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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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찾아보니 <마이너리그>는 없었다. 고로 안 읽었을 가능성이 높고, 마침 새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사면 덤으로 주었다.  <마이너리그>를 읽었던 1박2일, 너무 행복했다. 어제 미장원에서 머리말고 있으면서 혼자 낄낄거리고 밤에 졸음으로 내려오는 눈꺼풀을 홉뜨면서 키득거렸다. 오늘 사무실에 나와 노트북만 켜 둔 채 어젯밤 남긴 부분을 마저 읽으며 또 키득거렸다. 남아있는 책장이 줄어들수록 웃을 수 있는 시간도 소멸해가는 것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계속 키득거렸다.

줄거리인 즉, 고등학생이었던 그 유명한 58년 개띠 만수산 4인방이 마흔이 되기까지의 여정이다.  몸으로 사는 인물형(다리를 떤다!)이지만 어딘지 신비한 두환, 대표적인 떠벌이형이면서 대한민국 남자들의 대표격인 조국, 여자를 제외하곤 마음 쓰지 않는 어설픈 바람둥이 승주, 이 세 친구와 만수산 4인방이라는 것에 늘 거부감을 갖고, 나름 자의식이 강한 본인은 수재라고 생각하지만 일종의 잔머리형이라고 할 수 있는 형준의 이야기이다.  이 네 사람 중 사랑스럽지 않은 인물이 없다.

근 이십여년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아주 친근한 이야기들이다. 십대 때 자신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십세, 삼십세가 되면 알 수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십대 때의 나는 서른 이후의 사람에게서 어떤 비장미를 넘어 슬픔을 느끼기 조차했다. 서른이 넘어서 자기 인생에 한 획을 긋지도 못하고 가늘게 살아가는 인생을 버릇없이 가엽게 느꼈었다. 내가 막상 서른이 넘어보니 이 얼마나 무례한 발상이었는지 깨달았다.  사십, 오십이 넘은 삶에는 연민이 없다. 나도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될 것이므로  연민이 있다면 내 삶 자체에 연민이 있다고 할까. 그렇다고 두 손 놓고 목 놓아 슬퍼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단지 그렇단 말이고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생각지 못한 곳에 내가 있을 수 있고, 이제 그런게 인생이지 하는 배짱이 생겼다. 형준이 생각했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멈추고 돌아보니 그렇게 의식없이 보내버린 시간이 쌓여서 바로 자기 인생이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뭐라고? 나는 좋은 인생이 오기를 바라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내가 무턱대도 살아왔던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었다고?"

이 소설 속의 4인방은 나와 같은 보통사람이다. 자기 멋에 살아가고 가끔 고뇌하지만 대체로 헤벌쭉대는 보통사람말이다. 마지막 부분에 있는 두 페이지에 걸친 승주와 조국의 맥락없는, 그러나 모든 우주적 주제에 관한 대화를 읽으면서  박장대소했다. 나와 내 친구들이 나누는 맥락없는 대화같기 때문이다. 통념상 마이너와 메이저란 단어를 사용한다면, 대부분은 마이너에 속하고 마이너들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 지배는 메이저가 하지만. -.- 산을 우거지게 보이게 하는 건 나무가 아니라 이끼나 칡같은 "착생 식물"이라고 말했듯이.

 또한 개인사를 통해 드러나는 군부독재를 관통하는 여러가지 사회배경에 대한 유머와 조롱은 은희경만의 색채이다. 이래서 은희경의 소설은 내게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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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소한 일상 - 다자이 오사무 산문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시공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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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지기인 한 친구는 술 마실 때마다 내게 가식을 벗으라고 말한다.  물론 나는 가식을 싫어하는데 가면 따위를 쓰고 있을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가면이 그 친구에게는 보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게는 보이지 않는데 나만큼 나를 아는 그 친구에게만 보이는 가면은 어떤 모습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곤한다. 가면을 쓰고 있다는 말이 기분 좋을리 없지만 오랜 벗만이 그런 말을 하니 흘려버릴 수만은 없다.

또 나는 이렇게도 대답했다.  내 가식은 어쩌면 독서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책을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일주일 동안 책 한권도 읽지 않고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놓은지 일주일 이상이 지나면, 그러나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책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 아니라 책을 읽지 않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데 대한 자책감이 더 크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늦게까지 책과 씨름하고 있다. 씨름이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즐거움도 있겠지만 고통이 더 크다. 내가 책을 읽지 않는다면 난 내 조건에 만족해하며 훨씬 더 행복감을 느낄거야, 라고 그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가 뭐라고 했는지는 잊어버렸다.

