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 (2disc) - 일반판
김윤석 외 감독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출장 안마를 하는 두 여인이 사라지고 전직 형사인 포주 엄중호(김윤석)은 자신의 종업원인 미진(서영희)가 받으러 간 손님이 두 여인의 손님의 번호와 일치함을 알아차리고 그를 추적한다. 추적 도중 엄중호는 손님 지영민(하정우)가 연쇄 살인범임을 알게되고 갖은 고생 끝에 그를 잡게된다. 줄거리는 굉장히 단순하다. 영화 제목 추격자에서 자를 뺀 추격이란 단어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허나, 이 단순한 줄거리는 굉장히 이해하기 힘들게 전개 된다.

왜 엄중호는 지영민을 끈질기게 추적하는가? 영화에서 이 질문에 해당하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일단 유사한 두가지 답. 첫 번째, 사라진 두 여인에게 빌려준 돈에 대한 이유. 허나 이 답은 지영민의 누나를 찾은 후의 엄중호의 추적과 점점 쌓여가는 울분을 설명하지 못한다. 두 번째, 미진의 딸과 동행으로 생긴 ‘설명 불가능한 감정’. 과연 그 감정일까? 그렇다면 엄중호가 미진의 딸에게 행한 행동은 무엇인가? 아이에 면전에 대놓고 부모를 욕보이고 부모의 감추고 싶은 부분을 까발리고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방치하는 엄중호의 행동들. 그리고 엄중호 자신은 여자들을 팔아먹으며 살며 미진과 다른 두명의 여성을 죽음으로 내던진 장본인이다. 그것에 대한 미안함인가? 그렇다면 왜 엄중호는 미진만을 외쳐되는가? 엄중호가 미진의 딸을 보며 짓는 표정과 느끼는 감정은 정말 ‘설명 불가능한 감정’이다. 어느 것 하나도 엄중호의 추적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이 애매한 행동은 감독의 의도는 분명 아니다. 나홍진 감독의 말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은유를 하기보다는,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길 원했다.” 그렇다면 엄중호가 지영민을 추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엄중호의 추적의 원동력은 분노다. 추적의 이유는 없지만 분노의 이유는 있다. 그 분노는 어디서 펼쳐지는가? 개새끼들이 우글되는 도시 서울에서. 엄중호와 지영민의 첫 만남. 기적처럼 일어난 ‘우연한’ 교통사고. 그 사고에서 엄중호는 냄새를 맡았고 그와의 추격은 시작된다. 이건 결국 그들의 우연한 만남이 보여주듯 서울이란 도시에 모여사는 개들은 누구나 엄중호와 지영민이 될 수 있다. 이 장면이 부족하다면, 엄중호가 미진의 딸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차를 몰고 병원에서 나올 때 누군가의 차안에서 엄중호의 차를 목격하는 숏을 볼 수 있다. 그 숏에서처럼 추격자의 서울에서는 광견이 미쳐 날뛰는 곳은 어느곳이든 가능하다. 단, 조건은 서울이다. 감독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엄중호가 지영민의 누나를 찾아간 시퀸스는 정말 순간처럼 지나간다. 엄중호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서울로 온다. 서울을 벗어 나게되면 원동력은 사라지고 이야기의 엉성함이 들어나기에 감독은 쫓기듯 서울로 온다.

 



 


