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왕가위 감독, 노라 존스 (Norah Jones)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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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네오이마쥬에도 올랐습니다 - http://neoimages.co.kr/news/view/1726

 왕자웨이의 9번째 장편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만들어진지 일년이 지나서 한국에 왔다. 대부분의 반응은 서양 물 먹은 왕자웨이가 ‘나쁜’나르시즘에 빠졌다고들 한다. 여전히 왕자웨이의 영화 속에선 나레이션과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음악, 황홀한 스텝프린팅, 그녀들의 발 등이 영화를 수놓고 있다. 그의 영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반복되고, 타락천사가 중경삼림의 반복처럼 보이고, 2046이 화양연화의 반복처럼 보인 것처럼, 그러나 거기에서 더 나아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자웨이의 모든 영화를 조합한 반복처럼 보이려한다.  


  다들 말하듯 이 반복처럼 보이는 영화가 전작들과 다른 건 좀 더 냉랭해진 시선 - 왕자웨이가 바랬듯 미국영화 감독이 왕자웨이 영화를 따라한 것 같은 느낌일 것이다. 허나 난 이 왕자웨이 자신을 따라한 시선, 그러니까 자신의 영화들과 - 기억들과 거리두고 자신의 영화와 기억을 바라보는 점 때문에 황홀한 기분이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미칠듯이 설레이는 중이다. 무엇이? 그의 다음 영화가.

  영화는 거의 의도적으로 전작들을 불러낸다. 제레미(주드 로)의 카페는 미드나잇익스프레스를 카페의 cctv 카메라는 ‘타락천사’의 하지무의 카메라를 영화 속 인물들은 전작의 인물들의 흔적을 길거리들은 화양연화의 길거리를 불러낸다. 심지어 yumejis theme는 약간의 변형을 하여 들려온다. 여기서 끝난게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는 영화는 전작들을 불러오고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그 전작을 본 기억을 불러일으켜 ‘그 기억’과 영화를 보게된다. 허나 이것은 단순한 재반복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건 중화권에서 영미권으로 단순한 변화 속 재반복이 아니라 영화에서 yumejis theme ‘재해석’ 되었듯 영화도 전작들을 ‘재해석’한다.

  cctv카메라와 하지무 카메라의 차이는 주관과 객관의 차이다. 하지무의 카메라는 하지무의 손에 들려 하지무의 주관적 기억을 테잎에 시기고 그가 바라보는 것들을 담아내었지만 제레미의 손에 들려지지 않은 cctv카메라는 고정된 자리를 지키고 벌어지는 일들을 주관적 개입없이 그대로 담아낸다. 여기서 제레미가 주관적으로 할 수 있는 개입은 단지 기억할 만한 것들과 아닌 것들을 분류하고 기억할 만 한 것들을 간직하는 것 뿐이다. cctv카메라의 객관화는 영화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노라존스)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지 않는다. 엘리자베스와 그가 생활했을 집은 멀리서 바라보고 멤피스의 엘리자베스의 숙소 안으로 카메라가 들어가지 않고 외부에서 머무른다.

