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서재 - 김석희, 내가 만난 99편의 책 이야기 이상의 도서관 15
김석희 지음 / 한길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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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란 이름이 머리 속에 입력된 건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읽고 나서였다. 번역 작업이란 게 잘하면 본전, 못하면 욕 먹는 일밖에 없는 고된 일이라는 걸, 다는 몰라도 조금쯤 안다. 포스트모던 소설이 매끄럽게 번역된 걸 보고 다시 한 번 이름을 확인했더니 김석희였다. 앞으로 이 분의 책은 가능하면 보리라, 혼자 다짐했던 와중에 나온 책이다. 

날도 덥고 일도 고되고, 그러니 일한만큼 더 열심히 놀아자는 보상심리로 머리 아픈 책은 밀어 놓은 지 이미 오래다. 김석희 씨는 어떤 책들을 소개할지..궁금하고 내 독서목록에 추가할 게 있지 않을까해서 주문했다. 번역했던 책들 후기를 모았다고 하는데 볼 일 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긴 사람은 화장실에 비치해두고 두고두고 한꼭지씩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책을 안 읽고도 아는 척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안 읽은 책에 대한 요약문으로도 써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난 불행히도 화장실 체제 시간이 짧아 다른 용도를 생각중이다. 

논문 심사 때, 지도교수님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 이 주제가 정말 좋으니?" 난 이 질문의 의미를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이 말을 알아듣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늦었지만 이제는 안다고, 믿고 싶다. 아는 것과 애정을 쏟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김석희 씨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지도교수님의 말이 떠오른 건, 책 한 권 한 권에서 느껴지는 그의 애정 때문이다. 아, 이 분은 번역가 이전에 책 자체를 사랑하고 저자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번역가 이전에 책을 일반 독자보다 더 먼저 만난 독자로 애정을 듬뿍 담아 책 이야기를 하니 귀에 쏙쏙 들어올 수 밖에 없다. 옥수수 알을 조금씩 떼어 먹듯이, 그렇게 읽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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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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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극적인 삶보다는 가늘고 평범으로 채색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하품하며 따분해하지만 평범함이야 말로 한 사람의 가치를 명징하게 말해준다. 따분하고 지리멸렬한 삶은, 평소에는 투덜거리지만 유사시에는 그 어떤 스펙터클로 구성된 에피소드보다도 힘이 있다. 감동의 시작점은 일상성 부재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사실은 감동을 위한 공식에는 그 어떤 독창성도 필요없다.  

영화 초반은 좀 지루하고 관객의 웃음 코드를 미리 읽고서 배치한 유머가 대다수다. 스토리 라인 역시 새로울 것 없다. 어린이 스키교실을 운영하면서 확실한 주변인이 상황이 필요해서 대표감독으로 임명돼고 오합지졸인 국가대표팀을 부랴부랴 꾸민다. 출전 경력, 이런 거 다 필요없다. 의지의 한국인이면 된다. 미국으로 입양되어 성인이 돼서 엄마를 찾으려고, 반푼이로 아버지조차도 그 존재를 하찮게 무시당한 이, 껄렁이는 약물남용자, 결손 가정의 가장이 모여 불모 영역에 들어가 세상의 관점을 뒤집는다.  

이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영화의 결말이 어떤지 모르고 보는 데 막 응원하면서-내 옆에 앉은 사람은 박수도 쳤다-이 영화만은 착하게 끝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리얼리티가 영화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불가능한 금메달을 목에 걸어주었으면, 했다. 영화란 모름지기 이런 희망을 심어줘야하지, 암..하면서.   

쉬우면서도 간단한 일은 무시해버리기 쉽다. 아빠가(이 나이 돼도록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어서 아버지란 말이 잘 안 나온다) 치과치료로 요즘 힘들어하신다. 동생이 낮에 아빠 죽을 사다드리겠다고 전화가 왔다. 오늘 난 마침 시간이 났지만, 동생이 사다드리도록 감시만 했다. 그리고는 엄마, 아빠가 동생을 낳아준 것에 감사했다. 죽집에 들러 죽을 사는 일조차도 나는 안 하고 살면서 영화보고는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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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 -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 이야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박상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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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인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책을 사기까지 몹시 주저했다. 매달 사들인 책들로 서가는 한계점에 이르렀는데 빌려 읽어도 그만이 에세이집을 사는 게 과연 합리적인가. 그러나 도서관까지 책을 빌리러 가는 것 역시 내 게으름을 털고 일어나는 귀찮음 무릅써야하는 큰 결단이 필요했다. 어제 저녁 약속 시간 전에 서점에 들러 여름에 맞는 책으로 기행문 코너에서 조금 서성이다 빌 브라이슨의 책을 샀다. 재밌게 읽었지만 역시 빌려읽을 걸 하는, 후회를 남기는 책이다.  

