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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계급class이란 말은 맑스주의의 죽음과 함께 모호해졌다. 오늘날 계급 담론을 이야기하면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인다. 물론 한 개체군을 계급이란 말로 묶기에 사회가 다양해지고 무한 증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계급이란 말 자체가 모호한 거 같다. 벨 훅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광고나 대중문화는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사용하면 그들과 같아질 수 있다고 부추기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지금 계급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헛된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
벨 훅스에 따르면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며 은폐될 뿐이지만 벨 훅스가 계급에 관한 정의는 아쉽게도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성gender과 인종을 포함하는 가장 포괄적 의미를 지닌 말로 사용되고 있다. 성 담론과 인종 담론이 맑스주의가 죽은 후에 등장한 걸 보면 계급 담론은 성과 인종의 담론의 뿌리일 수 있다.
벨 훅스의 개인적 경험은 이 모든 담론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흑인 여성이고 빈민층이었던 저자는 여성주의 내에서 권력의 역학을 비판하고 수적으로 미국 대부분의 빈곤층을 차지하는 백인들은 간과된 채 흑인=빈곤층이라는 인식을 퍼트린건 언론이라고 한다. 미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빈민은 투명인간으로 여겨진다. 즉 흑인 빈민층과 백인 빈민층은 동급으로 보기보다는 흑인 문제로 귀결짓는 논리가 미국사회에 퍼진다. 즉 인종 담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성과 인종 뒤에 숨어있는 계급 담론을 끄집어내는 것은 벨 훅스에게는 당연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계급 담론을 적용할 때 더 애매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특권층의 개념은 무엇인가? 상류층의 개념은 무엇인가? 부의 크기? 권력의 크기? 부와 권력은 함께 오지 않나? 뭐 이런 공식을 끄적거리다 보면 계급란 말은 뿌옇게 흐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계급 의식이 들어있다. 계급 사다리를 올라가려는 욕망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 부동산 과열, 사교육 팽창이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한 대표적인 티켓이다.
영어회화 학원을 다닐 때였다. 강사가 뉴욕커였는데 한국인들이 수십만원 짜리 핸드폰을 사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오십만원 짜리를 살거면 이십 오만원 짜리를 사고 이십 오만원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면 되지 않는가라고. 백만 번 옳은 말이다. 오십만원 짜리 핸드폰이 뭐가 필요한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나를 위해 백만원이 넘는 가방은 쉽게 사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십만원 기부하는 일은 좀처럼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다. 이런 일이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걸 알지만 말이다. 그럼 왜 이런 부조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가. 벨 훅스는 이렇게 말한다. "부가 위험한 것은 사람을 나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자기 밖에 모르는 병적인 자기도취 상태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부동산을 탐욕과 부의 축적 수단이 아니라 더불어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라보고, 교육을 계급상승을 위한 문으로 보는 게 아니라 권력을 가진 타인에게 조종 당하지 않고 비판적 시각을 갖고 주체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 의식이 자리잡을 때 계급이란 말은 진짜로 죽은 말이 되겠지.
곧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있다. 교육감 후보들의 주장은 사교육을 줄이면서 공교육의 기능을 강화하는 데 만장일치한다. 입시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공교육의 강화는 입시기능의 강화라는 건 뻔한 일이다. 고로 사다리적 기능에는 모두 의견이 일치한다고 하겠다. 계급 사다리를 걷어차는 건 요원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