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매혈기 - 글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킨 한 평론가의 농밀한 고백
김영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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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십대 후반, 그러니까 고등학생으로서 지낸 시절은 학교-집, 집-학교를 반복하는 시계 추와 같았다. 정해진 궤도를 오락가락 하면서 범생이로 얌전히 지냈다. 돌이켜보면, 사춘기 시절의 이유없는(?) 저항의식도 거의 없었던 것 같고, 그렇다고 무언가에 열광하지도 않는 (내가 정말 싫어하지만 내 운명인)그럭저럭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 그럭저럭한 시간 속에 흐물거리는 내 몸과 정신을 단단하게 해 준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책과 영화였다.

공부는 그닥 하지 않으면서도 입시 압박에 시달려 병원을 오가기도 했던 와중에 주말이면 극장에 들락거리곤 했다. 지금은 없어진 헐리우드나 스카라 극장에서 마직막 회 영화를 보고 차가 끊길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영화를 보고 헐레벌떡 마지막 전철을 타고 안도하기도 했다. 또 EBS의 명작영화를 꼼꼼하게 메모하면서 놓치지 않고 영화를 보고 정리를 했다. 그러나 이런 소일거리는 십대를 마감하면서 함께 막을 내렸다. 어린 시절의 이런 사소한 일들이 무의미하진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 시절로 다시 한번 돌아간다면, '팬질'이라는 것도 한 번 해 보고 싶다. 좋아하는 것이 생겼을 때, 나는 온전히 두 발을 빠뜨릴 수 없는데 이런 치명적 결함은 이렇게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지금 영화계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이들만큼 광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았다. 영화잡지를 보지 않아도 괜찮았고 한 감독의 전작을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두루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몰입하는 이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알지도 못하며 좋아하지도 않는 그럭저럭한 취향을 갖게 되었다. 이십 대 때에도 꾸준히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지만 늘 딱 그만큼이었다. 삼십대를 마감해 가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딱 그만큼. 딱 그만큼은 내 본성이고 죽을 때까지 이 수위를 유지할지도 모른다. 제길.

3부로 나누어진 이 책은 영화평론가로 입문하기 까지의 씨네필 과정이 1부를 차지하고 2,3부는 감독론이다. 주관적 감상과 객관적 평가의 적절한 균형이 백미인 김영진 씨의 글을 읽으면서 부러웠다. 그의 열정이 부러웠고, 그의 문장이 부러웠고, 그의 경험이 부러웠다. 그는 이제 쇠락해가는 자신의 열정에 대해 자책하고 있지만 그 자책마저도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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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노트
세르게이 에이젠스쩨인 지음 / 예하 / 199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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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전 쯤에 헌책사랑에서 주문해 놓았던 책이다. 9월 독서는 좀 체계적으로! 하는 슬로건은 역시 백지화되면서 스탕달의 <파르마 수도원>에 시간을 배정했지만 실패했다. ㅠ.ㅠ 스탕달의 문체가 이렇게 거칠었나 하는 의문이 새록새록하고 십대 때 왜 스탕달의 글에 매혹되었을까, 불가사의다. 이런 와중에 감독노트가 눈에 띄었다. 체계적 독서는 커녕 산만하고 즉흥적 독서에 다시 한 번 반성하지만 앞으로도 개선의 여지는 그닥 없어보인다. 자위하자면 스탕달에게 빼앗긴 시간이 약간은 상쇄되었다는 것.

이 시기(1920-30)의 많은 영화들처럼 에이젠스쩨인(에이젠슈타인이라는 영어식 발음으로 알고 있고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러시아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했나본데 적응 안 된다)도 철저한 계획을 통해 쇼트를 찍었다. 그의 몽타주 이론이 탄생한 배경을 알 수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수학을 전공했다. 수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어도 배웠다. 유럽어와 사고 체계가 다른 상형문자를 배우면서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학의 논리적 힘과 일본어의 다른 사고체계가 영화를 만드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시간이 흐른 후에 깨달았다.

영화를 다 보고 읽으면 더 좋았겠지만 명작은 운이 없는 법이다. 회자되는 덕분에 다 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몇 장면 밖에 보지 않았다는 것. 디비디를 갖고 있으면서도 보지 않는다는 것. 책은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왜냐하면 제작 과정을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일은 완성품인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 영화보기까지 이루어져야 사실 감독노트의 독서 과정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의 창조적 예술관은 우선 예술에 완전히 숙달해서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파괴는 없애거나 왜곡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작가는 관객의 개성을 지배하지 않고 창조적 행위로 관객을 이끌어서 작가의 세계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한다고 한다. 즉 관객과 작가의 유기적 관계가 이루어져야 창조적 예술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이 말은 예술 장르를 초월해서 모든 예술에 적용된다. 작가가 독자/관객의 위에서 설명하거나 주장을 강요하는 작품에는 등을 돌리게 된다.

