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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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주문한 책들은 리뷰를 쓰기 위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야하는 책들이다. 박노자의 <만감일기>와 존 버거 책은 에세이로 특히 더 그렇다. 그래도 3월 첫 리뷰를 존 버거의 책으로 채워보면,

원제가 표지에 쓰여 있듯이 <Photocopies>이다. 글로 쓴 사진이란 우리말 제목 그대로다. A4 1장 남짓한 분량으로 존 버거의 기억 속 풍경을 선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인상적 꼭지는 세 부분이다. 여든 여섯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의 만남을 회상하는 글. 군복무를 하고서 처음 라이카를 사서 평생 그 카메라를 고집했던 그가 사진에 대해 한 말. "사진은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무의식적 영감이다.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붙든다." 모든 예술의 기본적 자세는 끝없는 응시렸다.

다음은 전구를 그리는 무명 화가 나나 로스티아 이야기. 80년대 생 미셸 대로에서 크레프를 팔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의 그림에 대한 분위기 묘사에서 고흐의 초반 스케치들이 떠오른다. 거칠고 뭉툭하지만 따뜻한 느낌.. 그의 그림이 액자에 담겨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지만 평단에서 영향력이 있다는 세간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을 팔도록 도와줄 방법을 모른다. 그의 그림이 팔리는 걸 도와주지 못하는 무기력에 좌절하는 마음도 이쁘고 그런 것에 사심이 없는 로스티아도 이쁘다. 전구 그림을 보면 이제 존 버거의 이 글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은 식사 장면 묘사이다. 둘 다 호화로운 식사였는데 하나는 겉도는 식사. 이런 밥을 먹는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그 기분이 어떤지 알기에 그의 문장 하나씩 다시 읽었다. "겉으로는 살아서 맛보고 삼키며, 입을 닦고, 말짱한 정신으로 웃고 즐기며, 뭔가를 기억해내려하며 얘기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또한 황폐해져 사공(웨이터)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세상에 정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감동적인 식사였다.

존 버거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사진들이야 말로 끊임없는 응시가 무엇인지 모범을 제시한다. 오늘 사무실에 오는 길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사소한 일이지만 감정이 썩 좋지않았던 터라 불쾌하다고 직설적(내 주특기기는 하지만)으로 그리고 비교적 장황하게 말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기 위해 나는 인내심부터 길러야한다. 말해놓고 후회스럽다. 꼭 그렇게까지 깐깐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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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 그림 속 세상으로 뛰어든 화가 내 손안의 미술관 2
토마스 다비트 지음, 노성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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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몰리뉴가 쓴 렘브란트를 읽고 그닥 흡족하지 않아 또 주문했다. 이 책을 주문하면서 저자가 렘브란트 그림에 초점을 맞추어 그림을 읽어주길 원했다. 사실 19세기 인전의 회화들은 성서를 모르면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감상의 즐거움도 반감된다. 고로 나 같은 사람들이 즐기기 쉽지 않단 말이다. 이미지 과잉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에 이야기 없는 이미지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감탄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그림 읽어주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존 몰리뉴의 서술방식과 비슷하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사회상을 한 챕터로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회 컨텍스트 관점에서 기술한다. 존 몰리뉴가 당시 암스테르담을 기점으로 피어난 자본주의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이 책의 저자 토마스 다비트는 자본주의의 번성이 가져다준 부작용에 대해 언급한다. 소비가 정점에 이르면 퇴폐와 퇴락이 손을 잡는 건 인간사회의 본성이 아닌가. 렘브란트의 파란만장한 삶은 한 세기의 사회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화가가 갖는 상상력에 많은 이야기를 한다. 회화가 시각예술이니까 글을 쓰는 것 보다는 상상력을 덜 필요할 거란 어리석은 생각을, 지금까지 해왔다. 첫 챕터에서 <벨살사 왕의 연회>를 읽다보면 머리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재현하는 일은 타고나지 않으면 정말 힘든 일이란 생각이 든다. 렘브란트가 태어나기 전 화가인 카렐 반 만데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팔, 다리, 머리, 몸뚱이를 훔쳐라. 화가는 남몰래 남의 것을 훔치는 직업이라네. 존경받는 화가는 밝은 눈을 가져야 한다네. 남의 재능을 깡그리 털어놓고 가마솥에 휘휘 저어서 맛깔스런 잡탕을 끓여내야 한다네."