  또 영화는 내부는 외부를 외부는 내부를 ‘들여다보듯’ 찍혀있다. 내부에서 외부를 들여다 보는 것은 이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정말 그렇게 찍혔다. 카페나 바가 아닌 길 위는 카페나 바와 별반 다를 듯 없어 보인다. 외부가 내부인 듯 한 인상이 강한데 지나간 기억(전작의 외부)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철저히 객관적인 위치를 고집한다. 영화가 불러들인 전작의 흔적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다른 각도에서 보거나, 반성하거나, 그것을 재해석하여 다시 나열하는 것이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중경삼림이나 타락천사처럼 이야기를 분리하여 진행해도 될 듯 보인다. 그러니까 중경삼림이나 타락천사처럼 나눠질 이야기가 나눠지지 않아도 된 것은 엘리자베스의 존재 때문이다. 뉴욕을 떠난 엘리자베스의 여행은 과거의 왕자웨이로의 여행이다. 영화의 후반부 제레미를 다시 찾은 엘리자베스가 제레미의 카페에서 태근하는 종업원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엘리자베스가 문을 바라보는 숏 바로 다음에 과거의 머뭇거리는 모습의 숏이 보이고 다시 엘리자베스에게로 넘어온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의 모습과 직접 목격한다. 엘리자베스가 직접 자신의 과거를 목격했듯  엘리자베스의 여행은 시간에 흐름에 견디지 못해 파멸하고 그 빠른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부리고 과거를 지우기 위해 노력하고 과거를 무시하고 다가오는 시간을 믿지 않는 왕자웨이 자신이 자신의 전작 속 인물들을 마주보는 여행이다. 엘리자베스 - 왕자웨이는 그들을, 그 기억들을, 그 시간들을 다시 불러들여 그것을 보고 나아갈 준비를 한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가 그토록 차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시간과 같이 흘러가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전철과 버스는 자신의 힘이 아닌 강제적으로 떠밀린, 흐름을 인정하지 않아야만하는, 도착지가 불분명한 시간이다. 허나 엘리자베스가 직접 몰 차는 그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인 수용의 태도이거나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을 길을 만들려는 의지다. 또 제레미가 기억 속 그녀와 조우하는 씬이 있다. 기억의 표상인 그녀와 마주친 제레미는 모아놓은 키를 돌려주고 버리게 된다. 과거와 마주한 후 제레미와 엘리자베스와 왕자웨이는 변한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전작들과 변한 것 중 하나가 ‘고요함의 순.간.’이 생긴 것 같다. 철저히 비교하지는 않았지만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전작이였으면 음악을 쓸 순간 조용히 응시하거나 세상의 소리를 그대로 듣는다. 그 시간의 흐름을 외면하기위해 음악을 높이 올리고 애도하기위해 울리던 음악들은 정적 속에서 그것을 응시하려는 시선에, 흐르는 시간 속 계속되는 삶의 소음에게 자리를 내준다. 성급한 언급일지 모르나 엘리자베스와 레슬리가 라스베가스로 향하던 중 둘이 식당에서 식사하기 전 인서트와 음악이 나오다 음악이 갑자기 중단되는 지점이 있다. 전의 왕자웨이였으면 이어졌을 음악이 갑자기 멈추는 것은 왕자웨이의 변화의 과정이지 않나 생각해본다.

  변화된 태도로 - 자신의 길을 정할 수 있는 태도로 엘리자베스가 도착한 곳은 제레미와 그가 있는 카페다. 그 카페는 제레미의 그가 말했듯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다. 새 단장을 하고 싶었지만 카페와 맞는 것이 없다는 말에 제레미의 그녀는 생각이 많거나 감상에 빠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카페란 ‘공간’은 과거의 기억으로 남는다. 그대로인 곳에 다시 돌아온 변한 엘리자베스와 그대로인 곳을 지키고 있는 변한 제레미는 지나간 시간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고 침착히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변화하지 않는’ 공간에서 그들은 ‘이제’ 버텨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모르나 변화할 왕자웨이가 도착한 곳이 출발지점이라면 그 곳에서 변화한 왕자웨이가 만들어낼 영화가 무엇일지 정말 궁금하다. 다른 사람의 위치에 서 영화를 만들어 자신을 본 왕자웨이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을 보고 배워가며 다시 생각하고 결국엔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는 더욱 좋게 변화할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왕자웨이의 도약의 징후를 떠나서 엘리자베스와 제레미가 다시 조우한 후 나누는 키스숏 사이에 잠시 나오는 파이가 일으키는 감정의 울림, 내 영혼을 끄집어 내어 제레미에게로 내던져 그들이 느끼는 촉감과 휘몰아치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엘리자베스의 빅클로즈업에 이상한 설레임을 느끼게하는 그 씬만으로도 왕자웨이를 업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자웨이의 필모그래프 중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일 뿐이라고 애써 위안하고 싶은 영화’라기 보단 후샤오시엔의 ‘남국재견’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된다. 왕자웨이의 전작을 타인의 위치에서 꼼꼼히 확인하고 그 흐르는 시간에 대해 좀 더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왕자웨이에게 남은 것은 엘리자베스와 제레미의 키스처럼 황홀한 경지로의 도약 밖에 없으리라 생각된다.

