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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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르네 마그리트전을 하고 있다. 전시회에 갈때마다 인물중심의 회화나 사진, 소품에 한정된 작품들 때문에 차라리 책을 사 볼 걸 하면서 후회를 하고 온다. 결정적으로 지난 번 만 레이 사진전에 갔었을 때다. 많은 작품 수에 다시 한번 속아 설레는 마음으로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역시나 였다. 전시 작품들은 전성기 때를 벗어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마그리트 전 역시나 그럴 것을 확신하고 전시회 대신 책을 읽었다. 그런데 책 역시 만족스럽지 못하다. 마그리트 해설서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있지만 감동을 받을 수는 없다. 사물을 관념화하는 그의 노트나 습작들을 보니 더더욱 그의 그림들로부터는 보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가령, <헤겔의 휴일>이란 그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가 적어 놓은 글을 보자.

"...나는 헤겔(또 다른 천재)이 두 개의 대비되는 기능을 지닌 이 오브제에 대하여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가지 기능이란 어떠한 물도 인정하지 않는(물을 거부하는) 동시에 물을 인정하기도(물을 담는) 하는 것입니다. ..."

마그리트의 이러한 사유체계를 존경하지만 그림을 보고는 아무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림을 보는 내 기준이란 그야말로 시각적 아름다움, 더 그럴듯하게 말하자면 시적 아름다움에 머무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마그리트는 철학적(특히 비트겐슈타인) 사유를 했던 사람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그리고 사물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려는 그의 노력을 닮고 싶지만..그림은..흠.

회화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보다는 현상과 사물의 정반합에 대한 연구가 우선시되는 마그리트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 끌리는걸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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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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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이란 말이 주는 독특한 느낌이 있다. 아련하고, 수줍고, 때 묻지 않고, 그러나 다시는 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그것이다. 사랑 중에서도 '첫사랑'을 떠올리다면 무모하고 논리적이지 않으며 그래서 아쉽지만 기억만으로 평생 흐뭇할 사랑이다.

니체, 쇼펜하우어, 그리고 최근에 알랭 드 보통이 말했듯이,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나 결합이 아니다. 결혼은 사랑을 끝내는 방법이고, 사랑의 완성이란 이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가 이별을 출발점으로 사랑에 대한 단상을 시작했듯이 말이다. 따라서 첫사랑에 실패한다면 완성된 사랑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첫사랑은 완성도 백퍼센트. 첫사랑은 비논리적이었으며 망설이고 자존심을 세워서 상대를 교란시키기도 하며 또 반대로 상대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어 상처받기도 하는 날들이 첫사랑을 하던 시간들 속에 들어있다.

그러나 이제는 첫사랑에 대한 애틋한 기억은 운무같은 형태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읽으면서, 아쉽게도  내가 겪었던 감정이 살아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화자인 블라지미르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화가 버럭난다. 사랑이란 감정이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는 것을 나는 번번이 잊곤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아버지의 연인을 사랑한 블라지미르의 감정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무무>에서 보여준 보잘것 없지만 사랑으로 충만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게라심에게는 존경을 바치고 싶다. 사람마다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과 다르다고 해서 사랑의 깊이를 깍아내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말아야 한다.

 게라심이 무무란 개에게 보여준 사랑은 가슴을 저민다. 벙어리인 게라심이 인간보다는 무무라는 개와 교감을 한다. 이 교감 속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다. 농노제도와 같은 당시의 사회구조라든지 군중의 나약함과 우매함 등등. 군중 속의 고독을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매력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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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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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문학을 잘 모르면서, 또 모르기 때문에  편견을 갖고 있다. 현대 일본 작가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글을 멀리하고 있다.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 작가 정도의 책을 각각 한 권씩 읽은 적이 있을 뿐이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다시 읽었지만 어린 날 내가 무엇 때문에 흥분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 역시 문학이란 영역에서 볼 때, 그닥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는 하루키 유행에 동요하지 않는 걸 내심 기특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소세키의 데뷔작인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이 즐거웠고, 또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일본 문학이란 것이 얼마나 빙산의 일각인지 확인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탈근대 시대에 근대적 취향을 갖고 있다면 퇴행성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에는 매력적 요소가 있다. 계몽을 벗어나 사회를, 현상을 비판하는 날카로움에 나는 번번이 매료된다. 이런 매력적인 근대는 탈근대란 담론 속에서 비판을 받기 마련이다. 당시의 비판적 요소들 속에는 또 다른 권력이 형성되고, 탈근대는 근대성에 자란 권력을 붕괴하고 나아가 약자로 불리는 사회적 약자(여성, 성적 소수자, 장애우 등등)의 권리와 평등에 촛점을 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현재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살아있다기 보다는 근대적이다. 우선 주인공들, 구샤미, 메이테이, 간게쓰는 지식인 계층이다. 그들을 바라보고 비판하는 건 고양이. 이들 지식인이란 작자들이 어떤 사건을 벌이거나 하지 않는 탈서사구조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상당히 현대적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다 난데없이 고양이는 불쑥 친구 고양이들, 또는 운동 하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다. 특히 운동하는 장면은 그림이 떠오를 정도로 경쾌하게 묘사되어있다. 이런 고양이라면 한 마리쯤 키우고 싶다는 실없는 생각도 불쑥 든다.

