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말 오랜만에 주말 오후 극장으로. 내게 평화로운 주말 오후란 극장에 슬슬 걸어가서 스크린에 몰입한 후 극장에서 나와 천천히 걸으면서 영화에 대해 생각하다 갑자기 현실 속으로 돌아와서 주변을 관찰하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 요즘 극장에 갈 물리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시간이 나면 더 망설이게 된다. 기회비용을 최소화하려는 논리를 작동시켜서 소중한 시간에 최대의 정서적 충족을 추구하려고 계산기를 두드린다. 그래서 영화를 고르는데 신중해지고...실은 어떤 정보도 없기에 보고 싶은 영화가 줄어든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래서 본 영화는 <우리들>

 

2.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4학년 선이의 부모는 가난하다. 엄마는 깁밥집을 하고 유치원생 동생을 돌보는 일은 선이의 몫이 종종 된다. 동생은 친구랑 레슬링을 하며 놀다가 늘 얼굴에 상처가 나고 맞는다. 어느 날, 선이는 동생한테 왜 맨날 맞아? 너도 때려, 하고 말한다. 동생은 나도 때렸어, 그런데 친구가 또 때리고..그리고 놀았어. 선이는 너도 또 때려야지, 한다. 동생이 그럼 언제 놀아? 또 때리면 언제 놀아? 이런 대사를 쓰는 감독이라니. 이 작품이 감독의 첫장편인데 다음 작품이 몹시 기다려진다.

 

영화는 우화를 통해 사회 구성원의 구조적 관점을 다룬다. 사회적 약자가 주류 사회에 들어오는데 진입 장벽이 존재하고 약자의 연대가 잠시 구축되는 듯하지만 그 연대는 몹시 약해서 곧 깨진다. 주류가 휘두르는 폭력은 견고해서 어떤 소재도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약자는 그걸 아나 모르나? 왜 연대가 중요한데 깨질까? 여기서 사건이 발생한다. 시샘이다. 약자의 연대감은 어떤 면에서 정서적 공감에 기반을 둔다. 서로 비슷한 처지라는 이해. 하지만 인간은 감정에 지배를 받는 비이성적 동물이다. 특히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논리와 이성은 안드로메다행이고 남는 건 상처받은 감정과 분노다. 선이는 왕따다. 다른 학교에서 왕따 문제로 전학 온 친구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잠도 같이 잘 정도로 절친이 되는가 싶다가, 이 전학 온 친구가 선이와 결별하는 지점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것을 깨달은 순간이다. 선이는 가난하지만 엄마, 아빠의 사랑을 가졌다. 전학생은 부자 아빠와 새엄마, 자신을 돌보지 않는 바쁜 엄마를 가졌다.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은 갈라지고 우정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묘사되는데 전혀 치졸하지 않다. 어른 세계에서는 이보다 더 치졸한 일이 흔히 일어나니까.

 

3.

나는 영화를 보면서 선이의 캐릭터를 좋게 보지 않았다. 수모를 당하면서도 늘 감싸는, 혹은 배려하는 태도. 사실 이게 정답이긴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게 옳은가? 선이가 동생을 매일 때리는 친구한테 화풀이 겸 동생 복수도 할 겸 때린 사건이 발생한다. 잘못했다고 말하는 선이(동생 친구는 어린 약자이므로)한테 엄마는 말한다.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동생 맞는 걸 보는 누나가 어디있냐며. 어른이 되는 과정은 이런 걸 학습해 가는 과정일까? 어린 선이는 가치관에 혼란이 온다. 엔딩에서도 선이는 결국 또 손을 내미는 대인배지만 왜 선이만 모든 걸 이해하고 품어야 하나.

 

4.

