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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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궁금하다. 요즘 십대들, 특히 고등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돌이켜보면, 십대 때 많은 생각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여물지 않아 공중에서 흩어지고 부서지는 그런 그림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도 같다. 입시를 앞두고 스트레스 때문에 병원을 들락거리며 가끔 영화보고 소설읽는 것으로 낙을 삼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갈망했던 시기기도 했던 것 같다. 완득이를 보면서 내 십대를 꺼내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십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인지 완득이의 심드렁한 태도가 어떤 때는 아이 같지 않기도 했다. 십대 때도 자신만의 우주가 있을텐데 나는 자꾸 기성세대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래, 난 늙었구나.

2. 또 궁금하다. 요즘 십대들은 무슨 성장 소설을 읽을까. 난 얄개 시리즈를 읽기 시작해서 수 타운샌드의 <비밀일기>를 탐독(?)했었는데. <비밀일기>의 주인공(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쩝) 역시 심드렁한게 완득이란 닮았다. 아바를 즐겨듣고 제인 오스틴을 읽었던 영국 남자 아이였는데. 이 아이 때문에 제인 오스틴을, 나도 처음 읽었다. 완득이 때문에 킥복싱 배우러 찾아가는 십대도 있을까? 십대들이 완득이를 많이 읽을까? 십대들이 완득이의 정신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3.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쓰는 재주를 가진 작가는 대단하다. 소설은 다른 어떤 장르의 글쓰기보다도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 뻔한 이야기를 독특하게 전달해주는 방법에 따라 독자는 울고 웃는다. 완득이를 읽으면서 내내 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어제 잠자리에서 읽은지라 오늘 하루종일 눈이 부어 뻑뻑했다. 완득의 독백 속에는 웃음이 양념처럼 배여있다. 처음에 양념맛을 보고 웃다보면 진짜 맛을 느끼는 데 이게 참, 눈물을 뺀다. 각종 아이러니한 상황에서도 완득이는 한탄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아직 순수해서 그럴까. 이십대를 위한 소설은 쓴 맛이 나는데 말이다. 착한 사람들만 나와 현실감이 없긴 하지만 그게 완득이의 매력이다. 거짓이일지라도 희망을 심어주는 책이 희망을 잃어버린 어른에게도 가끔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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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연못 2008-11-28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일기 주인공 --> 애드리언입니다 ^^

넙치 2008-11-29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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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맥카시의 책은 처음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읽지 않았다. 영화의 함축적 풍경들이 글로 부서질까봐 책을 읽는 게 두려웠다. 프랑스 누벨 바그 시절 영화화된 하드 보일드 미국 소설이 별 매력이 없듯이, 그럴 거란 짐작만으로. <로드>는 알라딘 메인의 힘이 크다. 며칠 내내 노출시킨 출판사의 의도를 기꺼이 따라 별 기대없이 주문했다. 이따금씩 타인의 의도를 따라 별 기대를 하지 않을 때 기쁨이란 걸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책을 읽고 찾아 본 맥카시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삼십 대에 아들을 갖는 건 평범한 경험이지만 그의 나이에 아들을 갖는 건 특별한 일이다. 삶에 대한 중압감이 있지만 삶의 기쁨이기도 하다고. 이 책은 그가 아들을 위해서 썼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지친 영혼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33년 생인 그가 보는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첫 장부터 끝까지 죽음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얼어붙은 길가 냇물 건너편의 벤치 같은 땅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바람이 얼음에서 재를 날렸다. 얼음은 시커멨고 냇물은 숲을 구불구불 통과하는 현무암 길처럼 보였다." 곳곳에 얼음이고 재가 날린다. 때로는 오솔길을 혼자 헤메기도 한다.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장애를 만나면 남자가 소년을 지킨 것처럼 자신을 위해 손에 피를 묻혀야 할 때도 있다.

미국의 건국 이념에 깔린 신에 근거하는 세계는 항상 낙원은 아니다. 신도 언제나 자비로운 인물은 아니다. 자신의 말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에게 수치심을 벌로 주었고, 말 안 듣는 인간을 다 쓸어버리는 대홍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 판도라에게는 희망이라는 벌을 내렸다. 소설 속 남자는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을 말해준다. 악에는 폭력적 대항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가. 신이 그랬듯이 지극히 주관적이다.

