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조각들 - Summer Hou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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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으로 우거진 고풍스러운 집 안뜰에서 식사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어머니의 75세 생일을 맞이해 뉴욕에 사는 딸, 중국에 사는 아들 가족,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아들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죽은 후 삼남매는 다시 모인다. 장례식 풍경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남긴 문화재급 유품들을 처리하면서 어머니를 들여다본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란 감정은 배제하고 남매는 유품처리를 의논한다. 우리 문화권에서 호로자식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껄끄러운 문제들일 수 있다. 삼남매 역시 잠깐 언성을 높였지만 유품처리에 대체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독립을 하는 게 일반적인 문화권에서 가족은 애틋함보다는 과거의 흔적들이다. 자식들의 미래에 대해 부모가 갖는 권리는 결정을 청취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한때는 품안에 있었던 자식들이 각자 자기 길로 가면서 어머니 폴은 19세기 그림들, 가구들, 인테리어 소품들을 집안에 품고 숨결을 불어넣었다. 물건이란 게 사용하는 사람의 온기가 있어서 유의미한 대상이 되지만 사용자가 없는 물건은 냉기가 감돈다. 꽤 이름있는 화가인 어머니가 쓰던 역시 유명한 디자이너의 책상이 오르세 미술관 유리벽에 덩그러니 갇힌다. 단체관람객들이 우르르 몰려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잠시 눈길을 던지지만 곧 다시 혼자 유리벽 안에 남아있는 신세다. 작업실에서 봤던 어머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가구와 짐들이 처리되고 빈 집은 스산하다. 미처 못 치운 쓰레기 잔해만이 뒹군다. 새로운 주인을 만나 다시 온기를 찾기 전 집은 십대 손녀와 친구들이 파티를 열면서 영화는 끝난다. 손녀가 남친과 유년기를 떠올리며 들판 속으로 사라진다. 소녀는 나중에 자식에게 할머니에 대한 작은 기억만을 이야기해 줄 것이고 소녀의 자식들도 소녀처럼 할머니의 추억을 처분하느라 의논하는 시간이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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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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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오래된 도시이면서 새로운 도시다. 오랫동안 한국의 수도지만 조선시대의 사대문을 표시해주는 징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콘크리트 숲 속에 왠 문, 쯤으로 인식될 수 있다. 사대문 안의 풍경 역시 과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서울을 이루는 건물들은 새롭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조금만 낡아도 헐어내고 새 건물을 짓는다. 새로운 건물 재료 전시장 같다. 내가 보기에는 대체로 시커먼 건물이 다 그 건물같아 보인다. 더구나 우리의 시선 반경을 수십 배도 넘는 건물 높이는 건물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데 힘들게 한다. 우리의 시선은 주로 간판에 머문다. 건물만큼 많은 간판들은 건물을 가리고 눈에만 띄게 하려는 욕구를 드러내며 고함치고 있는 거 같다. 서울 거리 풍경에 대해 말하라면, 어둡고 흉물스럽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의 눈은 역시 다르다. 평범하고 어두운 거리에도 차이를 구별해내고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책에서 다루는 많은 건물들과 다리들은 우리가 늘 지나다니는 곳이거나 한 번쯤 지나친 적이 있을 법한 익숙한 대상들이다. 그저 높고 네모난 건물들과 한강 남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철교들에 숨어있는 건축가의 의도를 찾아 보여준다. 사방이 콘크리트인 서울에도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데 우선 놀랍다. 저자의 서술방식도 큰 역할을 한다. 쉽고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냈고 설명을 끌어가는데 풍부한 감수성이 흉한 건물들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한 사람의 전문성과 감수성으로 빚은 건물 다시 들여다 보기는 책을 옆에 두고 책 속 건물을 지나칠 때마다 펼쳐보고 싶게 한다. 어제는 길을 걸으며 차를 타고 고개 높이 들어 꼭대기까지 올려다봤다. 건물 모서리나 창도 유심히보고. 이 책의 미덕은 이렇게 한 번 다시 봐 보라고 권유하는데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반인은 건축가가 아니니까 건물을 보면서 저자처럼 건축가의 생각을 읽어내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어떤 건물이 미적 가치가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서울은 일반인이 보기에 아름다운 건물들은 사실 드물다. 자연을 고려하고 행인을 고려하는 건물물을 떠올릴 수 없다. 우리의 최신식 건물들은 하늘이나 태양을 즐기도록 만들기보다는 차단하고 실내를 따뜻하고 시원하게 만드는데 치중하는 거 같다. 현대식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조금 낡고 불편해도 반짝반짝 닦여 정감있는 건물, 불편함을 기꺼이 참을 수 있는 건물이 담긴 서울을,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 일반인의 눈으로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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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침묵 - Into Great Silenc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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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나니..." 