내가 처한 현실과 책 속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책 속의 세계에서 낭만적 감성이나 이상적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경우에는 정의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막상 써놓고 보니, 정의로운 세계란 낭만적 감성이고나. 불의로 가득한 세계에서 희생당한 자들의 고통을 엿보고 나는 무기력하게 보고 또 보기만한다. 현실에서 가까이 있는 이들의 고통에는 의연하면서 책 속에 쓰여있는 고통에는 절망하는 이런 이중성. 이런 것이 내 가면일 수 있다.

다자이 오사무를 사무치게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언행이 일치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면있긴 하지만 그 뽀족함이 부서지기 쉬운 영혼의 울림에서 비롯된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얇고 투명한  유리처럼 안과 겉이 모두 들여다 보이는 글은 가슴에 와서 박혀서 아릿하다. 라캉식대로라면, 그는 결핍을 인식하는 능력을 소유한 실재계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 책은 산문집이라고는 하지만 정돈된 문장이라기 보다는 거침없이 써내려간 일기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나는 고통이라는 가면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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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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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책을 읽는 속도가 늦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시 소설이 잘 안 읽힌다. 이 얇은 책을 5일에 걸쳐 읽었다.  또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자꾸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아는 그가 아니다. 여성작가들의 여성성을 싫어해서 여성작가들의 소설을 잘 안 읽는데 은희경 작가는 예외다. 그의 인물들은 주변을 돌아볼 줄 알고 자기 안에 칩거하지 않는다.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도 그의 인물들은 여전하다. 외롭고 속한 무리에 적절하게 거리를 두고 있고, 작가와 함께 인물들도 나이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부하지도 않는다. 마치 그 인물들에게서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회사가 한창 몸집을 불려갈 시기여서 밤마다 약속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다음날 반드시 제시간에 출근할 만큼 몸도 욕망도 성했다. 요즘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건강관리를 할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술자리가 식상해서라는 게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익숙해지기까지의 절차가 갈수록 귀찮아지는 데 비한다면 거기에서 얻게 되는 신선함이나 정보는 점점 적어였다. 서로의 머릿속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않아서 주고받는 시효짧은 화제 또한 시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에 쓰인 글귀다. 누구나 나이들어가는 과정은 똑같은 것일까?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감탄과 함께 이렇게 꼭 집어서 쓸수있는 작가의 능력에 감히 샘이 난다.  이 단편은 젊은 날의 하루를 기억하는 이야기다. 화자의 경험은 작가의 경험일까, 아님 사귀었던 남자를 관찰한걸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대략 6년 만에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아직까지는)과 통화를 했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난 후에야 그의 목소리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그 후 문자 몇 통을 받았지만 답장을 하지 않았다. 나이들어가고 있는 그가 궁금하기도 하고, 또 나이들어가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도 하다. "두려움도 없지만 설렘 또한 없다.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행복한 것도 아니다." 이 단편의 주인공이 한 말이다.

그러나 가끔 이런 생각은 한다. 우연히 지하철이나 까페 같은데서 마주친다면. 또는 인터넷으로 많은 사람을 찾는 시대인데 혹시 이런 후기를 읽는다면..어떨까? 뭐 이런 잡다한 생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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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 한길그레이트북스 12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차명수 옮김 / 한길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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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주문한 책들은 두껍고 딱딱해서 다 읽지도 못했고, 게으르게 읽었다. 4월에 주문한 책들을 다 처리하지 못한 채 5월이 되자 마자 왕창 또 주문하고..--.-; 늦게 배송되는 한 권 때문에 다음 주에나 주문한 책들이 도착해서 꼬박 일주일이 걸리는 셈이다. 덕분에 새달에 지난 달 책을 대충이라도 읽어볼 수 있기는 했다.

혁명의 시대 역시 거의 600 페이지에  육박하는 두께의 압박으로 꽤나 질질 끌면서 읽었다. 두께의 압박을 이겨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 '랜덤'하게 읽어버렸다.