이 소설의 큰 축은 남자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소년을 구하기 위해 선과 악을 판단한다. 남자와 소년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악이다. 소년은 끊임없이 남자에게 묻는다. 우리는 죽나요? 사람을 죽일건가요?하고. 소년에게 악이나 공포는 희미하다. 남자가 소년을 위해 보호하기 위해서 한 행동 때문에 오히려 소년은 악과 공포를 학습한다.

남자는 세계를 어둠으로 단정한 상태에서 살아간다.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일이 가장 용감하다고 여기고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의 세계는 이렇지만 남자는 소년에게만은 행운과 희망을 심어주려고 한다. 어쩌면 내가 행운과 희망을 믿고 싶기 때문에 결말에서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주검을 뒤로하고 낯선 사람이 내민 손을 잡는 소년의 마음, 즉 두렵지만 낯선 사람과 더불어 혼자 죽은 아버지가 지켜낸 실존적 자세를 유산으로 받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남쪽으로 걸어가야하는 여정. 소년은 이 여정이 고단하다는 걸 모른다. 더 이상 소년일 수 없는 나는 이 고단함에 체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고 싶다. 잠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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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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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축업 중 소라는 카테고리에 한정시켜 살펴보는 세계사다. 고대 소의 신화적 의미에서 출발해서 미국 서부개척기를 거쳐 포디즘에 이르러 소는 이윤 추구의 대상이 된다. 소가 우리와 다름 없는 유기체라는 걸 무시한 채 소비 대상으로만 간주하고 있다. 그가 육식의 종말을 고하는 말에 귀 기울이면,

"자연 세계에서는 생산성productivity이 아닌 번식력generativeness이 지속 가능의 척도가 된다. 번식력은 삶을 긍정하는 힘이고, 그 본질은 유기체적이며 그 목적론은 재생이다. 반면에 산업 생산은 종종 죽음의 힘이고, 그 본질은 조작 가능한 물질이며 그 목적론은 소비이다. 경건한 번식력에서 관리되는 생산성으로 변한 인간과 소의 관계에는 자연 질서와 우주 계획 모두를 통해 자신과 그 관계를 정의하려고 애써온 서구 문명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즉 인간의 이기심으로 탄생한 산업화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겠다. 산업화는 편리와 안락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기제와 함께 부작용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경제 발전으로 쇠고기 수요는 증가하고 양질의 고기가 필요했고, 업자들은 더 빨리 살 찌우기 위해 사료를 조작한다. 고기 공급은 늘렸지만 이와 더불어 광우병이란 산물도 만들었다. 그래도 업자들은 동물성 사료를 중단하지 않는다. 업자들의 생각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다.

"고객의 주문을 따르다 보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제품 값은 똑같지만 노동량은 세 배로 증가한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맥도날드 창업자인 크록의 말이다. 즉 적은 노동력과 비용으로 최고의 이윤을 내기 위해서 고객의 목소리는 무시해야 하는 게 경영자의 지침 덕목이다. 촛불집회를 일으킨 꼴통 중에 꼴통으로 드러난 명박의 마인드도 이것이리라. 소비자(국민)의 요구를 무시한 채 곧 고시를 발표한단다.

그가 생각하는 효율성과 이득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소고기 수출은 미국의 주요 산업이고 그들은 적어도 자국의 축산인구를 돌볼 의지를 갖고 있는데 명박은 한국의 축산인구를 기꺼이 죽이고 일반 국민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고 있다. 힘 없는 최종 소매업자들에게 원산지 표기 강화나 운운하면서 말이다. 최종 소매업자들은 유통과정에서 참여할 힘도 없으며 최초 수입도매 업자의 말만을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걸, 그는 정말 모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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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폭력 없는 미래] 서평단 알림
폭력 없는 미래 - 비폭력이 살길이다
마이클 네이글러 지음, 이창희 옮김 / 두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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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맞서 비폭력 운동을 하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다. 어제 아프리카 방송사 대표가 구속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계속되는 촛불 행진을 실시간으로 중계한 방송이다. 정확히 말하면 서버를 제공한 곳이다. 컨텐츠는 각 개인으로 게릴라식 중계가 이루어진다. 열정과 올바른 의식과 더불어 부지런함까지 겸비한 정의로운 사람들 덕분에 공중파보다 더 빨리, 그리고 여과장치 없이 현장에 없으면서도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이런 문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는 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살수차와 컨테이너가 동원된 폭력은 결국 무력감만 드러냈다.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폭력을 통한 위협이 효과가 있으려면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는 게 전제 조건이다.