이 영화는 약자의 시선으로 다뤘지만 실상은 주류의 폭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보라라는 공부 잘하고 부자집 딸인 아이가 아이들을 선동하며 한 아이를 따를 시키는 과정에 대해서는 배경으로 처리한다. 지기 싫어하고 자기만 주목받고 싶어하는 아이, 그래서 그 누구라도 방해가 된다면 어떤 일도 벌일 수 있는 아이. 이 아이는 계속 그렇게 주류의 지지를 받는 게 현실이지만 그 아이는 알기나 할까? 선이의 배려를?  도덕적 우아함을 못 갖춘 이가 선이의 도덕적 우아함을 알기나할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맥거핀 2016-07-24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지만, 넙치님이 영화를 보고 나셔서 이렇게 질문을 많이 하신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영화가 좋은 영화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뭐 태클은 아니고, 그래서 선이의 캐릭터를 어떻게 그리는 게 더 나았을 것으로 보시는지요?

넙치 2016-07-25 09:25   좋아요 0 | URL
영화는 수작이에요.^^ 감정을 섬세하게 잡아내고. 계급 간 문제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화로도 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질문하시니까 음...대안을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선이는 가치관 중립적 인물이고-어리기도 하고 또 윤리적으로도 성숙한 캐릭터라-상황을 관찰하는 듯하지만 늘 기만당하고 배반당하면서도 먼저 손 내미는 역할인데, 보면서 정치권/기득권한테 당하는 우리 일반인 같아서 화가 나더라구요.

감내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행동하는 캐릭터면 좋았겠다..뭐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감독의 영혼의 결은 그게 아닌걸 알면서도요.^^
 
사랑에 관하여 마카롱 에디션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1.

마카롱 에디션이라고 '사랑에 관하여'란 제목을 달고 나오고 표지도 사랑의 달달함을 연상시키는 꽃분홍색이다. 고전을 이런 식으로 포장하는 게 옳은가에 대한 회의와 이렇게라도 포장해야 속아서 고전을 사는 이도 있을 테니, 하는 적절한 타협의 시선을 던지며 씁쓸하다. 개인적으로는 카페나 지하철에서 꺼내 읽기 조금 민망-.-

 

2.

표지가 아무리 기만하려고 해도 체호프 단편집이라는 걸 잊지말자. 총 9편의 단편인데 단편 속에서 기나긴 인생의 흥망성쇠가 우의적으로 담겨있다. 그러니 체호프지. 단편은 감상을 적기가 참 애매한데 인상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좀 보면

 

먼저 <검은 수사> 남녀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권태로 접어들어서 서로한테 치를 떨며 증호하는 과정이, 짧은 이야기 속에 녹아있다. 남자는 결혼 전에도 검은 수사의 환영을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환영을 본다는 게 그 어느 누구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남자고, 오히려 그 환영은 여자와 대화를 할 때, 활기와 열정을 불어 넣기도 했다.

 

"난 미쳤고 과대망상증에 걸렸었지. 하지만 대신 즐겁고 활기차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했어. 난 재미있고 특별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이제 더 논리적이고 더 근엄한 사람이 되었겠지만 대신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단 말이야. 난 평범함 그 자체야. 사는 게 지겨워...아, 당신들이 나를 얼마나 잔인하게 다뤘는지 알아? 그래, 난 환각을 봤어. 하지만 내가 누구한테 피해를 줬나? 대답 좀 해보라고. 그레 누구한테 피해를 줬지?"(115)

 

남자(코브린)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고 그를 바꾸려는 아내와 아내 주변의 노력으로 남자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는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지 못하면서 한때 가깝고 사랑스러웠던 사람이 괴물처럼 보인다.

 

체호프는 이런 지점에서 일종의 해결책 내지는 구원을 죽음에서 보는 것 같다. 죽은 이의 얼굴에서 "지복의 미소"란 표현을 쓴다. 또 다른 이야기 <상자 속의 사나이>는 죽어서 관에 누운 남자를 묘사하면서, "관에 누워 있는 그의 표정은 유순하고 유쾌하며 심지어 신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상자에 자기를 담아준 것을 기뻐하는 듯햇지요. 그래요, 그는 꿈을 이룬겁니다!"(164)

 

 

체호프는 사랑을 믿지 않는 거 같다. "인간이 자기 이상에 사로잡히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거죠."(177)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 말하고 나는 아-멘!을. 표제 이야기 <사랑에 관하여>는 각자 가정이 있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이들이 사랑이란 애틋한 감정을 오랜 기간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이 결혼제도 속에 함께 하지 못해서 서로에 대한 환상을 계속 유지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의 완성은 이별이란 말씀에 체호프도 동참한다.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에서 그녀를 끌어내 똑같은, 어쩌면 더 일상적인 삶으로 데려가서 어쩌겠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내가 병이 나거나 죽으면, 아니 그저 우리의 사랑이 식어버리면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199)

 

3.

