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하여 마카롱 에디션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1.

마카롱 에디션이라고 '사랑에 관하여'란 제목을 달고 나오고 표지도 사랑의 달달함을 연상시키는 꽃분홍색이다. 고전을 이런 식으로 포장하는 게 옳은가에 대한 회의와 이렇게라도 포장해야 속아서 고전을 사는 이도 있을 테니, 하는 적절한 타협의 시선을 던지며 씁쓸하다. 개인적으로는 카페나 지하철에서 꺼내 읽기 조금 민망-.-

 

2.

표지가 아무리 기만하려고 해도 체호프 단편집이라는 걸 잊지말자. 총 9편의 단편인데 단편 속에서 기나긴 인생의 흥망성쇠가 우의적으로 담겨있다. 그러니 체호프지. 단편은 감상을 적기가 참 애매한데 인상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좀 보면

 

먼저 <검은 수사> 남녀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권태로 접어들어서 서로한테 치를 떨며 증호하는 과정이, 짧은 이야기 속에 녹아있다. 남자는 결혼 전에도 검은 수사의 환영을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환영을 본다는 게 그 어느 누구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남자고, 오히려 그 환영은 여자와 대화를 할 때, 활기와 열정을 불어 넣기도 했다.

 

"난 미쳤고 과대망상증에 걸렸었지. 하지만 대신 즐겁고 활기차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했어. 난 재미있고 특별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이제 더 논리적이고 더 근엄한 사람이 되었겠지만 대신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단 말이야. 난 평범함 그 자체야. 사는 게 지겨워...아, 당신들이 나를 얼마나 잔인하게 다뤘는지 알아? 그래, 난 환각을 봤어. 하지만 내가 누구한테 피해를 줬나? 대답 좀 해보라고. 그레 누구한테 피해를 줬지?"(115)

 

남자(코브린)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고 그를 바꾸려는 아내와 아내 주변의 노력으로 남자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는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지 못하면서 한때 가깝고 사랑스러웠던 사람이 괴물처럼 보인다.

 

체호프는 이런 지점에서 일종의 해결책 내지는 구원을 죽음에서 보는 것 같다. 죽은 이의 얼굴에서 "지복의 미소"란 표현을 쓴다. 또 다른 이야기 <상자 속의 사나이>는 죽어서 관에 누운 남자를 묘사하면서, "관에 누워 있는 그의 표정은 유순하고 유쾌하며 심지어 신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상자에 자기를 담아준 것을 기뻐하는 듯햇지요. 그래요, 그는 꿈을 이룬겁니다!"(164)

 

 

체호프는 사랑을 믿지 않는 거 같다. "인간이 자기 이상에 사로잡히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거죠."(177)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 말하고 나는 아-멘!을. 표제 이야기 <사랑에 관하여>는 각자 가정이 있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이들이 사랑이란 애틋한 감정을 오랜 기간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이 결혼제도 속에 함께 하지 못해서 서로에 대한 환상을 계속 유지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의 완성은 이별이란 말씀에 체호프도 동참한다.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에서 그녀를 끌어내 똑같은, 어쩌면 더 일상적인 삶으로 데려가서 어쩌겠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내가 병이 나거나 죽으면, 아니 그저 우리의 사랑이 식어버리면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199)

 

3.

체호프는 사랑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표지처럼 달달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체호프의 글의 전반적인 톤이 대체로 요즘 날씨같다. 그냥 기온이 높은 게 아니라 대기가 습기를 잔뜩 머금고 뿌연 공기로 둘러싸서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더위. 마치 이 더위가 영원히 계속 될 거 같은 착각을 줘서 문득문득 짜증이 솟구치려는 그런 미묘한 지점. 아열대같은 여름이 끝이 나는 것처럼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는 끝나고 맙니다."(201)라는 비극적이고 체념적 위안을 던진다.

 

"사랑할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202) 남자가 평생의 여인을 떠나보낸 후 얻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깨달음이란 뭔가? 늘 너무 늦게 찾아와서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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