비단 그림만이 아니라 모든 창작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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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en Brothers: Interviews (Paperback)
Coen, Joel / Univ Pr of Mississippi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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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외서 확충에 신나서 질렀다.-.- 대충 살펴봤는데 제목 그대로 인터뷰 모음이다. <Positif>, <Vogue> <Premiere> 등 각종 영화 잡지에 실렸던 짧막한 인터뷰들을 한 곳에 모은 책이다. 나처럼 게으른 이를 위한 종합선물 세트다. 뉴욕 유니언 스퀘어에 있는 헌책방에서 코엔 형제 책을 두 권 찾아서 내 서가에 고이 모셔만 두었다.

The Coen Brothers: The Life of the MindThe Coen Brothers

이 두 권인데 코엔 형제가 만든 영화들에 대한 글 모음집이다. 간략한 생애가 있지만 주로 작품 분석이어서 일독할 의욕이 희미하다. 그런 와중에 신간인 인터뷰집이 알라딘에 있다니 어찌 품에 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읽지도 않으면서 코엔 형제의 책에 욕심을 내는 이유가 그들의 영화를 몹시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화를 이번에 보면서 몇 편만 좋아하는 걸 발견했다! 그들과 그들의 영화에 관한 글을 써볼까 작정했었는데..흠..

코엔 형제는 개인적 인터뷰를 안하기로 유명해서 개인적 삶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것도 이 인터뷰집을 냉큼 사들인 이유다. 워낙 짧은 분량의 글들이라 겹치는 내용도 많은 것같다. 같은 영화에 대해 인터뷰어만 바뀌니 피할 수 없는 반복일 수도 있겠다.

이런 점을 이해하고 가볍게 읽는다면 생각보다 건질 게 많을지도 모르겠다. 독자입장에서 인터뷰이만큼 중요한 게 인터뷰어이다. 인터뷰어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인터뷰의 내용이 달라지니까. 재미있는 건 98년 3월, Doug Stone이 한 인터뷰. 제목이 The Coen Speak (Reluctantly)이다. 세 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인데 마지못해 하는 인터뷰 시작이 이렇다.

"인터뷰어-프린스턴에서 철학을 전공했는데 영화를 만드는 철학은 뭐야?  이단 코엔-우-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도 모르겠어. 지금까지 깨달은 건 하나도 없어. 이건 헛다리 집는 건데."

사실 이런 질문은 의례적이지만 관객이나 비평가의 입장에서 무척 궁금하다. 도대체 감독의 두뇌구조는 어떨까, 저 장면은 왜 들어간 걸까.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겠지..하는 등등의 잡다한 생각을 감독들에게 물어보면 대체로 이단 코엔처럼 대답하기 일쑤다. 맥 빠지는 일이지만 감독들은 그래서 더 신비해 보인다. 철학이 없다는데 철학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를 만든다. 내가 그들의 영화를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유는 이 점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아니라는데도)

작업 스타일을 읽다보면 두 사람은 두 몸을 지닌 한 사람의 머리처럼 보인다. 우리가 흔히 하듯이 몸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실 없는 소리가 이들에게는 전혀 허무맹랑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몸 하나로 할 수 없는 잡다한 일을 두 개의 몸이 하고 있다니 불가사의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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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적인 삶 - 제100회 페미나 문학상 수상작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 / 밝은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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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베스트 셀러 소설책들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3분의 2쯤 읽었을 때 후회했다. 사서 읽을걸 하고. 지금이라도 주문할까 했지만 한 번 읽은 소설들은 두 번 읽게 되질 않으니 소유욕을 자제하는 게 의젓해 보인다. 장폴 뒤부아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제목 때문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소녀적 감수성을 판매전략으로, 일주일 간의 휴가 내지는 체류를 경험한 이들의 감상적 환상에 봉사하는 '프랑스적인' 어쩌구 저쩌구하는 허섭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책들이 나오면 서점에서 기웃거리며 내가 알고 있는 세계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대조해보는 취미를 갖고 있지만-.-) 이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다 제목 때문이다. Une vie francaise=a French life지만 소설의 내용대로라면, 한 프랑스인의 삶이라고 해야 작가의 의도에 더 가까이 간걸거다. 번역자가 이를 모를리 없을 것이고, 프랑스 더 정확히 말하면, 파리의 화려함에 대한 환상을 부추길 수 있는 제목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외면해왔으니 약간 억울한 마음에 제목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놨다.

