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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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모는 12살 때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 구실은 온갖 끔찍한 재료들로 음식을 만들어 먹게 만드는 누나와 아버지 때문이었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나무 위를 고집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가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이상들을 위해 오래전부터 나무 위에 살고 있소. 하지만 난 아주 좋아요." 

어린 시절 누구든 가출을 하고 싶은 충동을 한 번씩은 경험 해 보았을 것이다. 미성년 때는 부모님이 정해 준 법과 학교가 정해 준 법 테두리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사소한 일에 반항심이 들기 마련이다.

찬바람만 나기 시작하면 나는 편도선이 붓고 목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리하여 겨울만되면 목도리로 목을 두르고 답답한 털모자와 장갑, 그리고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는 대문 밖에 나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눈만 내 놓은 내 모습은 눈사람 같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몸을 휘감고 있는 털실의 느낌이 싫었고 답답해서 속이 메슥껍기까지 했다. 그래서 한동안 했던 저항은, 대문 밖을 나서면서 모두 벗어서 가방 속에 넣었다. 집에 돌아오면 대문 앞에서 나올 때처럼 다시 완전무장을 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편도가 조금 더 붓기는 했지만 '나는 아주 좋았다'. 내 나무 위의 생활이라면 생활이었다. 그러다 그렇게 하는 편이 내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반항을 멈추었다. 어린 코지모나 내게 필요했던 것은 당위성을 인식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안락한 침대를 버리고 아늑한 집을 나와  코지모가 선택한 나무 위. 그곳은 관습에 복종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본문 속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코지모의 마음 속에는 사람들 밖에 없었다. 그는 다르게 살기를 열망했지만 그가 속한 사회를 떠날 수 없었다. 사람들을 돕고 보람을 느끼며 사랑의 기쁨과 고통을 경험하기도 하며 혁명과 전쟁의 이중성을 깨닫기도 한다. 나무 위에서 그는 땅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격렬하게 그 모든 사건의 핵심에 있게 된다. 그는 나무 위에 있었지만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고 적극적으로 살았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구조는 코지모의 동생이 회상하는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내가 코지모의 나이가 되어서 내 지나온 삶을 회상할 때 코지모처럼 난 내 이상을 위해 살았지만 아주 좋아,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나무 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더 갇힌 집에 살고 있는건 아닌지..,하는 생각이 살금살금 들면서 책을 읽으면서 자신감이 축나고 있다.

덧. 이 소설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서사시이다. 디드로의 <백과사전>을 읽은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코지모를 통해 계몽주의에 대한 칼비노의 생각을 비롯해서 프랑스 혁명, 예수회와 얀센주의에 대한 종교적 태도 등등 많은 역사관을 동시에 읽을 수 있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드러나는 사건을 읽을 때마다 괴로우면서 정말 웅대하고 과잉으로 가득한 구조에 숨이 막혔다. 분명히 훌륭한 소설이지만 내 취향이 절대 아니다. 배경이 현란하고 사건이 꽉 차 넘치는 이런 소설이 너무너무 싫다. -_- 칼비노 작품은 이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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