  솔직히 지금 난 내기를 제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 영화가 왕자웨이의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을 알리며 이 영화 이후의 왕자웨이가 굉장한 곳으로 점핑할 것인가? 하지 못 할 것인가?를 두고 내기를 하고 싶다.

  물론 난 ‘그가 굉장한 점핑을 한다’에 신형 재규어라도 걸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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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일 2009-07-18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다가 너무 졸려서 꺼버렸다능.ㅋ

mechlab 2009-12-28 16:06   좋아요 0 | URL
어쩌라능.ㅋ

리버 2010-01-26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통해서 왕가위에 대한 필자의 무한기대는 느낄 수 있지만 도대체 뭐가 점핑의 징후인지는 와닫지 않네요.. 그럼에도 그의 다음영화가 궁금하긴 합니다. 무척!
 
추격자 (2disc) - 일반판
김윤석 외 감독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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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출장 안마를 하는 두 여인이 사라지고 전직 형사인 포주 엄중호(김윤석)은 자신의 종업원인 미진(서영희)가 받으러 간 손님이 두 여인의 손님의 번호와 일치함을 알아차리고 그를 추적한다. 추적 도중 엄중호는 손님 지영민(하정우)가 연쇄 살인범임을 알게되고 갖은 고생 끝에 그를 잡게된다. 줄거리는 굉장히 단순하다. 영화 제목 추격자에서 자를 뺀 추격이란 단어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허나, 이 단순한 줄거리는 굉장히 이해하기 힘들게 전개 된다.

왜 엄중호는 지영민을 끈질기게 추적하는가? 영화에서 이 질문에 해당하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일단 유사한 두가지 답. 첫 번째, 사라진 두 여인에게 빌려준 돈에 대한 이유. 허나 이 답은 지영민의 누나를 찾은 후의 엄중호의 추적과 점점 쌓여가는 울분을 설명하지 못한다. 두 번째, 미진의 딸과 동행으로 생긴 ‘설명 불가능한 감정’. 과연 그 감정일까? 그렇다면 엄중호가 미진의 딸에게 행한 행동은 무엇인가? 아이에 면전에 대놓고 부모를 욕보이고 부모의 감추고 싶은 부분을 까발리고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방치하는 엄중호의 행동들. 그리고 엄중호 자신은 여자들을 팔아먹으며 살며 미진과 다른 두명의 여성을 죽음으로 내던진 장본인이다. 그것에 대한 미안함인가? 그렇다면 왜 엄중호는 미진만을 외쳐되는가? 엄중호가 미진의 딸을 보며 짓는 표정과 느끼는 감정은 정말 ‘설명 불가능한 감정’이다. 어느 것 하나도 엄중호의 추적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이 애매한 행동은 감독의 의도는 분명 아니다. 나홍진 감독의 말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은유를 하기보다는,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길 원했다.” 그렇다면 엄중호가 지영민을 추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엄중호의 추적의 원동력은 분노다. 추적의 이유는 없지만 분노의 이유는 있다. 그 분노는 어디서 펼쳐지는가? 개새끼들이 우글되는 도시 서울에서. 엄중호와 지영민의 첫 만남. 기적처럼 일어난 ‘우연한’ 교통사고. 그 사고에서 엄중호는 냄새를 맡았고 그와의 추격은 시작된다. 이건 결국 그들의 우연한 만남이 보여주듯 서울이란 도시에 모여사는 개들은 누구나 엄중호와 지영민이 될 수 있다. 이 장면이 부족하다면, 엄중호가 미진의 딸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차를 몰고 병원에서 나올 때 누군가의 차안에서 엄중호의 차를 목격하는 숏을 볼 수 있다. 그 숏에서처럼 추격자의 서울에서는 광견이 미쳐 날뛰는 곳은 어느곳이든 가능하다. 단, 조건은 서울이다. 감독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엄중호가 지영민의 누나를 찾아간 시퀸스는 정말 순간처럼 지나간다. 엄중호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서울로 온다. 서울을 벗어 나게되면 원동력은 사라지고 이야기의 엉성함이 들어나기에 감독은 쫓기듯 서울로 온다.