1. 시적 감상 

도를 수행하는 것 또는 신의 제자가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하는 행위다. 사계라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추우면 추운데로 더우면 더운데로 순응하는 자세다. 춥다고 거위털이나 밍크털로 내 몸을 두르려고 동물을 대량으로 길러 죽이지도 않고 덥다고 에어컨을 가동해서 온실가스를 집이나 사무실 밖으로 내뿜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가 가진 일부를 포기한 거 일 수 있다. 아주 사소하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힘들다.  

수도원은 물질적 욕구를 모두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만물을 살핀다는 신의 교리대로 따르기도 약속한 공간이다. 물질적 삶의 간소함은 일부일 뿐이고 정신적으로 신을 향한 하나의 생각만을 남기도 온갖 욕망과 시기를 버리기로 하는 일이다. 최소한의 가구가 있는 독방에서 지내면서 주로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필사하면서 지낸다. 다 같이 예배를 드리는 의식 속에서도 대화는 거세되고 신을 찬양하는 나지막한 노래를 합창한다.  

그들의 소박하고 절제된 일상은 번잡한 내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종교활동을 하지 않고 신의 존재를 필요할 때만 믿는 내 눈에도 그들의 삶은, 한편으로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수도사들은 철저하게 비우는 삶을 지향한다. 한 끼 식사조차도 눈과 혀의 즐거움을 금지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고립된 수도원에서 신을 위해 기도만 하는 게 과연 신이 원하는 삶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눈이 쌓인 수도원 산길에서 수도사들이 미끄럼을 타면서 천진한 어린 아이들처럼 즐거워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 금욕적 생활 속에서도 작은 즐거움은 누려하는 게 인간 아닐까..하는 처연함도.

2. 영화적 감상 

영화가 늘 새롭고 흥미로운 이유는, 플롯 때문이 아니다. 플롯은 영화를 이루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일 뿐이다. 영화 속 화면에는 현실에서는 잡아둘 수 없는 빛에 관한 기록이 있고 시간을 가둬둘 수 있어서 언제든지 되감아서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찰라의 빛과 시간에 관한 기록이다. 찰라를 모아 놓으면 세월이 되고 매일의 똑같은 일상이 이를 수 있는 곳을 암시한다.  

수도원은 양면적 가치를 가진 곳이다. 계몽주의 시대가 되면서는 수도원은 성스러운 곳이 더 이상 아니었다.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에서처럼 수도원은 부패와 악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고 또 피터 뮬란 감독이 만든 <막달레나 시스터즈>에서는 인권을 말살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수도원의 일상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수도원에서 무엇을 하는지 대체로 모른 채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는 책과 영화들을 봐왔다. 픽션이고 부조리한 부분만을 확대해서 가공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다큐로 일체의 인공조명을 안 쓰고 촬영했고 실제 수도사들의 삶을 담았다. 그러나 이것도 일부일 뿐이다. 수도사들의 묵상과 기도할 때 기록했다. 그들의 기도 내용이나 마음의 동요 혹은 평온은 카메라로 담을 수 없다. 감독은 씬과 씬을 원하는대로 배치해서 카메라가 담지 못한 생각을 담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이름이 "위대한 침묵 속으로"이고. 우리는 카메라가 말해준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 수도사들이 들어간 침묵 속으로는 아쉽게도 들어갈 수는 없다.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수레 바퀴소리, 돌 바닥에 신발이 부딪치는 소리, 심지어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에도 청각이 반응을 한다. 기도문을 외우는 소리는 음악같다. 신을 믿는 의식 중 하나가 기도문이나 찬송가다. 기도문이나 찬송가로 신심을 엿보는 건 비신자한테는 조금 힘들고 아름다운 의식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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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왈츠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박
대니얼 J. 레비틴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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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은 뇌와 사고의 상관 관계에 관한 독서 기간으로 잡았다. 한 분야 혹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의 사유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적어도 몇 권의 책을 읽어야하니까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과 함께 주문했는데 핑커의 책은 내 기대치에 못 미쳤던 터라 대니얼 레비틴의 책은 더 반가웠다. 저자는 인지 신경과학자(이런 분야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인데 인지 신경과학에서 다루는 게 내가 궁금하게 여겨왔던 거다! 브로카 영역이 손상되면 통사론에 문제를 일으켜 문장을 말하지 못하고 베르니케 영역이 손상되면 단어발음이 힘들어진다는 이런 뇌의 지도를 만들어가는 게 궁금했던 게 아니라  사고할 때의 뇌의 변화다. 또는 사고할 때 뇌는 어떻게 작용하나.  

