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노동의 이유를 묻다 주니어 클래식 6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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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니어 클래식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왔는데 주니어 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아주 훌륭한 입문서다. 자본주의의 탄생과 변화를 쫒으면서 심리적 동기를 찾으려는 베버를 쉽게 풀어썼다. 뒤늦게 베버를 읽으려고 마음 먹고 있던 차에 저자 덕분에 한결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2. 자본주의 생성을 종교라는 문화적 맥락에서 본다.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등장하면서 성서 해석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등장했다. 종교개혁 이후의 신교의 분열을 간략하게 정리했는데 읽으면서 저자가 그랬듯이, 나도 내 이십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종교에 관한 책들로 씨름했 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그 때로. 지금도 역시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맞아 그랬었지..하는 반가운 끄덕임 속에 다시 한번 간략한 계보를 홅을 수 있어 즐겁다.

21세기에 종교는 지름신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노동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구원의 수단이었다면 소비사회에서 노동은 지름신을 받들기 위한 행위로 전락한다. 시간은 돈이라는 등식은 현대인에게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명제다. 3부의 현대 사회에 관한 글은 사실 조금 약하지만 주니어 클래식이란 점을 생각하면 태클걸고 싶지 않다.

3. 난 참 이율배반적 인간이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형 인간이다. 내 생업도 자본주의형 인간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시간과 지식을 파는 거다. 그들의 심리를 부추기기도 한다. 때로는 내 노동력에 감사하지만 때로는 내 노동력에 혐오를 느끼기도 하는 싸이클을 반복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 노동에 대해 현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근대적(저자의 말에 따르면, 살만큼만 일하면 된다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내 분열적 삶은 바로 노동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이중적 가치 때문에 생긴다. 한편으로는 노동에 매진해서 지름신의 신도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한쪽에서는 지름신에 대한 저항이 존재한다. 남들과 같고 싶지 않은 자의식이 저항의 양분이다. 부를 위해 일하는 이들은 자본주의 하급 개념에 영혼을 갉아먹히고 있다. 그들을 보면서 내가 하는 일은 영혼을 파는 이들을 피하는 수동적 자세를 취한다. 나 역시 자본주의에 순응하고 이용하는 인간이면서 말이다. 그래서 때때로 괴테의 말에서 위안을 삼는다.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적어도 나는 노력은 하고 있잖아,하고 비겁하고 게으르게 자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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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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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소설을 읽으며 늘 궁금한 게 있다. 왜 그의 소설들은 이기호나 김경욱의 소설보다도 더 인기를 얻는 것일까. 김영하의 소설은 물론 재미있다. 이기호와 김경욱의 소설의 재미에 관해 말하자면 김영하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삶에 대한 통찰력도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읽은지 두 주가 돼가는데 흔적을 남기지 않아 서가로 가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누워 뒹구는 책을 오늘은 집어넣으련다. 퀴즈쇼는 유감이 많다. 소녀 취향적이라고나 할까. 화자인 이민수는 엄마 얼굴도 모르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 자기 밖에 모르는 여친과 헤어진 후 인터넷 퀴즈방에서 만난 서지원과 만난다. 서지원은 이민수의 모성 결핍을 돌봐준다. 이 무슨 시츄에이션이냐.

작가의 말에서 이십대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서 썼다고 했다. 이십대일 때는 그 아름다움에 대해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가장 아름다워서 평생 그리운 때일게다. 젊음이라고 총칭하기에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가능성이 충만하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자칫 오만으로까지 보일 수 있는, 미래를 걱정하지만 실제로는 질주하지 못하는 그런 연령층. 내 이십대를 돌아보면 불안했지만 불안의 실체를 몰랐고 꿈을 꿀 수 있었고 사랑도 했었다. 당시에는 풍요롭다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두고두고 꺼내보게 되는 그런 시절.

민수는 자발적 백수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어른 아이다. 시간이 흐르는대로 살아왔다 더 이상 시간의 흐름대로 살 수 없는 계기를 맞이한다. 유감스럽게도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그의 손에 떨어진 경제적 압박이다. 세상으로 나와 몸을 움직여서 밥값을 벌어야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준비되어 있지않고 경제적 시각에서 보면 잉여 인간에 편입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불안의 정체 중 한 요인일 수 있지만 민수는 그런 걸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고시원 옆방에 살면서 9급 공무원 준비를 하는 옆방녀를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으니까. 그가 유일하게 관심있고 자신있는 게 퀴즈인데 퀴즈란 인간의 다른 많은 일들처럼 상당히 정치성을 필요로 한다. 답을 안다고 다 맞출 수 있는 게 아니다. 타이밍과 상대의 심리를 읽는 등, 변수를 활용할 줄 알아하는 게 퀴즈다. 어떤 면에서 다른 모든 인간사보다 잔인할 수 있다. 진심이 통하지 않는 게임일 수 있으니까. 민수는 빨리 퀴즈의 원리를 알아차리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민수는 달리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를 걷고 있다.