추격자 속 서울은 분노의 공간이다. 광견들이 우글되는 분노의 공간이며 서로 자신의 배를 체우려 혈안이 되어있는 - 이윤추구를 위해서만 몸을 움직이는 공간이다. 영화 속 거의 모든 인물들은 이윤 추구를 위해 움직인다. 경찰은 얼굴에 똥을 맞은 시장을 덮을 만한 사건이기에 지영민에게 관심을 보이고 엄중호는 사라진 여인들의 돈을 위해 지영민은 성적 쾌락을 위해 움직인다. 또 서울이란 공간은 엄중호가 찾아간 또 다른 포주가 말했듯 누군가 사라져도 찾을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삭막한 곳이며 경찰들이 항상 말한 것처럼 “그 많은 시체를 설마 집 마당에 파묻겠어?”란 의문에 긍정을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허나, 난 서울이 분노를 생성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단지 서울은 분노가 팽배한 공간이다. 이 영화 속 분노의 시발점은 누구인가? 그건 감독이 끝끝내 다가가지 못한 존재. 바스트 숏 이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등장 비율은 굉장히 적으면서 전체적으로 영화를 장악하고 있는 존재 ‘서울 시장(市長)’이다. 감독은 서울시장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럼으로 진정한 분노의 대상인 서울시장을 망치나 정으로 때려죽일 수 없다. 그로인한 분노로 인해 시장만큼 개새끼인 엄중호와 지영민을 찾아내고 그들을 추적하는 것이다. 엄중호와 지영민의 추적게임의 결론은 지영민 체포라기 보단 서울시장과 엄중호의 조우다. 서울시장은 엄중호를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차 속으로 뛰어든다. 그는 왜 놀란 것인가? 그건 단지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정한 개새끼 같은 모습을 보고 시장은 놀라 숨는 것이다. 혹은 감독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 영화에 - 감독에게 동의를 할 수 없다. 그건 서울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감독이 서울시장으로 은유하는 이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난 이 영화의 몇 안되는 장점 중의 하나가 서울을 개싸움판으로 본 것이라 생각하고 또 서울시장으로 은유한 이가 직급이 격상되어서 내가 한국에 사는 것에 대한 회의를 느끼곤 한다.

내가 이 영화에 동의할 수 없는 건 우선 영화 속 폭력 묘사의 과잉이다. 결국 미진을 죽여야 했나? 난 해피엔딩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것과 다른 차원의 문제다. 미진의 살해 장면에서 감독은 유난히 지연시킨다. 끝나지 않을 듯한 이 끔찍한 살해를 온갖 곳에 피 칠하며 길게 늘어뜨린다. 그 다음 이 기나긴 살해 장면만큼 긴, 엄중호의 미진의 사망에 대한 울분의 장면. 이 장면으로 감독은 미진을 위해 우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난 이 장면이 정말 슬프지않다. 음악은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울고 영상은 따로 논다. 이 장면은 단지 폭력의 과잉과 감정의 과잉으로 인한 충격을 바라는 것이다. 그로인해 이야기의 앙상함을 감추고 관객을 엄중호의 행동에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극악의 비윤리적 행태에 경악 할 수 밖에 없다. 이건 나치의 프로파간다와 별반 없다고 생각한다.


또 이 비윤리적인 행태가 극히 단순한 사고에서 표출되었음에 난 더더욱 이 영화에 동의할 수 없다. 영화 속 화면 구성은 눈에 띄일 정도로 평면적이다. 입체적이지 못하다. 또 공간 묘사는 굉장히 분열되어 있고 격투장면에서는 숏이 뒤죽박죽 되어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안양의 지영민의 누나를 찾아간 시퀸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안양 풍경에 대한 묘사를 찾아 볼 수 없다. 또 서울시장이 똥을 맞는 곳인 시장(市場)을 멀리서 바라 볼뿐이다. 이건 영화 리듬의 문제라기 보단 세상에 대한 시선의 빈곤함이라 본다. 또 영화에서 차 내부의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영화 속 모든 차 내부 장면은 차 밖의 풍경의 포커스가 나가 있는 것이다. 서울이란 지옥도를 그리면서 왜 망원에 한정되어 있는 것인가? 차로 서울을 구석구석 훑고 다닐때 왜 그 밖을 보기를 거부하는 것인가?

감독은 평면적인 시선으로 혹은 세상을 너무 모르는 시선으로 폭력으로 치닫는 분노를 부치기려 노력한다. 거짓 해피엔딩은 위험하지만 거짓 언해피엔딩 또한 그만큼 위험하다. 또 그것이 바라는 것이 폭력일때 더더욱 위험하고 사람들이 열광할 때 그 비틀린 분노에 열광할 때 미진의 딸과 엄중호 둘이 남아 있는 마지막 장면을 보는 것처럼 소름 돋는다. 미진의 딸은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그’ 서울에서 ‘그’ 엄중호와 ‘그렇게’ 살 것이다.

난 나홍진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다. 이건 설레임이 아니라 불안함이다.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기술로 지금과 같은 시선을 펼칠까 하는 불안함. 그가 데뷔작과 두 번째 영화 사이의 간극에서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람에서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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