이 책만 읽고 빌 브라이슨의 성향에 대해 논할 수 는 없겠지만 이 칼럼들을 통해 본 그의 관점은 참 주부스럽다. 소재 자체가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소한 일에 대한 단상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는 게 꼭 옆집 아줌마같다. 오랜 세월, 수다장이는 아줌마라는 공식을 사회적으로 퍼뜨리는 바람에 수다장이 아저씨라는 표현은 어쩐지 덜 정확한 느낌이 든다. 수다장이 아저씨 우디 앨런을 떠올렸지만 우디 앨런은 수다장이는 맞지만 아줌마같지는 않다. 쩝.  더불어 저자가 미국을 낯설어하는 미국인이라는 걸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미국인지만 미국을 이방인처럼 신기하고 기이한 나라로 보는데, 바로 여기서 독자와의 공감대가 형성된다.  

미국을 한 번이라도 가 본 적이 있든 없든 우리는 미국 문화의 영향권 아래 살고 있다. 나이키와 퓨마를 신고 코카 콜라를 마시며 스타 벅스 커피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 돼 버렸다. 많은 편리한 필수품 혹은 기호품들에 대한 우리의 관성적 태도를 빌 브라이슨은 좀스러운 방법으로 불평한다. 그의 아내가 말했듯이 그의 일은 불평하는 게 전부다. 우리가 그의 불평을 듣고 유쾌한 건 우리가 지적당하고 있다고 생각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지 좀스러워서 낄낄거리지만 사실은, 그의 수다는 뼈가 오도독 씹힌다. 그만의 방식대로 우리의 무심한 소비습관을 지적하고 다르게 해보면 어떻겠니, 하고 에둘러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채 그의 책을 유머러스하게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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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왈츠 - The Last Waltz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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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밴드the Band가 16년간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1976년 추수감사절에 마지막 공연 실황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더 밴드의 음악을 처음 들었고 락에 컨츄리 장르의 특징이 섞인 곡들이 많았다. 그들의 음악은, 처음 듣는 내게는, 새신발처럼 약간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공연 실황 사이사이에 16년간 순회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넣었다. "음악은 다른 세계로 이끈다.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으로 다른 곳으로. 우리는 무대에 있는 게 아니다"라고 멤버 중 한 사람이 말한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음악영화에서 음악을 느끼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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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 Pink Floyd The Wal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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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문자의 관계가 부적절한 관계여서 문자가 이미지 고유의 힘을 분산시킨다. 반면에 이미지와 음악의 관계는 샐러드와 드레싱처럼 그 맛을 완성시키고 잊지 못하게 한다. 음악은 이미지를 더욱 의미있고 정서적으로 밀착시켜 받아들이게 이끈다.  

그 유명한 <더 월>을 어제서야 보았다. 명작은 정말 시대성을 초월한 보편성을 지닌다. 20년도 더 지난 영화적 기법들은 지금봐도 세련됐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앨범에 들어있는 각 곡의 가사를 대사로 내러티브를 창조하고 이미지를 사용한다. 의식과 무의식을 표현하는 데 수 많은 인서트 컷들과 애니매이션 장면들은 혼동과 고독을 극대화한다. 반전, 반교육을 말하지만 결국 자신도 독재자가 되어버리는 흔들리는 의식을 이미지화 한다.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 겪을 법한 갈등이다. 우리는 대체로 타협해서 의식의 흐름을 몸을 맡기지만 로저 워터스처럼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는 의식과 무의식이 벌이는 격렬한 싸움을 결국 이겨내지 못한다.  

위대한 예술은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가진 사람의 사투고 우리는 그 처절한 사투를 보며 즐거움을 얻는다. 예술소비는 잔인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물건을 다시 사는 소비행위 만큼 예술 소비는 모순적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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