 



 


추격자 속 서울은 분노의 공간이다. 광견들이 우글되는 분노의 공간이며 서로 자신의 배를 체우려 혈안이 되어있는 - 이윤추구를 위해서만 몸을 움직이는 공간이다. 영화 속 거의 모든 인물들은 이윤 추구를 위해 움직인다. 경찰은 얼굴에 똥을 맞은 시장을 덮을 만한 사건이기에 지영민에게 관심을 보이고 엄중호는 사라진 여인들의 돈을 위해 지영민은 성적 쾌락을 위해 움직인다. 또 서울이란 공간은 엄중호가 찾아간 또 다른 포주가 말했듯 누군가 사라져도 찾을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삭막한 곳이며 경찰들이 항상 말한 것처럼 “그 많은 시체를 설마 집 마당에 파묻겠어?”란 의문에 긍정을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허나, 난 서울이 분노를 생성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단지 서울은 분노가 팽배한 공간이다. 이 영화 속 분노의 시발점은 누구인가? 그건 감독이 끝끝내 다가가지 못한 존재. 바스트 숏 이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등장 비율은 굉장히 적으면서 전체적으로 영화를 장악하고 있는 존재 ‘서울 시장(市長)’이다. 감독은 서울시장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럼으로 진정한 분노의 대상인 서울시장을 망치나 정으로 때려죽일 수 없다. 그로인한 분노로 인해 시장만큼 개새끼인 엄중호와 지영민을 찾아내고 그들을 추적하는 것이다. 엄중호와 지영민의 추적게임의 결론은 지영민 체포라기 보단 서울시장과 엄중호의 조우다. 서울시장은 엄중호를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차 속으로 뛰어든다. 그는 왜 놀란 것인가? 그건 단지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정한 개새끼 같은 모습을 보고 시장은 놀라 숨는 것이다. 혹은 감독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 영화에 - 감독에게 동의를 할 수 없다. 그건 서울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감독이 서울시장으로 은유하는 이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난 이 영화의 몇 안되는 장점 중의 하나가 서울을 개싸움판으로 본 것이라 생각하고 또 서울시장으로 은유한 이가 직급이 격상되어서 내가 한국에 사는 것에 대한 회의를 느끼곤 한다.

내가 이 영화에 동의할 수 없는 건 우선 영화 속 폭력 묘사의 과잉이다. 결국 미진을 죽여야 했나? 난 해피엔딩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것과 다른 차원의 문제다. 미진의 살해 장면에서 감독은 유난히 지연시킨다. 끝나지 않을 듯한 이 끔찍한 살해를 온갖 곳에 피 칠하며 길게 늘어뜨린다. 그 다음 이 기나긴 살해 장면만큼 긴, 엄중호의 미진의 사망에 대한 울분의 장면. 이 장면으로 감독은 미진을 위해 우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난 이 장면이 정말 슬프지않다. 음악은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울고 영상은 따로 논다. 이 장면은 단지 폭력의 과잉과 감정의 과잉으로 인한 충격을 바라는 것이다. 그로인해 이야기의 앙상함을 감추고 관객을 엄중호의 행동에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극악의 비윤리적 행태에 경악 할 수 밖에 없다. 이건 나치의 프로파간다와 별반 없다고 생각한다.


