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의 서평을 써주세요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대필 작가의 독백
배홍진 지음 / 멘토프레스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러니까, 이 책은 정말 책 표지에 박힌 것처럼 독백의 기록이다. 유령이 유령을 위해 쏟아내는 독백. 형체를 잃은 존재, 목소리만 남은 존재가 쏟아내는 독백이다. 한 유령은 대필 작가란 단어 뒤에 가려진체, 타인의 이름 뒤에 가려진 혹은 증발된 존재이고, 한 유령은 국가의 정서란 이름 뒤에 가려지고 지워지길 바라는 역사에 똬리를 튼 존재다. 그러니까, 한 유령이 한 유령의 글을 빌려서 또는 한 유령이 한 유령의 역사를 빌려서 쏟아내는 독백을 담은 책이다.

  대필의 뒤에서 박차고 나온 작가, 그러니까 유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작가는 유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역사에서 소멸될 것을 부여받은 강덕경 할머니의 유령 껍데기를 벗기고 온기가 서린 육신을 그려내는 과정을 통해 ‘대필’ 뒤에서 앞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작가 배홍진이 강덕경 할머니를 되살리기 위해, 아니 유령으로 살 것을 강요당한 시간을 온기를 지닌 인간 강덕경의 시간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온 기를 쏟아낼수록, 작가 배홍진의 이름은 뚜렷해진다. 그러니까, 이들은 서로 상친관계이다. 필연이다. 생면부지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인연이 엮이고 엮여서, 배홍진이 강덕경을 온 몸으로 받고, 강덕경이 배홍진의 펜을 스스럼없이 빌릴수록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유령으로 치부될 것을 종용 받던 그들의 목소리는 무게를 지니고 퍼져 우리의 고막을 흔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홍진이 강덕경의 역사가 서린 공간을 찾아가, 허물어지거나, 상실되었거나, 온기가 증발한 공간을 아주 세세하게 그려내고, 그곳에서 느낀 감흥을 주절주절 쏟아내는 과정은 늦은 발걸음으로 인해 상실된 강덕경의 채취를 끄집어내는 안간힘이다. 과거의 공간에 서서 그녀의 자잘한 행동을 그려, 유령이란 껍데기를 벗기고 인간임을 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강덕경의 목소리가 주는 감흥을 묘사하고, 강덕경의 그림의 티끌하나에까지 자극을 받아, 그것을 글로써 쏟아냄으로 강덕경의 숨, 감정, 통증, 온기를 살려내 음울한 문체로 장막을 가르고 강덕경을 우리의 옆으로 옮겨 놓는다. 그렇게 우리의 옆으로 강덕경을 모신 후, 배홍진은 강박적이게 강덕경의 삶을 반복해서 읊는다. 혹여나 누군가 잊기라도 할 듯이. 그 과거를, 그 야산을, 그 일본군을, 그 딸의 죽음을, 그 화재를, 그 투병을 혹여나 누군가 잊기라도 할까봐 소스라치듯 놀라며 반복해 읊는다. 그 반복된 읊음의 뒤의 배경, 그러니까 역사적 배경에 대해, 배홍진은 감흥을 떨치고 건조하게 복기한다. 그 큰 줄기, 항상 앞에 나서 강덕경의 삶을 지우던, 시대 정황을 건조하게 복기하여, 반복해 읊는 강덕경의 삶을 단단히 세우는 것이다. 감히 지울 수 없게.

  그러니까, 배홍진의 말처럼, 책 속의 일련의 과정들은 강덕경이 아닐지도 모른다. 배홍진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발자취를 쫒고, 그녀가 타인에게 들려주고 단지 기록된 것들에 거쳐 듣고, 그녀의 작품을 통해 그녀를 들어다 보기 위해 애쓰며 그려낸 것은 강덕경이 아닐지도 모른다. 배홍진은 그렇게 ‘아닐지도 모름’에서 멈추고, 일련의 과정에서 듣고 보고 느낀 것을 쏟아내고, 단정 짓지 않는다. 이 단정 짓지 않음에서 책은 가치를 획득한다. 작가의 자잘한 행동과 감흥을 강박적으로 기술해 놓았기에, 분명 수다스러운 사소함으로 전락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태도가 짓지 않은 단정으로 인해, 그 태도는 윤리를 획득한다. 배홍진의 안간힘을 통해 우리는 강덕경에 대해 알기를 멈추고, 그녀가 살아온 삶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다. 즉 그는 우리가 함부로 강덕경을 안다고 내뱉으려는 성급한 행위를 저지하는 것이다. 함부로 그 삶의 무게를 안다고 내뱉지 말라. 그리고 작가의 태도는 단순히 윤리를 획득한 것에 그치지 않고, 위안부 여성의 삶의 황폐함과 고독 등의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배홍진의 태도를 함부로 주저하거나 사소하다고 치부해선 안 된다.

  그러니까, 강덕경 할머니의 사후에 출간된 이 책이 우리에게 도착한 이유는 결국, 우리가 그녀 혹은 그녀들의 시간을 느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실들을 통해 알고 자극 받기만 할 것이 아닌 느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느낀 그녀 혹은 그녀들의 시간은 배홍진이 멈춘 위치에서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곳에서 느낀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그녀 혹은 그의 안간힘에 보내는 우리의 최선의 찬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