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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2013년 4월
평점 :
몸이 일정 체온을 유지하느라 대기의 더위와 싸우는데에너지를 다 쓰는 것만 같은 힘든 여름날, 로베르트 무질이라니. 오히려 몸이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니까 정신은 더 또렷해지는 것도 같기도. 무질을 읽으면서 습한 여름날 무질의 글과 함께라니 나쁘지 않아,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 <특성 없는 남자>는 문장마다 비유고 언어 논리를 파괴하는 문장들로 가득 차 있어서 읽어내기 쉽지 않다. 몇 년 전 읽는데 한국어 번역판을 읽는데 실패하고 영문판을 샀다가 그 두께에 놀라 밀쳐두었다. 슬금슬금 뇌근육이 간지러운 8월에 책을 다시 손에 들었다. 1권을 다 읽고 감상을 적으려고 밑줄 치거나 접어논 부분을 다시 보면 내가 이 페이지를 읽었나, 하고 새롭게 다가오는 글귀들로 가득 차 있다.
소설이 출판된 게 1930년대인데 놀랍게도 역사는 반복되고, 역사의 반복을 꿰뚫는 직관과 통찰을 지닌 작품은 시간을 초월해서 읽힌다.
"도처에서 옛것에 도전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모든 곳에서 갑자기 올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이건 중요한 일인데-실용적인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지적인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제휴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억눌림을 당했거나 공적인 삶에서는 발휘될 수 없었던 재능들이 점점 발휘되었다. 그 재능들은 너무도 다양했고, 추구하는 목표도 서로 달랐다. 우월한 자가 숭배되었고, 열등한 자도 숭배되었다. 사람들은 건강한 몸과 태양을 찬양했고, 폐병에 걸린 소녀의 연정을 찬양했다."(96)
"사람들은 현실을 얻는 대신 꿈을 잃어버린다. (...)유능해지기 위해서는 굶주리거나 꿈을 꾸어선 안되고, 스테이크를 먹고 움직여야만 한다.(67)
이런 상황이 어디 30년대만의 이야기일까.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답게 밀도 높은 문체와 냉혹한 시선으로 서늘하다. 더불어 나는 사람이나 상황을 볼 때, 내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어떤 특징을 잡아내는 걸 즐기는데 무질의 글을 읽다보면 아주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순히 거주자들의 성격으로 설명하는 것은 틀리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한 국민은 적어도 아홉가지 성격, 다시 말해 직업적, 민족적, 국가적, 계급적, 지역적, 성적, 의식적, 무의식적, 그리고 개인적 성격들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기 안에 통합시키지만 그것들이 사람들을 해체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인간은 이 많은 흐름에서 생겨난 조그만 협곡에 불과하며, 이 협곡으로 그 흐름들은 모여들었다가, 다시 다른 시내로 다른 협곡들을 채우기 위해 를러나간다. 그래서 모든 지구 위의 인간들은 열번째 성격을 가지게 되며, 그것은 다름아니라 채워지지 못한 방들로서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 열번째 성격인 환상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는데, 단 한가지만은 허용하지 않는다, 즉 적어도 나머지 아홉가지 성격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허용하지 않는다."(58-59)
이런 글만 보면 소설보다는 시론을 읽고 있는 거 같지만 소설이라는 형식에 맞게 나름 줄거리가 있다. 울리히라는 특성 없는 남자가 특성 있는 아버지가 있고(아마도 자전적인 거 같고) 특성 없는 남자가 만나는 특성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파편처럼 나열되어 있다. 울리히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개인과 개인이 속한 사회의 구조적 매커니즘을 탐구한다. 가령 여성혐오 살인을 한 남자를 통해 심리학을 조롱하고 법질서의 모순, 그리고 언론의 태도를 묘사한다. 또 모두가 간과하는 범죄자의 심리를 들여다 보기도 한다. 또 천재성에 몰입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과정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고급(?) 문화에 대한 과도한 열정으로 자신이 천재라고 믿는 남자보다 더 피아노 연주를 잘 하게 되었는데도 불행한 여자. 또 평행운동이란 실체없는 개념을 통해서만 평화로울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런 주장을 진심으로 믿는 사교계의 여왕과 그 주변. 마치 창조경제란 실체없는 개념을 신봉하는 것같은 걸 특성 없는 남자는 간파한다.
울리히란 남자는 왜 특성이 없어야 했나. 특성 없는 사람은 어디에도 쏠리지 않고 관찰자의 입장이 될 수 있기에 그런 게 아닐까.
28장 제목이 "생각을 업으로 삼는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은 건너뛰어도 좋은 장"이다. 글의 전반적 분위기는 유머가 전혀 없는 저예산 독립영화같은 분위기인데 유독 소제목이 유머로 넘친다.
"머리가 더 좋아지면 질수록, 머리의 존재는 더욱 희미해진다. 사유의 과정이 진행중일 때 그것은 아주 초라한 상태가 되며, 마치 두뇌의 모든 주름이 산통을 겪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났을 때 그것은 누군가 사유해온 것들이 유감스럽게도 비인간적인 것이 돼버린 것을 경험할 때처럼 더 이상 사유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때 사유는 외연과 마주치게 되며 세상과 소통하는 양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198)
재미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대체로 수긍할 만한 말이 책 속 가득히 차 있다. 특성 없는 남자를 다 읽었을 때 쯤, 몹시 특성 있는 여름의 기세도 수그러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