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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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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맥카시의 책은 처음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읽지 않았다. 영화의 함축적 풍경들이 글로 부서질까봐 책을 읽는 게 두려웠다. 프랑스 누벨 바그 시절 영화화된 하드 보일드 미국 소설이 별 매력이 없듯이, 그럴 거란 짐작만으로. <로드>는 알라딘 메인의 힘이 크다. 며칠 내내 노출시킨 출판사의 의도를 기꺼이 따라 별 기대없이 주문했다. 이따금씩 타인의 의도를 따라 별 기대를 하지 않을 때 기쁨이란 걸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책을 읽고 찾아 본 맥카시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삼십 대에 아들을 갖는 건 평범한 경험이지만 그의 나이에 아들을 갖는 건 특별한 일이다. 삶에 대한 중압감이 있지만 삶의 기쁨이기도 하다고. 이 책은 그가 아들을 위해서 썼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지친 영혼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33년 생인 그가 보는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첫 장부터 끝까지 죽음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얼어붙은 길가 냇물 건너편의 벤치 같은 땅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바람이 얼음에서 재를 날렸다. 얼음은 시커멨고 냇물은 숲을 구불구불 통과하는 현무암 길처럼 보였다." 곳곳에 얼음이고 재가 날린다. 때로는 오솔길을 혼자 헤메기도 한다.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장애를 만나면 남자가 소년을 지킨 것처럼 자신을 위해 손에 피를 묻혀야 할 때도 있다.

미국의 건국 이념에 깔린 신에 근거하는 세계는 항상 낙원은 아니다. 신도 언제나 자비로운 인물은 아니다. 자신의 말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에게 수치심을 벌로 주었고, 말 안 듣는 인간을 다 쓸어버리는 대홍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 판도라에게는 희망이라는 벌을 내렸다. 소설 속 남자는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을 말해준다. 악에는 폭력적 대항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가. 신이 그랬듯이 지극히 주관적이다.

이 소설의 큰 축은 남자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소년을 구하기 위해 선과 악을 판단한다. 남자와 소년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악이다. 소년은 끊임없이 남자에게 묻는다. 우리는 죽나요? 사람을 죽일건가요?하고. 소년에게 악이나 공포는 희미하다. 남자가 소년을 위해 보호하기 위해서 한 행동 때문에 오히려 소년은 악과 공포를 학습한다.

남자는 세계를 어둠으로 단정한 상태에서 살아간다.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일이 가장 용감하다고 여기고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의 세계는 이렇지만 남자는 소년에게만은 행운과 희망을 심어주려고 한다. 어쩌면 내가 행운과 희망을 믿고 싶기 때문에 결말에서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주검을 뒤로하고 낯선 사람이 내민 손을 잡는 소년의 마음, 즉 두렵지만 낯선 사람과 더불어 혼자 죽은 아버지가 지켜낸 실존적 자세를 유산으로 받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남쪽으로 걸어가야하는 여정. 소년은 이 여정이 고단하다는 걸 모른다. 더 이상 소년일 수 없는 나는 이 고단함에 체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고 싶다. 잠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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