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노트
세르게이 에이젠스쩨인 지음 / 예하 / 1991년 8월
평점 :
품절


일년 전 쯤에 헌책사랑에서 주문해 놓았던 책이다. 9월 독서는 좀 체계적으로! 하는 슬로건은 역시 백지화되면서 스탕달의 <파르마 수도원>에 시간을 배정했지만 실패했다. ㅠ.ㅠ 스탕달의 문체가 이렇게 거칠었나 하는 의문이 새록새록하고 십대 때 왜 스탕달의 글에 매혹되었을까, 불가사의다. 이런 와중에 감독노트가 눈에 띄었다. 체계적 독서는 커녕 산만하고 즉흥적 독서에 다시 한 번 반성하지만 앞으로도 개선의 여지는 그닥 없어보인다. 자위하자면 스탕달에게 빼앗긴 시간이 약간은 상쇄되었다는 것.

이 시기(1920-30)의 많은 영화들처럼 에이젠스쩨인(에이젠슈타인이라는 영어식 발음으로 알고 있고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러시아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했나본데 적응 안 된다)도 철저한 계획을 통해 쇼트를 찍었다. 그의 몽타주 이론이 탄생한 배경을 알 수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수학을 전공했다. 수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어도 배웠다. 유럽어와 사고 체계가 다른 상형문자를 배우면서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학의 논리적 힘과 일본어의 다른 사고체계가 영화를 만드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시간이 흐른 후에 깨달았다.

영화를 다 보고 읽으면 더 좋았겠지만 명작은 운이 없는 법이다. 회자되는 덕분에 다 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몇 장면 밖에 보지 않았다는 것. 디비디를 갖고 있으면서도 보지 않는다는 것. 책은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왜냐하면 제작 과정을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일은 완성품인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 영화보기까지 이루어져야 사실 감독노트의 독서 과정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의 창조적 예술관은 우선 예술에 완전히 숙달해서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파괴는 없애거나 왜곡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작가는 관객의 개성을 지배하지 않고 창조적 행위로 관객을 이끌어서 작가의 세계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한다고 한다. 즉 관객과 작가의 유기적 관계가 이루어져야 창조적 예술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이 말은 예술 장르를 초월해서 모든 예술에 적용된다. 작가가 독자/관객의 위에서 설명하거나 주장을 강요하는 작품에는 등을 돌리게 된다.

그의 다음 말은 예술을 숙달하는 과정에 관한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착취자로 삶을 시작한다. 아홉 달 동안 우리는 생명의 필수양분을 어머니한테 얻는다. 그 뒤 몇 달동안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양육된다. 우리의 생물학적 단계에서 어린 시절은 착취와 소비의 시기이다. 이 기간이 지속되는 동안 이는 시의적절하며 편안하다. 그러나 이 시기가 자연스런 한계를 넘어서면 이는 역겹고 또 바보에게나 어울리는 짓이다...."

나는 아직도 이 단계에 머물고 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예술을 소비만 하는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 에이젠슈타인이 제시했던 성숙한 단계, 즉 "예술을 숙달하고 수료해서 파괴하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빼앗지 않은 게 희망아닌가. 지금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불안이 체세포 하나하나에 스며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항체를 투여하며 싸우고 있다. 10월도, 11월도, 12월도..해가 바뀌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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