공포의 자양분은 무지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군부독재가 언론을 장악했던 이유도 여기있다. 양방향이 아닌 한 방향으로 흐르는 보도로 공포심을 조장하는 게 가능했다. 지금은 사실에 대한 왜곡과 진실을 구별할 수 있도록 취사선택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있다. IT 강국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딱 한 사람있다. 바로 이명박. 그는 폭력과 폭압의 시대를 관통해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폭력은 이제 그의 동반자가 되어버렸다. 그는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시대에 힘을 발휘했던 폭력적인 지배 규범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사회와 그 구성원들은 진화해서 비폭력을 원하는 미래로 달려가고 있는데 그는 홀로 과거에 남아 억압과 폭력을 여기저기 휘두르고 있다. 폭력은 결코 미래가 아니고 대안이 아니라는 걸 그는 모른다. 처벌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만 효과가 있다. 더불어 폭력은 상상력이 결핍되어 생긴다.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소통을 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소통에 대한 의지 부족 또는 다양성과 차이를 무시한 우월주의를 디딤판으로 삼아 폭력은 번창한다.

일련의 시국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은 걸 확신한다. 상상력이 부족한 대통령을 당황하게 하는 게 바로 진보된 시민 의식이니 말이다. mb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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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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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모르는 작가의 소설을 집어들 때, 가끔은 표지도 선택의 지표가 될 수 있다. 엔도 슈사쿠. 모르는 작가지만 일본 문학에 대해 벽을 쌓고 있고 그 벽의 높이를 조금 내려 볼까, 하는 기특한 마음도 있었다. 결과는..좋지 않다.

공교롭게도 불문학을 전공한 작가란다. 왜 공교롭냐면, 처음부터 끝까지 프랑스와 모리악의 <테레즈 데께루>의 관념을 차용한다. 관념을 차용한 거 까지는 좋다. 원래 창작이란 게 선배 세대에 축적된 결과물을 딛고 일어난다지 않는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쓰꼬를 <떼레즈 데께루>의 여주인공 모이라와 계속 병치시킨다. 마쓰꼬를 독립시키기 보다는 전적으로 모이라의 심정과 행적을 참조하고 있다. 패스티쉬적 특성, 상호텍스트적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던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끌리거나 울림을 주는 작품은 아니다. 기발하지도 않다. 작가의 의도가 이야기 구성 전체에서 반복된다. 깊이는 느껴지지만 그 깊이에 성큼성큼 들어갈 수는 없다. 공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반적 분위기는 죽음의 이미지를 비롯해서 쓸쓸하고 인간의 본질적 고독을 탐구한다. 인물들은 적절히 나이들고 삶에 대한 충동이 부질없다는 성찰에서 나온다. 강은 죽음과 생명의 이미지를 품고있다. 삶과 죽음, 인간의 본질을 갠지즈강에 가서 펼쳐보인다. 물리적으로 먼 거리는 현실에서 한 발 물러서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갠지즈 강을 택했겠지만 난 이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현실에서 떨어져서 보는 삶과 죽음은 책 속의 삶과 죽음을 구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책을 통해서 이미 현실과 유리된 위치에 있는데 작가의 갠지즈 강을 통해 한 번 더 떨어진 세계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깊은 강>은 누군가에게는 깊은 공감과 감명을 주었겠지만 나는 투덜거리고만 있다.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책은 없다. 사람과의 인연이 타이밍인 것처럼 책과의 인연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타이밍은 맞았지만 아쉽게도 정서적 소통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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