이십대의 특권 중 하나는 빈둥거리며 제자리 걸음을 해도 이해받을 수 있다는 거다. 잉여 인간으로 마무리하지 않을 거란 기대가 이십대에는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민수가 사랑을 받는 이유도 이러할 수 있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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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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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class이란 말은 맑스주의의 죽음과 함께 모호해졌다. 오늘날 계급 담론을 이야기하면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인다. 물론 한 개체군을 계급이란 말로 묶기에 사회가 다양해지고 무한 증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계급이란 말 자체가 모호한 거 같다. 벨 훅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광고나 대중문화는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사용하면 그들과 같아질 수 있다고 부추기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지금 계급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헛된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

벨 훅스에 따르면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며 은폐될 뿐이지만 벨 훅스가 계급에 관한 정의는 아쉽게도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성gender과 인종을 포함하는 가장 포괄적 의미를 지닌 말로 사용되고 있다. 성 담론과 인종 담론이 맑스주의가 죽은 후에 등장한 걸 보면 계급 담론은 성과 인종의 담론의 뿌리일 수 있다.

벨 훅스의 개인적 경험은 이 모든 담론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흑인 여성이고 빈민층이었던 저자는 여성주의 내에서 권력의 역학을 비판하고 수적으로 미국 대부분의 빈곤층을 차지하는 백인들은 간과된 채 흑인=빈곤층이라는 인식을 퍼트린건 언론이라고 한다. 미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빈민은 투명인간으로 여겨진다. 즉 흑인 빈민층과 백인 빈민층은 동급으로 보기보다는 흑인 문제로 귀결짓는 논리가 미국사회에 퍼진다. 즉 인종 담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성과 인종 뒤에 숨어있는 계급 담론을 끄집어내는 것은 벨 훅스에게는 당연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계급 담론을 적용할 때 더 애매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특권층의 개념은 무엇인가? 상류층의 개념은 무엇인가? 부의 크기? 권력의 크기? 부와 권력은 함께 오지 않나? 뭐 이런 공식을 끄적거리다 보면 계급란 말은 뿌옇게 흐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계급 의식이 들어있다. 계급 사다리를 올라가려는 욕망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 부동산 과열, 사교육 팽창이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한 대표적인 티켓이다.

영어회화 학원을 다닐 때였다. 강사가 뉴욕커였는데 한국인들이 수십만원 짜리 핸드폰을 사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오십만원 짜리를 살거면 이십 오만원 짜리를 사고 이십 오만원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면 되지 않는가라고. 백만 번 옳은 말이다. 오십만원 짜리 핸드폰이 뭐가 필요한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나를 위해 백만원이 넘는 가방은 쉽게 사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십만원 기부하는 일은 좀처럼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다. 이런 일이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걸 알지만 말이다. 그럼 왜 이런 부조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가. 벨 훅스는 이렇게 말한다. "부가 위험한 것은 사람을 나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자기 밖에 모르는 병적인 자기도취 상태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부동산을 탐욕과 부의 축적 수단이 아니라 더불어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라보고, 교육을 계급상승을 위한 문으로 보는 게 아니라 권력을 가진 타인에게 조종 당하지 않고 비판적 시각을 갖고 주체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 의식이 자리잡을 때 계급이란 말은 진짜로 죽은 말이 되겠지.

곧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있다. 교육감 후보들의 주장은 사교육을 줄이면서 공교육의 기능을 강화하는 데 만장일치한다. 입시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공교육의 강화는 입시기능의 강화라는 건 뻔한 일이다. 고로 사다리적 기능에는 모두 의견이 일치한다고 하겠다. 계급 사다리를 걷어차는 건 요원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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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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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궁금하다. 요즘 십대들, 특히 고등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돌이켜보면, 십대 때 많은 생각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여물지 않아 공중에서 흩어지고 부서지는 그런 그림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도 같다. 입시를 앞두고 스트레스 때문에 병원을 들락거리며 가끔 영화보고 소설읽는 것으로 낙을 삼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갈망했던 시기기도 했던 것 같다. 완득이를 보면서 내 십대를 꺼내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십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인지 완득이의 심드렁한 태도가 어떤 때는 아이 같지 않기도 했다. 십대 때도 자신만의 우주가 있을텐데 나는 자꾸 기성세대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래, 난 늙었구나.

