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화양연화> OST가 감성 세포를 미친듯이 흔들어 깨웠다. 이 영화 개봉 당시, 영화를 이해가기 좀 어렸다(?). 뭐 저런 지루한 사랑이 있나 했다. 장만옥의 치파오를 침흘리며 봤던 게 생생하다.ㅋ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말로 다 표현 할 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감정은 입 밖으로 내어 말로 형태를 갖게 되는 순간, 듣는 사람과 함께 있는 분위기, 태도와 만난다. 그리고는 산화작용을 거쳐 전혀 다른 감정으로 변하고 거기다 듣는 이의 해석까지 더해져서 본래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전달되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좌절스럽고 그래서 감정을 잘 말 안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글이 필요하고, 영화가 필요하고, 그림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내가 줄거리나 그림 전체의 조화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물질화한 묘사, 그림에 녹아 있는 붓질의 질감을 훨씬 애정하나...?
왕가위 영화가 그렇듯이 줄거리는 심플하다.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에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영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나온 자막 두 문장이 영화 내용이다. 말 줄임표 사이에 무수한 감정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그 감정들의 파고를 감지하는 게 이 영화의 관람포인트다. 두 사람은 이웃집에 사는 각자 배우자가 있는 사람들이다. 양조위의 아내, 장만옥의 남편은 여행과 출장으로 집을 자주 비우고 두 사람은 60년대식 아파트의 좁은 통로에서 마주친다. 그러다 어느 날, 밖에서 저녁을 먹으려 심증만 갖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같은 고민을 공유하게 된다. 각자의 아내와 남편이 바람을 핀다는. 공통분모라는 게, 참 별스럽기도 하지만, 살다보면 이런 일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는 요즘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주 만나고 서로에 대한 마음이 깊어진다. 양조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두 사람은 만나서 밥을 먹고 대화를 조금 하고 그냥 같이 오래 앉아있다. 사생활이라곤 없는 아파트 주민의 눈을 피해서 양조위는 글을 쓰느라 호텔방 <2046>!호를 얻는다. 거기서도 그들은 대화를 조금하고 그냥 같은 공간에 함께 앉아있다. 그 호텔방으로 처음 장만옥이 찾아가는 날의 갈등을 카메라는 잘 잡아낸다. 위로 올라가는 발걸음과 다시 계단을 달려내오는 모습. 그리고 복도 끝에서 방으로 걸어갈 때의 망설임.
그리고 집 근처 골목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 남자가 먼저 내려서 걸어가고. 서로의 배우자한테 다른 사람이 있는 걸 확인하는 걸 연습하거나 헤어지자고 말하는 연습을 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이유가 배우자의 외도였고 두 사람의 짧은 대화 주제는 주로 그 해결책 모색이라니.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숨겨진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유추하면 가슴이 아릿하다. 배경이 60년대라는 걸 감안하면 두 사람의 애틋한 감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이해가고. 또 살다보니 사람이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사는 것도 아니니까, 저들이 왜 그러나도 이해하게 되고. 미묘한 감정 변화를 포착하는 게 중요한 영화인데 이 시절 왕가위 감독은 뛰어난 연출력으로 정점을 찍었구나, 하는 만감이 교차하는 영화다. 게다가 장만옥의 아련한 표정과 내부에서 올라오는 오열을 참는 눈빛과 여전히 멋진 흔들리는 눈빛의 소유자, 양조위.
이 영화를 보면서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란 단편 소설이 내내 떠올랐다. 아무런 사건 없이 한 남자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서재로 가서 이야기를 하거나 그 남자가 없을 때 잠이 들기도하고. 본인도 무슨 감정인지 모르다가 남자가 죽고 나서 펑펑 우는 이야기인데. 이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친구한테 읽어보라고 줘버렸다. 친구는 지루해서 못 읽겠다고 했고. 하지만 돌려받진 못하고 문득문득 그 책이 없는 게 아쉬워서 새로 주문해야지, 하고 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