홉스봄이 글을 전개하는 방식은 <프랑스사>를 쓴 앙드레 모르와나 <상상의 박물관>을 쓴 앙드레 말로를 연상시킨다. 다시 말하면, 다방면에 걸쳐 해박하고 에세이에 가까운 일필지휘 글이 담긴 책이다. <제국의 시대>와 <자본의 시대>도 읽고 싶지만 너무 두꺼워서 일단은 질린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시기를 다루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놀드 하우저가 19세기 문화와 예술의 사회사에서 다루었던 관점과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하우저의 책을 읽은지 십년도 넘은지라 정확한 맥락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부르주아 계급을 탄생시킨 두 혁명은, 소설과 문화의 탄생과 번성의 관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홉스봄 역시 이 점은 동일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와 계급의 관점에서 두 혁명은,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의 승리가 시작되면서 노동 빈민 계급이 출현하는 현대의 사회의 모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당대에도 오랜 교육과 남다른 재능, 기회를 필요로 하는 자유전문업(의사, 법률가, 교수)은 노동자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홉스봄은 재능만으로 출세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사업'이라고 한다. 과연그럴까.. 현대 사회든 19세기든 우리 뿐 아니라 서구 사회도 마찬가지로, 교육이 핵심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타자보다 더 나은 삶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다. 그 삶이  사회적 부를 이루는 성공이든 정신적 풍요를 가져다 주는 자유로움이든 간에. 교육란 명제는 복잡한 얼굴을 지녔다.

또 한편으로 이 시기는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어떤 사조든간에 깊이 들여다보면 그 정체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통감하게 된다. 한동안 낭만주의의 뿌리를 잡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지만 결국 잡지 못했고, 낭만주의라는 것이 사실주의 시대로 넘어오면 진부하지만 고전주의가 만연했던 때, 고전주의 관습을 어기는 일련의 움직이다. 홉스봄이 언급한 낭만주의를 잠시 보면,

"이중혁명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생활 및 예술 양식이지만, 결코 유일한 양식은 아니었다. 낭만주의는 귀족의 문화나 중류계급의 문화를 지배했던 것도 아니며 게다가 노동빈민의 문화를 지배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므로....이데올로적 특징이 분명치 않은 경우인 음악에서 낭만주의를 가장 쉽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낭만주의가 중류계급 문화에 들어오게 된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마도 대체로 부루주아 집안 여자들 사이에서 공상하는 일이 성해진 탓이었다. 자기들을 지루한 여가 속에 있게 해주는 돈벌이 잘하는 남자들의 능력을 보란 듯이 과시하는 것이 그녀들의 주요한 사회적 기능 중 하나였다. 애지중지 아낌을 받는 여자 노예라는 것이 그녀들의 이상적인 운명이었다."

그렇다고해서 부르주아 문화가 낭만주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전혀 일리가 없진 않지만 이렇게 단정적으로 낭만주의를 볼 수 만은 없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은 서구인들이 낭만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낭만주의는 이상향au-dela에 대한 갈망으로 생각하고 몹시 혐오했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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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라이팅 클래식 3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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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중고교 시절에 거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역시 고등학생 때 처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만났다. 차라투스트라를 만난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이다. 고등학생 때 만났지만 별 감흥이 없었고, 모리악으로 석사 논문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조금 더 진지하게 만났지만 음미하지는 못했다. 그 후 지금까지 니체는 언제나 내 마음 속 일순위를 차지하는 철학자라고나 할까. 니체 전집을 모으기 시작했고(읽진 않고-.-) 니체 해설서를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몇 권 읽은 해설서 중 가장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해제에서 저자는 하이데거의 니체, 데리다의 니체, 들뢰즈의 니체란 말을 사용한다. 나는 이 책을 고병권의 니체(고병권이 해석하고 다시 창조한 니체)라고 말하고 싶다.  니체는 어떻게보면 해체주의의 진정한 선구자인 것도 같다. 19세기에 이미 그는 창조를 위한 해체적 삶을 살았고, 글로 남겼다. 벤야민이나 바르트의 글쓰기 방식은 그에 비하면 전혀 새롭지 않다는 걸 재발견!

니체를 그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왜 니체에 마음이 기울고, 종교가 없는 내게 성경과 같은 역할을 했는지. 니체의 권력의지가 충만한 사람을 존경하고, 그런 삶을 동경한다. 존경과 동경이란 말 속에 내 좌표는 드러난다. 존경과 동경은 내가 속해 있지 않은 영역에서 가능하다. 내 존경과 동경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삶을 꾸리는 것이 내 일생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고병권이 다시 그린 니체는 오만하기만 한 니체가 아니다. 오만한 문체에서 이렇게 향이 퍼지는 문체를 찾아낼 수 있는 건 저자가 갖고 있는 니체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사랑은 숨기려해도 숨길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요즘의 내 촉각은, 나도 모르게 저자가 주제에 관한 글을 쓸때, 애정의 정도를 감지하는 데 곤두서 있다. 죽은 인물, 또는 과거의 유물에서 현재를 발견하고 사랑스럽게 껴안는 능력이 지금 내게 절실히 필요하다. 이런 시점에서 읽은 니체는 그 자체로도 좋지만 저자가 바라본 니체, 그리고 그 충만한 애정지수에 듬뿍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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