 주인공들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말씨름일 뿐이다. 중학교 영어선생 구샤미가  지식인 행세를 하는 모습,  즉 서재에 들어가 책 두 페이지를 못넘기고 잠들고 마는 주인을 고양이는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읽으면서 뜨끔하기도 한 장면이다.  간게쓰의 박사 학위를 둘러싼 외부의 시선을 사업가인 가네다네 부인의 태도를 통해 알수 있다.

매끄럽지 않은 줄거리지만 이 책은 줄거리에 집착한다면 형편없는 책으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과관계의 부재는 5백 페이지가 넘는 소설에서 결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게으른 지식인들이 쓴 가면 뒤에 숨겨진 본성, 나아가 스스로 사람답다고 여기는 인간의 이면을 날카롭고 유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고양이의 죽음에서 일종의 체념같은 것이 느껴진다. 물 항아리에 빠져서 올라가려고 바둥거리지만 올라갈 수 없다. 고양이는 마침내 마음을 편히 갖고 아등바등하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죽어간다.

"나는 죽는다. 죽어서 태평을 얻는다. 죽지 않고선 태평을 얻을 수 없다. 나미아미타불, 나미아미타불, 고마운지고, 고마운지고. "라는 고양이의 마지막 말에서 고양이처럼 인식하는 인간은 살기 힘들다는 결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씁쓸한 여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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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낭만주의자 - 위대한 예술가의 초상 4 외젠 들라크루아
외젠 들라크루아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창해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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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을 들어가자 마자 오른 쪽에 혼자 걸려 있는 그림이 있다. 바로 들라크루아의 '사자사냥'. 갈색의 향연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지만 붓질이 만들어낸 역동성이 강하게 전해진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꿈틀거리는 거대한 힘이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것 같다. 들라크루아의 그림들에 강하게 끌리는 이유는 격정적이라는 것이다.

나란 인간이 실제 생활에서는 격정과 거리가 멀기에 격정적 그림이든 글이든, 무조건 반하는 경향이 있다. 들라크루아의 그림들이 갖고있는 경계의 모호함, 색채의 혼재, 근육의 선명함 등으로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단순한 역동성이 아니라 소용돌이 치는 듯한 붓질을 보고 있으면 끌어오르는 뭉클함이 있다. 이리하여 이 책까지 읽게 되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그림 공부 시작했을 때, 친구와 주고받는 편지글, 2부는 일기, 3부는 가장 영양가 있다. <르뷔 드 파리Revue de Paris>지와 <두 세계의 잡지>에 실렸던 평론 모음집이다. 옮긴이 강주헌 씨의 해제에 따르면, 들라크루아는 상당한 독서를 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3부의 평론들은 그의 취향이나 예술관을 엿보기에 좋을 뿐아니라 미술비평글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들라크루아는 글(문학)과 미술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펜보다는 붓이 감정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썼다. 막연히 루벤스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루벤스의 영향을 받았고 내가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는 라파엘로에게 영감을 받았다. 라파엘로 그림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이탈리아에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들기도 한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정말 많고나)

모방은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이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 모방만이 창작의 기본이라고 한다. "새로움은 창조하는 예술가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이지 예술가가 모방하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그의 말은 창작 기본 수칙과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창작이란 영역 역시 근면한 습관이라는 것. 1년이 채 안 되는 모로코 여행을 하는 동안 500장의 그림을 그릴 정도의 열정이 근면의 증거고 습관의 증거다. 그리고는 관습을 어길 수 있는 용기. 그의 그림이 낭만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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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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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에서 마실을 다니다보면 심심찮게 거론되는 이름이 바로 김영하다. 현작가들 소설을 사는 것이 어는 순간부터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해 인터넷 헌책방에 들렀더니 고전에 비해 두 배 정도의 가격을 형성하고 있는 김영하. 새 책과 별반 차이가 없고(한 2천원 정도) 결정적으로 귀찮아서 새 책을 사긴했다. 이 단편집 한 권만 읽고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찝찝함에 장편도 한 권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결국 검은 꽃을 다음 번에 주문하게 될 것이다.

각설하고, 한마디로 이 소설집을 요약한다면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단편의 플롯과 묘사는 과잉으로 넘쳐난다. 난 맥시멀리즘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들은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현작가들에게 가장 고마워하는 점이 바로 이 점이기도 하지만 이 소설집의 책장 넘김은 다른 작가들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의 소설에서 인물들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심리묘사보다는 행동묘사, 특히 사건묘사 중심이다. 사건을 따라가려고 나는 서둘러 문장을 읽어내려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주하게 되는 도시의 비정함 내지는 허무. 장황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중독성 있는' 서사는 그의 장기며 단점이다. 자칫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기 쉬울 수 있는 것이 과잉 플롯인데 마지막에서 던져주는 허무가 빈곤하게만 보이는 사실성을 회복해준다.

<바람이 분다>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게임을 하는 장면.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는 피가 낭자해 흐르는 스크린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게 이끈다.

 <비상구> 역시 피가 흐르는 장르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 박찬욱식 영화를.

<흡혈귀> 뿐 아니라 이 소설집 전반에 걸쳐 그렇지만, 순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건 버티기에서 오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너무 절망적이지 않은가. 그의 말대로 '유독하고 매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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