다.

 

올 한 해, 충격과 절망으로 몰아넣은 참사를 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영상들을 극장에서 편안하게 관람하는 게 마음이 편치않다. 그러나 보지 않으면 잊는다. 그러니 편안하게라도 봐야한다. 참사가 터졌을 때 구조적 문제는 거의 다 지적되었고 마치 일대 개혁이 있지나 않을까, 찰나의 희망을 품었다. 어이없는 결말로 참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져간다. 하나도 변한 게 없고. <다이빙벨>에서 새롭게 지적하는 사실은 없지만 가장 강하게 지적하는 건 언론의 폐쇄적이고 퇴폐적인 태도이다. 이미 우리도 알고 있다. 참사 후 근 한달 동안 공중파와 케이블 뉴스를 안 보고 잘 안 듣는 팟캐스트를 찾아 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닐거다.

 

너무 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어 이 정권이 다 끝나가는 줄 알았는데 겨우 2년 밖에 안 지났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더 많다니, 절망적이다. 시간이 많아서 절망적이기 쉽지 않은데. 한편으로는 깊은 회의도 있다. 이 정권이 끝난다고 해서 다음 정권이 더 괜찮을 거란 보장이 없을테니. 터널을 바져나왔는데 또 터널이 있을 것만 같은 상황.

 

"잊지 않겠습니다"란 말로 다짐을 한다. 이 말 속에는 잊는 게 속성이니 다짐이라도 필요하는 말이다. 천진한 생명을 보내고도 아무렇지 않은 인간들도 많고 잠시 아파하다 또 잊을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최소한의 윤리적 양심이 있는 이들이라도 이 다큐를 보고 잊지 않게 담론을 계속 형성하는 일이, 지금 우리가 피지도 못한 채 진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설령 결과가 부정적일지라도 말이다. 진실 규명을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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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필요 2014-10-2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http://www.youtube.com/watch?v=_6KyYQ_kxnQ
일본이 재규명한 세월호 침몰 사건입니다. 영화를 보든 안보든간에 한번 꼭 보세요.
이걸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방송한 곳이 한곳도 없는지? 정말 답답합니다... 광고 아닙니다.

넙치 2014-10-29 10:14   좋아요 0 | URL
네.
 

 

 

 

 

 

 

 

 

 

 

1.

무언가의 혹은 누군가의 공통점을 찾아내서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어 계열화를 하려고 하는 게 사람의 속성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세상의 것들은 하나의 분류에 속하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장르 구별은 무의미하다. 가령, 왓챠는 내 영화 취향을 스릴러, 액션 성향으로 분류한다. 처음에 깜짝 놀랐는데 왓챠가 어떤 기준을 사용하는지 몇 편의 영화 분류를 보니 그럴만하겠더라. 아무튼 이 영화는 공상과학 영화로 분류되는데 헛웃음이 난다. 이 영화가 공상과학영화로 분류된 이유는 전적으로 외형적이다. 솔라리스란 행성이 등장하긴 한다. 영화 절반이 솔라리스에 도착한 우주선 안에서 머무는 세 사람의 이야기다. 우주선에서 본 지구의 바다 이미지도 종종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솔라리스 행성과 지구의 바다는 모두 등장인물의 기억을 소환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솔라리스는 비물질적 기억을 물질화하는 통로다. 즉 솔라리스는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와 같다.

 

2.

그럼 타르코프스키는 어떤 기억을 물질화하고 싶어했나. 타르코프스키가 쓴<봉인된 시간>을 좀 들여다보면,

 

"나는 우리 인간들 모두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특별히 인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관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숙고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 안에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을 언제나 무시하여 왔다. 인간은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기만적인 우상들을 쫓아 간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들 중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인간 삶의 밑바닥을 이루는 예의 매우 평범한 기본적 부분-즉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기본적 부분은 인간의 영혼 속에서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인간 실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256)

 

3.

<솔라리스>는  사랑에 관해 말한다. 사랑하는 여인 하리를 잃고 솔라리스란 행성에 고립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닮은 행성인을 사랑하게 된다. 남자는 하리의 환영을 좇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리랑 닮은 여자는 남자의 환영을 알아차리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이를 지켜보던 남자는 윤리적 죄책감과 수치를 느낀다. 김영하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105)라고 말했다. 타르코프스키는 등장인물을 통해 "수치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는 우주탐사를 구원이라고 봤다. 남자는 인류를 대표해서 임무를 수행한다. 남자의 정신적 혼란은 인류가 믿는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인간만이 구원할 수 있다"는 걸 암시한다.

 

4.

타르코프스키는, 인식은 불안과 결핍, 고통과 환멸을 동시에 수반한다고 본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리와 닮아서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의 도덕적 양심이 작용한다. 양심은 비극적일 수 있으며 존재의 불안을 초래한다. 그래서 멀리 있는 우주의 신비가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바다의 움직임을 보는 게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5.

내용은 심오한데 재미있느냐 하면, 영화 상영 시간 절반은 다른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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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2014-10-19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엇, 저 지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솔라리스 너무 재미있게 보고 완전 열광적인 기분으로 돌아왔는데요...ㅠㅠ.. ^^ 대형 스크린으로 봐서인지.. 암튼 인셉션 등의 영화와는 비교가 안 된다는 느낌.. 데이비드 린치라면 모를까요.^^

넙치 2014-10-21 14:11   좋아요 0 | URL
저도 아트시네마에서 봤어요. 재미있으셨다니..음 전 딴 생각 진짜 많이 했어요. 진짜 솔라리스 행성에 있었던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