체호프는 사랑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표지처럼 달달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체호프의 글의 전반적인 톤이 대체로 요즘 날씨같다. 그냥 기온이 높은 게 아니라 대기가 습기를 잔뜩 머금고 뿌연 공기로 둘러싸서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더위. 마치 이 더위가 영원히 계속 될 거 같은 착각을 줘서 문득문득 짜증이 솟구치려는 그런 미묘한 지점. 아열대같은 여름이 끝이 나는 것처럼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는 끝나고 맙니다."(201)라는 비극적이고 체념적 위안을 던진다.

 

"사랑할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202) 남자가 평생의 여인을 떠나보낸 후 얻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깨달음이란 뭔가? 늘 너무 늦게 찾아와서 소용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요일 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화양연화> OST가 감성 세포를 미친듯이 흔들어 깨웠다. 이 영화 개봉 당시, 영화를 이해가기 좀 어렸다(?). 뭐 저런 지루한 사랑이 있나 했다. 장만옥의 치파오를 침흘리며 봤던 게 생생하다.ㅋ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말로 다 표현 할 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감정은 입 밖으로 내어 말로 형태를 갖게 되는 순간, 듣는 사람과 함께 있는 분위기, 태도와 만난다. 그리고는 산화작용을 거쳐 전혀 다른 감정으로 변하고 거기다 듣는 이의 해석까지 더해져서 본래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전달되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좌절스럽고 그래서 감정을 잘 말 안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글이 필요하고, 영화가 필요하고, 그림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내가 줄거리나 그림 전체의 조화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물질화한 묘사, 그림에 녹아 있는 붓질의 질감을 훨씬 애정하나...?


왕가위 영화가 그렇듯이 줄거리는 심플하다.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에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영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나온 자막 두 문장이 영화 내용이다. 말 줄임표 사이에 무수한 감정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그 감정들의 파고를 감지하는 게 이 영화의 관람포인트다. 두 사람은 이웃집에 사는 각자 배우자가 있는 사람들이다. 양조위의 아내, 장만옥의 남편은 여행과 출장으로 집을 자주 비우고 두 사람은 60년대식 아파트의 좁은 통로에서 마주친다. 그러다 어느 날, 밖에서 저녁을 먹으려 심증만 갖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같은 고민을 공유하게 된다. 각자의 아내와 남편이 바람을 핀다는. 공통분모라는 게, 참 별스럽기도 하지만, 살다보면 이런 일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는 요즘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주 만나고 서로에 대한 마음이 깊어진다. 양조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두 사람은 만나서 밥을 먹고 대화를 조금 하고 그냥 같이 오래 앉아있다. 사생활이라곤 없는 아파트 주민의 눈을 피해서 양조위는 글을 쓰느라 호텔방 <2046>!호를 얻는다. 거기서도 그들은 대화를 조금하고 그냥 같은 공간에 함께 앉아있다. 그 호텔방으로 처음 장만옥이 찾아가는 날의 갈등을 카메라는 잘 잡아낸다. 위로 올라가는 발걸음과 다시 계단을 달려내오는 모습. 그리고 복도 끝에서 방으로 걸어갈 때의 망설임. 


그리고 집 근처 골목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 남자가 먼저 내려서 걸어가고. 서로의 배우자한테 다른 사람이 있는 걸 확인하는 걸 연습하거나 헤어지자고 말하는 연습을 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이유가 배우자의 외도였고 두 사람의 짧은 대화 주제는 주로 그 해결책 모색이라니.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숨겨진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유추하면 가슴이 아릿하다. 배경이 60년대라는 걸 감안하면 두 사람의 애틋한 감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이해가고. 또 살다보니 사람이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사는 것도 아니니까, 저들이 왜 그러나도 이해하게 되고. 미묘한 감정 변화를 포착하는 게 중요한 영화인데 이 시절 왕가위 감독은 뛰어난 연출력으로 정점을 찍었구나, 하는 만감이 교차하는 영화다. 게다가 장만옥의 아련한 표정과 내부에서 올라오는 오열을 참는 눈빛과 여전히 멋진 흔들리는 눈빛의 소유자, 양조위.