그의 다음 말은 예술을 숙달하는 과정에 관한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착취자로 삶을 시작한다. 아홉 달 동안 우리는 생명의 필수양분을 어머니한테 얻는다. 그 뒤 몇 달동안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양육된다. 우리의 생물학적 단계에서 어린 시절은 착취와 소비의 시기이다. 이 기간이 지속되는 동안 이는 시의적절하며 편안하다. 그러나 이 시기가 자연스런 한계를 넘어서면 이는 역겹고 또 바보에게나 어울리는 짓이다...."

나는 아직도 이 단계에 머물고 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예술을 소비만 하는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 에이젠슈타인이 제시했던 성숙한 단계, 즉 "예술을 숙달하고 수료해서 파괴하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빼앗지 않은 게 희망아닌가. 지금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불안이 체세포 하나하나에 스며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항체를 투여하며 싸우고 있다. 10월도, 11월도, 12월도..해가 바뀌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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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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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의 스승인 아이스퀼로스Aischylos의 <아가멤논>과 <코에포로이>가 함께 있는 판본이지만 난 소포클레스의 두 작품만 읽었다. 내 스스로 고전 희곡을 다시 읽게 될지는 전혀 몰랐다. 희곡, 특히 고전 희곡이라면 치를 떨었다. 딱히 별다른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 명문집anthology란 제목을 단 강독 때문이었다. 문학사적으로 위대한 작품들을 맥락없이 발췌해서 읽어야했던 명문들은 그야말로 고문 중의 고문이었다. 어려운 고어와 운율에 신경쓰다보면 명문의 아름다움은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철이 들어(?) 자발적으로 명문을 찾아다니다니 그리스 비극식대로 표현하자면 내가 비켜갈 수 없는 신탁이었을까,하는 과대망상을 갖고 천천히 비극들을 음미해 보았다.

오이디푸스를 세계적으로 알린 사람은 아마도 프로이트일 것이다. 고로 나 역시 프로이트가 만들어낸 오이디푸스에 익숙해져 있다. 다시 말하면 프로이트의 해석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본 오이디푸스는 호기심의 대마왕이다.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고자 하는 욕구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했다.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호기심을 추적한 오이디푸스는 결국 치유할 수 없는 자멸의 길로 이른다. 코로스Choros의 대사를 빌리면, "그대야말로 자신의 운명과 운명에 대한 투시력 때문에 불행해졌나이다." 여기서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자신의 의지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지위-왕이며 가족을 갖고 있는-에 만족하고 호기심을 갖지 않았더라면 출생의 비밀은 간과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이디푸스의 딸인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보다 더 강한 인간의 의지를 실행하는 인물이다. 여시 코로스의 말 중, " 그대(안티고네)는 자신의 뜻대로 살다간 인간들 중에서 유일하게 산 채로 하데스로 내려가는 것이오."이란 말 속에서 불멸을 상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왕, 즉 국가의 법과 가족의 법 중에서 가족을 택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옳다는 확신을 잃지 않는 강인한 인물이다. 이런 면에서 현대적 인물과 맞닿아있기도 하다. 국가의 권위란 개인의 안녕을 위협한다면 존재가치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흥미로운 인물은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이다. 그는 왕인 크레온의 아들이기도 한데 절대적인 안티고네의 지지자로 아버지의 의견에 반대해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인물이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셰익스피어가 사랑이라는 범주로 한정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신과 인간 의지의 충돌이다. 그러니까 14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의 고민은 이미 훨씬 이전에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포클레스가 아직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인간의 의지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짐작해본다.

오늘날,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건 '왕따'로 사는 걸 감수해야 한다. 오늘날 직장이라는 이익집단은 고대 도시국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보스의 말은 법이며 복종해야한다. 보스와 생각이 같지 않더라도 말이다. 내 신념을 고집하는 건 그 집단을 떠날 각오를 해야하는 것이지만 안티고네와 같은 확신이 없다. 다른 집단으로 이동한다해도 비슷한 규칙이 나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비극 속 인물들이 극단적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이런 뫼비우스의 띠를 간파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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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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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모는 12살 때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 구실은 온갖 끔찍한 재료들로 음식을 만들어 먹게 만드는 누나와 아버지 때문이었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나무 위를 고집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가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이상들을 위해 오래전부터 나무 위에 살고 있소. 하지만 난 아주 좋아요." 

어린 시절 누구든 가출을 하고 싶은 충동을 한 번씩은 경험 해 보았을 것이다. 미성년 때는 부모님이 정해 준 법과 학교가 정해 준 법 테두리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사소한 일에 반항심이 들기 마련이다.