그동안 내가 몰라서 그렇지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한 거인들이 수도 없이 많다. 베르그손이 왜 <물질과 기억>을 썼는지 알거같고, 들뢰즈과 말하는 운동과 이미지의 실체의 윤곽에 이제서야 조금 다가간거 같다. 왜 인문학을 다루는 학제에서 들뢰즈나 베르그손을 읽기 전에 이런 뇌 과학 개념 책을 읽으라고 아무도 말 안하는가. 삽질을 덜 할 수 있는 독서루트인데. 쩝. 

이 글은 음악을 들을 때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로  집약되지만 전반적인 뇌 작용에 대한 개괄적 설명을 동시에 한다. 그러면서 음악개론 같기도 하다. 음악적 요소 개념에서부터 음악과 소음과의 차이를 이론적으로 친절히 설명해준다. 음악을 들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청각기관을 거쳐 뇌 뉴런들이 연쇄적으로 작용하면서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흡입할 때처럼 도파민이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 대략적 틀은 알 수 있지만 아직까지 현대과학으로 뇌의 정교하고 복잡한 연산작용에 대해서는 신비를 풀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결과가 아니라 뇌에서 곡조를 기억하는 과정과 음색이나 조가 변해도 곡조를 저장소에서 불러내는 과정이다. 음악 뿐 아니라 기억 일반과도 관계가 있다. 문장을 기억할 때와 노래를 기억할 때, 뇌에서 연산작용이 일어나는 곳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내 관심은 기억일반에 관한 것이다. 모든 기억은 왜 왜곡인가,에 대한 대략적 설명이 명쾌하게 나와있다. 철학자들이 어려운 말을 사용한 게 과학에서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극복하려고 여러 가지 개념들을  사용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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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본능 -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문미선.신효식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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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원하는 정보는 하나도 얻을 수 없는 책이다. 책을 사고 목 빠지게 기다리면서(주문해서 내 손에 들어오는 데 폭설 여파로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언어 사용과 뇌는 어떤가..에 대한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물론 뇌와 언어사용과의 관계를 설명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건 언어를 잘 사용하는 뇌였던 거 같다. 그러나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내용은 인간은 태어날 때 언어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그래서? 인내심있게 긴 주장을 읽은 수고가 조금 아까워지려고 한다. 길게 설명하고 있지만 저자가 허무할 정도로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다.   

언어에 관한 대부분의 시각은 문화적 산물이고 공시성과 통시성을 가지고 진화 내지는 변형한다고, 배워왔다. 생각을 문자와 소리로 나타낼 수 있는 건 인간이 유일한 존재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명제에 의문을 안 품는다. 저자는 이런 당연한 명제에 반기를 든다. 화성인이 지구인을 본다면 하나의 언어체계 속에 하나의 방언이 존재한다는 말로 시작해서 학습 이전에 아기들은 자체 언어프로그램 모듈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아기의 옹알이, 종류별 실어증 환자의 사례 연구를 통해 언어 기능 수행과 뇌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말을 배우기 전에 어떤 언어도 처리할 수 있는 모듈이 있던 아기들은, 모국어 또는 환경상 주로 말해지는 언어에 빈번하게 노출되면서 무수한 언어수행관련 시냅스들이 점점 퇴화하고 주로 사용하는 말로 단순화한다고. 이런 일련의 연구결과를 국어 교재를 만드는 회사 마케터들이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외국어를 어렸을 때부터 시켜야한다는 광고가 이런 결과를 재빨리 응용한 부정적 부산물이다.  

부제가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인데 마음이 언어를 만드는 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두꺼운 책이 허전한데는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뇌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보편적 언어구사의 물리적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언어사용의 세부적 환경이나 기능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데 환경이나 학습, 문화 이전에 근본적으로 한 뿌리로 보고 언어사용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말이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애쓰는데 공감하기 힘들다. 첫째, 언어는 인간의 사유를 내포하고 있다고 오랫동안 학습받아왔기 때문이다. 둘째, 저자가 말하는 언어 본능은, 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 전의 기능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뇌가 태어날 당시에 보유했던 풍부한 언어 모듈이 자라면서 고착화되고 잃어버렸을 때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유일하고 독특하게 만드는 건 그 사람이 지닌 무수한 사소하고 하찮은 습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모두 비슷한 언어본능을 지니고 태어났더라도 물리적, 자연적 습관에 따라 언어구사력이 달라진다. 그럴 때의 뇌 작용, 이런 게 난 궁금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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