한 프랑스인이란 바로 폴 블릭이다. 간혹 블록이라고 오해를 받기로 하는 사람. 그는 "남아도는 정자로 인해 태어난 신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일어난 배란의 실수" 였다. 이렇게 태어난 그는 소설의 화자로 54세이고 "삶에 대한 두 가지 전망 사이에서, 모순되는 두 세계 사이에서 망설이는 거북한 나이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에는 세월에 따라 주름이 늘어가며 규칙적으로 칼슘과 협심증 치료제를 복용하고, 담배를 끊고 혼자 살며 혼자 저녁을 먹고 혼자 늙어가고" 있다. 54년을 살면서 겪은 여러가지 일상적 일들 속에 유독 죽음을 목도하는 빈도가 높다. 첫 챕터 드골 시대에 형 뱅상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장 시라크의 장에서는 숨 쉬고 있지만 죽어있는 딸의 모습으로 끝이난다.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 아내 안나의 사고사 등. 프랑스라는 한 국가가 여러 대통령을 맞이하면서도 진보이라는 말과는 별개일지라도 계속 존재하는 것처럼, 소심하고 현실세계 밖에 위치했던 폴 블릭에게 가족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죽었지만 아들과 딸이 살아 있고, 아들의 아들이 태어나서 블릭家는 지속된다.  

지난날 위풍당당했던 드골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68혁명이 일어나고 교활한 미테령도 사라졌듯이, 좌파 운동을 하던 팔딱거리던 심장을 지녔던 20대의 폴 블릭은 희미해지고 어쩌면 자신의 문제 밖에는 관심이 없는, 느리게 유영하는 50대의 폴 블릭이 되었다. 더 나이가 들면 앞서 사라진 정권자들처럼 그도 아들에게, 손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그들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게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염세적이지만 비관적이진 않는 게 폴 블릭의 매력이라고나 할까. 한 사람의 삶을 글로 적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있다면 폴 블릭의 세상살이보다 결코 무게가 적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서술할 능력이 불행히도 없다. 대신 뒤부아의 폴 블릭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뿐이다.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삶, 요것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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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와 혁명 - 혁명적 예술가 3
존 몰리뉴 지음, 정병선 옮김 / 책갈피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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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렘브란트의 그림에 관한 미학적 분석이 아니라 렘브란트가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 역사책이다. 이 책을 집어들면서 본래 의도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알려고 했지만 17세기 자본주의가 번창했던 네덜란드 역사 이야기도 나쁘지 않았다. 단 도판이 생뚱맞다. (내 생각에) 출판사에서 글 속에 나오는 그림들을 무작위로 실은 것 같다. 저자가 생뚱맞게 도판을 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역사를 통해 서구인들이 강하게 보여주는 연대감의 뿌리가 늘 궁금했었는데 요한 호이징가의 말에서 작은 뿌리 하나를 건졌다. "네덜란드 민중의 단결은 그들의 부르주아적 성격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우리 네덜란드인은 모두 부르주아이다....삶에 대한 부르주아적 관념을 모든 계급, 모든 사회집단이 공유하고 있다....자신의 일이 방해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부르주아적 기질이 우리의 선조들로 하여금 에스파냐에 대항해 봉기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호이징가가 지칭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자본의 유뮤에 기초한 게 아니라 집단적 이익에 기초한다. 이 책의 저자 존 몰로뉴는 네덜란드 민족주의는 혁명의 결과고 혁명은 계급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가 혁명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17세기 네덜란드는 참으로 역동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계급의 문제가 어제 오늘의 문제는 물론 아니지만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이전에 자본주의 형태가 어땠는지 스케치해 볼 수 있다.

렘브란트의 생애에 관해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러니까 추측된 것이라는 것. 재능있고 야심있던 한 젊은이가 사치스러워서 파산했다는 줄거리인데 개인적 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단다. 정황으로 파악해 일대기를 구성한 글이 실제처럼 돌아다니는 우리시대는 조금 무섭기도 하다.

저자는 렘브란트의 작품을 두고 이데올로기에 갇히거나 보편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렘브란트의 양면성 즉, 부르주아로서의 측면과 반부르주아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지만 지면의 한계 때문인지 설득적이기 보다는 '보편적' 시각처럼 여겨진다. 그림에 대한 주관적 견해가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것도 약간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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