찬바람만 나기 시작하면 나는 편도선이 붓고 목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리하여 겨울만되면 목도리로 목을 두르고 답답한 털모자와 장갑, 그리고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는 대문 밖에 나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눈만 내 놓은 내 모습은 눈사람 같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몸을 휘감고 있는 털실의 느낌이 싫었고 답답해서 속이 메슥껍기까지 했다. 그래서 한동안 했던 저항은, 대문 밖을 나서면서 모두 벗어서 가방 속에 넣었다. 집에 돌아오면 대문 앞에서 나올 때처럼 다시 완전무장을 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편도가 조금 더 붓기는 했지만 '나는 아주 좋았다'. 내 나무 위의 생활이라면 생활이었다. 그러다 그렇게 하는 편이 내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반항을 멈추었다. 어린 코지모나 내게 필요했던 것은 당위성을 인식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안락한 침대를 버리고 아늑한 집을 나와  코지모가 선택한 나무 위. 그곳은 관습에 복종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본문 속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코지모의 마음 속에는 사람들 밖에 없었다. 그는 다르게 살기를 열망했지만 그가 속한 사회를 떠날 수 없었다. 사람들을 돕고 보람을 느끼며 사랑의 기쁨과 고통을 경험하기도 하며 혁명과 전쟁의 이중성을 깨닫기도 한다. 나무 위에서 그는 땅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격렬하게 그 모든 사건의 핵심에 있게 된다. 그는 나무 위에 있었지만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고 적극적으로 살았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구조는 코지모의 동생이 회상하는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내가 코지모의 나이가 되어서 내 지나온 삶을 회상할 때 코지모처럼 난 내 이상을 위해 살았지만 아주 좋아,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나무 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더 갇힌 집에 살고 있는건 아닌지..,하는 생각이 살금살금 들면서 책을 읽으면서 자신감이 축나고 있다.

덧. 이 소설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서사시이다. 디드로의 <백과사전>을 읽은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코지모를 통해 계몽주의에 대한 칼비노의 생각을 비롯해서 프랑스 혁명, 예수회와 얀센주의에 대한 종교적 태도 등등 많은 역사관을 동시에 읽을 수 있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드러나는 사건을 읽을 때마다 괴로우면서 정말 웅대하고 과잉으로 가득한 구조에 숨이 막혔다. 분명히 훌륭한 소설이지만 내 취향이 절대 아니다. 배경이 현란하고 사건이 꽉 차 넘치는 이런 소설이 너무너무 싫다. -_- 칼비노 작품은 이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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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꽃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6
노발리스 지음, 김재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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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발리스가 프랑스 작가인 줄 알았었다.-.- 낭만주의 시기의 작품들은 형식이나 스타일 측면에서 현대문학과 비슷하다. 탈내러티브, 시와 산문의 변주,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 등 여러가지로 포스트모던하다.

내용면에서 대체로 진리를 묘사하고 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교훈적이다. 해설을 읽었더니 교양소설이란다. 읽는 내내 파울로 코엘료의 책이 떠오른다. 그러나 코엘료의 문장들보다 성찰적이고 사실적이다.

그래도 밑줄은 정말 많이 그었다. 주로 자연에 대한 묘사들인데 강렬하고 회화적이다. 언어로 그림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한줄씩 읽어가면서 머리 속에서 시키는대로 색칠을 해 나가게 된다. 노발리스가 이끈대로 완성된 그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큼 강한 힘을 지닌다. 화형용 장작더미의 불꽃 묘사를 보면,

"태양은 분노로 시뻘게진 얼굴로 하늘에 떠 있었습니다. 장작더미의 힘찬 불꽃은 탈취해 온 햇살을 빨아먹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자신의 빛살을 잡아두려고 해도, 태양은 점점 더 창백해졌으며 얼룩덜룩한 반점이 생겼습니다. 불꽃이 더욱 힘을 얻고 하얗게 빛날수록 태양의 빛깔은 점점 더 퇴색되었습니다. 불꽃은 더욱더 세차게 햇살을 빨아먹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의 광휘는 다 먹히고 말았습니다. 태양은 이제 흐릿하게 빛나는 원판모양으로 남은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태양이 자꾸만 질투하거나 버럭 화를 내면 도망치는 햇살의 물결만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태양은 시커멓게 타버린 찌꺼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찌꺼기는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장작더미의 불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해졌습니다. 화형용 장장더미는 다 타고 없었습니다. 불꽃은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갔습니다."

한낮의 태양 속에 강렬한 불꽃 묘사를 이 보다 더 생생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양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불꽃의 강도와 죽음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낭만주의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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