또 이 비윤리적인 행태가 극히 단순한 사고에서 표출되었음에 난 더더욱 이 영화에 동의할 수 없다. 영화 속 화면 구성은 눈에 띄일 정도로 평면적이다. 입체적이지 못하다. 또 공간 묘사는 굉장히 분열되어 있고 격투장면에서는 숏이 뒤죽박죽 되어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안양의 지영민의 누나를 찾아간 시퀸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안양 풍경에 대한 묘사를 찾아 볼 수 없다. 또 서울시장이 똥을 맞는 곳인 시장(市場)을 멀리서 바라 볼뿐이다. 이건 영화 리듬의 문제라기 보단 세상에 대한 시선의 빈곤함이라 본다. 또 영화에서 차 내부의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영화 속 모든 차 내부 장면은 차 밖의 풍경의 포커스가 나가 있는 것이다. 서울이란 지옥도를 그리면서 왜 망원에 한정되어 있는 것인가? 차로 서울을 구석구석 훑고 다닐때 왜 그 밖을 보기를 거부하는 것인가?

감독은 평면적인 시선으로 혹은 세상을 너무 모르는 시선으로 폭력으로 치닫는 분노를 부치기려 노력한다. 거짓 해피엔딩은 위험하지만 거짓 언해피엔딩 또한 그만큼 위험하다. 또 그것이 바라는 것이 폭력일때 더더욱 위험하고 사람들이 열광할 때 그 비틀린 분노에 열광할 때 미진의 딸과 엄중호 둘이 남아 있는 마지막 장면을 보는 것처럼 소름 돋는다. 미진의 딸은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그’ 서울에서 ‘그’ 엄중호와 ‘그렇게’ 살 것이다.

난 나홍진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다. 이건 설레임이 아니라 불안함이다.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기술로 지금과 같은 시선을 펼칠까 하는 불안함. 그가 데뷔작과 두 번째 영화 사이의 간극에서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람에서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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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의 서평을 써주세요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한 인간의 삶을 대할 때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알 수 있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위안부 여성의 삶을 느끼고 싶은 분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연민이란 타 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다. 동정이 계급적 의식을 전제한, 타인의 불행에 대한 제도적이고 고양된 슬픔의 베풂이라면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란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동정엔 실천이 따르지만 연민엔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민은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까닭에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는 비극적 이야기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상상력이다.”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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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의 서평을 써주세요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대필 작가의 독백
배홍진 지음 / 멘토프레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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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이 책은 정말 책 표지에 박힌 것처럼 독백의 기록이다. 유령이 유령을 위해 쏟아내는 독백. 형체를 잃은 존재, 목소리만 남은 존재가 쏟아내는 독백이다. 한 유령은 대필 작가란 단어 뒤에 가려진체, 타인의 이름 뒤에 가려진 혹은 증발된 존재이고, 한 유령은 국가의 정서란 이름 뒤에 가려지고 지워지길 바라는 역사에 똬리를 튼 존재다. 그러니까, 한 유령이 한 유령의 글을 빌려서 또는 한 유령이 한 유령의 역사를 빌려서 쏟아내는 독백을 담은 책이다.