이 영화를 보면서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란 단편 소설이 내내 떠올랐다. 아무런 사건 없이 한 남자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서재로 가서 이야기를 하거나 그 남자가 없을 때 잠이 들기도하고. 본인도 무슨 감정인지 모르다가 남자가 죽고 나서 펑펑 우는 이야기인데. 이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친구한테 읽어보라고 줘버렸다. 친구는 지루해서 못 읽겠다고 했고. 하지만 돌려받진 못하고 문득문득 그 책이 없는 게 아쉬워서 새로 주문해야지, 하고 결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언제나 처럼 욕망에 관한 영화다. 하나의 이야기를 네 사람의 욕망의 층위가 충돌해서 바라보는 네 쌍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숙희-사기꾼 백작,  사기꾼 백작-아가씨, 이모부-사기꾼 백작, 숙희-아가씨.

 

숙희와 사기꾼 백작의 욕망은 귀족 아가씨의 돈이다. 사기꾼 백작과 아가씨는 각기 다른 욕망인데 돈과 변태 이모부로부터의 탈출, 변태 이모부와 사기꾼 백작의 욕망은 야설을 상상하는 쾌락주의자 이모부와 업계에서 동업자와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데 사랑에 빠졌다가 몰락하는 백작. 그리고 우정과 사랑 사이에 있는 숙희와 아가씨. 사실 이 네 쌍의 욕망은 인간의 근본적 욕망 모두를 아우른다. 물욕, 성욕, 사랑. 인간의 기본 욕망을 이루는 필수 구성요소. 처음에는 하나의 욕망을 목표로 계획을 세우지만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사고를 하지 못한다. 셋은 분리될 수 없다. 사랑에 눈이 멀면 돈은 하찮고 욕정에 눈이 멀면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욕정과 사랑의 경계 또한 희미해서 선을 그을 수도 없고. 그래서 인생은 꼬이고 처음 계획과는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는 게 인생이고.

 

2.

사기꾼 백작은 가장 변화 무쌍한 인물인데 다른 말로 하면 영혼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그래서 자신의 꾀에 자신이 넘어가는 아주 유약한 인물이다. 반면에 아가씨는 어린 시절 부터 야설책을 읽도록 훈련받았고 성인이 되서 모노 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가 되는 치욕을 겪고 강철 멘탈을 기른다. 이모의 자살을 목격하고도 때를 기다리며 음모를 꾸미고 결국 두 남자를 파멸로 몰아넣는 팜므파탈이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아가씨는 실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거부하며 대담하다.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도 알고 숙희도 갖고. 표면적으로는 여성 승리의 서사이다.

 

3.

결말은 아가씨와 숙희의 사랑의 승리인 거 같은데 몹시 불쾌하다. 왜 이렇게 불쾌한가. 두 여체를 묘사하는 방식이 남성적 관음성에 봉사하기 때문이다. 수위 높은 베드씬 역시 몹시 그렇고. 그래서 여자들이 이모부와 사기꾼 백작을 엿먹였는데도 여성 승리의 서사로 안 여겨지는 이 찝찝함. 여성의 승리에도 여자 관객이 불쾌한 엔딩이라니.

 

4.

더불어 영화는 굉장히 역동적이다. 사건의 전개도 그렇지만 카메라 움직임은 거의 전능하고 관능적이다. 멀리 있다 갑자기 인물한테 돌진해 달려들기도 하고 아래서 위로 갑작스럽게 솟아오르기도 해서 마치 카메라가 살아있는 하나의 캐릭터같기도 하다. 카메라가 인물을 거침없이 빨아들이는 느낌. 그래서 영화가 더 탐욕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요즘 별자리에 꽂혀서 읽는 글이라고는 별자리에 관한 글. 지난 주에는 타로점도 보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려있다. 타로점집에 가서 카드를 뽑은 후 타로 리더가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아, 내가 여기 왜 와있지 하는 후회를 하면서도 길 가다 타로점집이 보이면 불쑥 들어가곤 한다. 핵심에서 벗어난 뭔지 모를 약간의 일시적 위안(?)의 말을 들면서 나오곤한다. 그리하여 급기야 점성술 싸이트를 뒤지며 친구들 별자리를 묻고 내가 아는 친구들의 성격과 별자리 특성이 맞는지 확인해보는 아주 요상한 짓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으헉.