2. 또 궁금하다. 요즘 십대들은 무슨 성장 소설을 읽을까. 난 얄개 시리즈를 읽기 시작해서 수 타운샌드의 <비밀일기>를 탐독(?)했었는데. <비밀일기>의 주인공(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쩝) 역시 심드렁한게 완득이란 닮았다. 아바를 즐겨듣고 제인 오스틴을 읽었던 영국 남자 아이였는데. 이 아이 때문에 제인 오스틴을, 나도 처음 읽었다. 완득이 때문에 킥복싱 배우러 찾아가는 십대도 있을까? 십대들이 완득이를 많이 읽을까? 십대들이 완득이의 정신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3.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쓰는 재주를 가진 작가는 대단하다. 소설은 다른 어떤 장르의 글쓰기보다도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 뻔한 이야기를 독특하게 전달해주는 방법에 따라 독자는 울고 웃는다. 완득이를 읽으면서 내내 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어제 잠자리에서 읽은지라 오늘 하루종일 눈이 부어 뻑뻑했다. 완득의 독백 속에는 웃음이 양념처럼 배여있다. 처음에 양념맛을 보고 웃다보면 진짜 맛을 느끼는 데 이게 참, 눈물을 뺀다. 각종 아이러니한 상황에서도 완득이는 한탄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아직 순수해서 그럴까. 이십대를 위한 소설은 쓴 맛이 나는데 말이다. 착한 사람들만 나와 현실감이 없긴 하지만 그게 완득이의 매력이다. 거짓이일지라도 희망을 심어주는 책이 희망을 잃어버린 어른에게도 가끔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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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연못 2008-11-28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일기 주인공 --> 애드리언입니다 ^^

넙치 2008-11-29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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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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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맥카시의 책은 처음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읽지 않았다. 영화의 함축적 풍경들이 글로 부서질까봐 책을 읽는 게 두려웠다. 프랑스 누벨 바그 시절 영화화된 하드 보일드 미국 소설이 별 매력이 없듯이, 그럴 거란 짐작만으로. <로드>는 알라딘 메인의 힘이 크다. 며칠 내내 노출시킨 출판사의 의도를 기꺼이 따라 별 기대없이 주문했다. 이따금씩 타인의 의도를 따라 별 기대를 하지 않을 때 기쁨이란 걸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책을 읽고 찾아 본 맥카시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삼십 대에 아들을 갖는 건 평범한 경험이지만 그의 나이에 아들을 갖는 건 특별한 일이다. 삶에 대한 중압감이 있지만 삶의 기쁨이기도 하다고. 이 책은 그가 아들을 위해서 썼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지친 영혼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33년 생인 그가 보는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첫 장부터 끝까지 죽음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얼어붙은 길가 냇물 건너편의 벤치 같은 땅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바람이 얼음에서 재를 날렸다. 얼음은 시커멨고 냇물은 숲을 구불구불 통과하는 현무암 길처럼 보였다." 곳곳에 얼음이고 재가 날린다. 때로는 오솔길을 혼자 헤메기도 한다.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장애를 만나면 남자가 소년을 지킨 것처럼 자신을 위해 손에 피를 묻혀야 할 때도 있다.

미국의 건국 이념에 깔린 신에 근거하는 세계는 항상 낙원은 아니다. 신도 언제나 자비로운 인물은 아니다. 자신의 말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에게 수치심을 벌로 주었고, 말 안 듣는 인간을 다 쓸어버리는 대홍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 판도라에게는 희망이라는 벌을 내렸다. 소설 속 남자는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을 말해준다. 악에는 폭력적 대항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가. 신이 그랬듯이 지극히 주관적이다.

이 소설의 큰 축은 남자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소년을 구하기 위해 선과 악을 판단한다. 남자와 소년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악이다. 소년은 끊임없이 남자에게 묻는다. 우리는 죽나요? 사람을 죽일건가요?하고. 소년에게 악이나 공포는 희미하다. 남자가 소년을 위해 보호하기 위해서 한 행동 때문에 오히려 소년은 악과 공포를 학습한다.

남자는 세계를 어둠으로 단정한 상태에서 살아간다.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일이 가장 용감하다고 여기고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의 세계는 이렇지만 남자는 소년에게만은 행운과 희망을 심어주려고 한다. 어쩌면 내가 행운과 희망을 믿고 싶기 때문에 결말에서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주검을 뒤로하고 낯선 사람이 내민 손을 잡는 소년의 마음, 즉 두렵지만 낯선 사람과 더불어 혼자 죽은 아버지가 지켜낸 실존적 자세를 유산으로 받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남쪽으로 걸어가야하는 여정. 소년은 이 여정이 고단하다는 걸 모른다. 더 이상 소년일 수 없는 나는 이 고단함에 체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고 싶다. 잠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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