  대필의 뒤에서 박차고 나온 작가, 그러니까 유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작가는 유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역사에서 소멸될 것을 부여받은 강덕경 할머니의 유령 껍데기를 벗기고 온기가 서린 육신을 그려내는 과정을 통해 ‘대필’ 뒤에서 앞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작가 배홍진이 강덕경 할머니를 되살리기 위해, 아니 유령으로 살 것을 강요당한 시간을 온기를 지닌 인간 강덕경의 시간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온 기를 쏟아낼수록, 작가 배홍진의 이름은 뚜렷해진다. 그러니까, 이들은 서로 상친관계이다. 필연이다. 생면부지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인연이 엮이고 엮여서, 배홍진이 강덕경을 온 몸으로 받고, 강덕경이 배홍진의 펜을 스스럼없이 빌릴수록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유령으로 치부될 것을 종용 받던 그들의 목소리는 무게를 지니고 퍼져 우리의 고막을 흔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홍진이 강덕경의 역사가 서린 공간을 찾아가, 허물어지거나, 상실되었거나, 온기가 증발한 공간을 아주 세세하게 그려내고, 그곳에서 느낀 감흥을 주절주절 쏟아내는 과정은 늦은 발걸음으로 인해 상실된 강덕경의 채취를 끄집어내는 안간힘이다. 과거의 공간에 서서 그녀의 자잘한 행동을 그려, 유령이란 껍데기를 벗기고 인간임을 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강덕경의 목소리가 주는 감흥을 묘사하고, 강덕경의 그림의 티끌하나에까지 자극을 받아, 그것을 글로써 쏟아냄으로 강덕경의 숨, 감정, 통증, 온기를 살려내 음울한 문체로 장막을 가르고 강덕경을 우리의 옆으로 옮겨 놓는다. 그렇게 우리의 옆으로 강덕경을 모신 후, 배홍진은 강박적이게 강덕경의 삶을 반복해서 읊는다. 혹여나 누군가 잊기라도 할 듯이. 그 과거를, 그 야산을, 그 일본군을, 그 딸의 죽음을, 그 화재를, 그 투병을 혹여나 누군가 잊기라도 할까봐 소스라치듯 놀라며 반복해 읊는다. 그 반복된 읊음의 뒤의 배경, 그러니까 역사적 배경에 대해, 배홍진은 감흥을 떨치고 건조하게 복기한다. 그 큰 줄기, 항상 앞에 나서 강덕경의 삶을 지우던, 시대 정황을 건조하게 복기하여, 반복해 읊는 강덕경의 삶을 단단히 세우는 것이다. 감히 지울 수 없게.

  그러니까, 배홍진의 말처럼, 책 속의 일련의 과정들은 강덕경이 아닐지도 모른다. 배홍진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발자취를 쫒고, 그녀가 타인에게 들려주고 단지 기록된 것들에 거쳐 듣고, 그녀의 작품을 통해 그녀를 들어다 보기 위해 애쓰며 그려낸 것은 강덕경이 아닐지도 모른다. 배홍진은 그렇게 ‘아닐지도 모름’에서 멈추고, 일련의 과정에서 듣고 보고 느낀 것을 쏟아내고, 단정 짓지 않는다. 이 단정 짓지 않음에서 책은 가치를 획득한다. 작가의 자잘한 행동과 감흥을 강박적으로 기술해 놓았기에, 분명 수다스러운 사소함으로 전락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태도가 짓지 않은 단정으로 인해, 그 태도는 윤리를 획득한다. 배홍진의 안간힘을 통해 우리는 강덕경에 대해 알기를 멈추고, 그녀가 살아온 삶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다. 즉 그는 우리가 함부로 강덕경을 안다고 내뱉으려는 성급한 행위를 저지하는 것이다. 함부로 그 삶의 무게를 안다고 내뱉지 말라. 그리고 작가의 태도는 단순히 윤리를 획득한 것에 그치지 않고, 위안부 여성의 삶의 황폐함과 고독 등의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배홍진의 태도를 함부로 주저하거나 사소하다고 치부해선 안 된다.

  그러니까, 강덕경 할머니의 사후에 출간된 이 책이 우리에게 도착한 이유는 결국, 우리가 그녀 혹은 그녀들의 시간을 느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실들을 통해 알고 자극 받기만 할 것이 아닌 느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느낀 그녀 혹은 그녀들의 시간은 배홍진이 멈춘 위치에서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곳에서 느낀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그녀 혹은 그의 안간힘에 보내는 우리의 최선의 찬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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