 

2.

왜 별자리와 타로 이야기를 하냐면, 모든 일이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감독은 영화 처음에서 말하고 관객이 스펙터클을 보다 잊었을까봐 또 끝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오프닝에서 일본인 남자가 낚시를 하고 있다. 미끼를 끼워 물에 던져두면 그 미끼를 무는 건 물고기의 마음이다.

 

3.

영화는 두 편을 이어놓은 듯이 이음매가 분명하게 도드라진다. 상업적 흥행을 위한 스페터클 장면들 2시간 자리와 감독이 포기할 수 없는 메시지, 30분 짜리 영화를 이어붙였다. 2시간은 곡성이란 마을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 사건과 그 혼란을 스펙터클화한다. 피가 낭자하고 기이한 장면은 연출이란 생각을 하면 그럭저럭 두려움을 떨치고 볼 만 하다. 전작 <황해>에서 잔혹함에 단련되서 그런지 잔인함도 덜 한거 같고. 그런데 난 마지막 30분은 무서워서 거의 귀를 막고 스크린도 못 봤다. 귀를 막아도 아득하게 들려오는 세 사람의 대화만으로도 극장을 나오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내게 누가 정말 귀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비극은 종구 내면에서 비롯된다. 처음부터 비논리적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종구는 경찰이다. 경찰은 공권력의 상징이고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객관적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적 위치에 있다. 하지만 종구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객관적 방법을 버리고  자신의 힘과 육감에 의지한다. 육감이란 게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감지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다. 종구는 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추진력 역할을 한다.

 

귀신 혹은 악령은 믿는 이의 마음에 뿌리내리며 산다. 영화는 조악하지만 천주교를 끼워넣었다. 종구의 아이가 굿을 하다가 죽을 거 같자 굿판을 뒤업고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종구는 성당의 신부를 찾아간다. 무당은 버렸지만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신부 왈, 의사를 믿으세요, 하는 도움 안 되는, 하지만 당연한 말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제수업을 받는 이가 젊은이 답게 십자가, 즉 이성을 손에 쥐고 일본인 귀신/사람을 찾아간다. 그가 흔들리는 지점은 자신의 신념을 불신할 때다. 아, 인간은 너무 약한 존재. 그래서 어쩌면 신의 존재도 정말 궁지에 몰리면 무용지물일지도.

 

4.

종구는 한편으로 우리 인간을 대표하는 몹시 불안한 캐릭터다. 그는 무언가를 믿을 게 필요한 사람이다.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어려움을 이겨나가겠다고 다짐해보지만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우왕좌왕한다. 누구를 믿어야하는가, 박수무당 일광인가 하얀 소복을 입은 미치년인가? 그는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불안은 누군가가 알맞은 떡밥을 던지면 덥석 물게 하는 힘이 있다. 물론 종구는 어린 딸의 아비로 딸이 당한 폭력에 이성을 잃을 수 밖에 없다.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종구의 마음은 주변에서 들은 소문 조각들을 기워서 그 소문 담요조각에 덥석 올라 몸과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딸아이에 대한 폭행 사건을 대하게 되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불길로 뛰어든다.

 

5.

다시 별자리 이야기. 그러니까, 나도 별자리 이야기를 탐독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별자리는 언제나 드리워진 미끼고 나는 필요한 때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면 물 밖으로 나와서 냉동처리 되서 밥상에 올라오는 과정을 거친다. 냉동처리 되기 전에 미끼를 놔야지. 하지만 그 적절한 시간을 몰라서 놓칠 수 있다. 인간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청장고원 2016-06-04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넙치님 글은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네요~

넙치 2016-06-06 21:02   좋아요 0 | URL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