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소연 외 옮김 / 시각과언어 / 1995년 3월
평점 :
품절


지젝-또는 라캉-을 만날 때 드는 느낌은 대학 초년생때 마르크스를 만날 때 드는 느낌과 유사하다. 지젝이 언급했듯이 라캉의 '징후'라는 개념을 선취한 것이 마르크스였기 때문만은 아니다.이 경험은 아주 감각적인 것이다. 뇌파에 어떤 전기적 자극을 주는 느낌....'타닥..타닥'. 이런 자극은 세계를 다른식으로 분할해서 볼 수 있는 문을 열어 준다. 사실 '의심의 삼인방' 이라는 니체-마르크스-프로이트가 인류의 지적 세계에 해 준 일은 그런 거대한 전기 신호가 아니었을까?  

 책 제목이 <삐딱하게 보기>이다. 미학 공부를 하다보면 자주 인용되는 그림 몇 개를 만난다.한스 홀바인의 <대사들>도 그 중 하나이다. 두 명의 인물 사이에 무언가 얼굴이 있다. 이것은 사실 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기표이다. 그런데 제대로 보면 보이지가 않는다. 살짝 비틀어 보면 그곳에는 '해골'이 있다. 미술사에서 해골이나 죽은 동물의 모습같은 것들은 도상학적으로 '죽음'과 '삶의 유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공식화된 듯 하다. 홀바인의 그림에서는 '해골'은 왜상의 지점으로 읽힌다. 지젝은- 라캉은-이 지점을 의미 추구의 심연을 드러내는 '무의미한 얼룩' 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속류 사회학적 시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통속적 용어로 '삐딱하게 보기'는 '비판적으로 보기' 라는 뜻이다. 그래서 비판적 지식인이기를 원하는 진보가 좋아하는 독해방식이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기억하라. 그것은 최소한 손에 만져지는 영역이 아니다. <삐딱하게보기>에는 물론 정치사회학적인 대상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민주주의'같은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관념에는 구체적인 인간적 내용의 충만함이나 공동체적 결연의 순수성을 위한 공간이 전혀 없다.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개인들의 형식적 연결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채워나가려는 모든 노력은 그 동기가 아무리 참되더라도 이내 전체주의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다." 

 현재의 한국같은 상황에서 이 말은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니, 공동체의 선을 위해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MB악법을 막기 위해 내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래서 빼앗긴 민주주의를 구현하려고 하는데.... 민주주의는 그냥 추상적 개인의 연결이고 전체주의 유혹으로 넘어가는 무엇이라니? "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그 곳이 아니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영역 위에 서 있다. 결국 '삐딱하게 보기'의 사회적 진보의 열정으로 <삐딱하게 보기>를 만나려면 백전백패한다. 대신 <삐딱하게보기>는 우리에게 '주체'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그 틈새를 통해 읽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여기가 로도스다.뛰어보아라'  물론 그곳은 로도스는 아니다. 지젝식으로 말하자면-만약 그곳이 '로도스'라면 그곳은 '무'이다. 뭔가 복잡해지려고 하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젝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세계를 독해하는 또다른 방식 하나를 이해하려는 것이고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오딧세우스와 친구들이 항해하는 바다는 많은 비밀들을 숨기고 있다. 수많은 이야기들...마치 우리의 의식/무의식이 그런 것 처럼말이다. (사실 이 정도에서 리뷰를 그쳐도 될 것 같다.^^) 

<삐딱하게 보기>를 전부 정리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지젝의 모든 책을 한 권으로 정리하려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지젝의 책들은 동어반복되는 것들이 많다. 이 책에서 만난 것들 역시 그런 반복의 선상에 놓여 있다. 그런 반복에 익숙해져서 인지 아니면 <삐딱하게보기>가 비교적 좀 쉬운편에 속한다는 평가때문인지 이 책을 보면서 예전에 비해 호흡을 세어가면서 뛸 수 있게 되었다.(이 말은 예전에 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리뷰의 마라톤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아마추어로서 지젝을 읽고 있고 앞으로도 아마추어로서 이 마라톤을 즐길것이다. 그때도 말했지만 '모든 마라토너가 이봉주나 황영조가 될 필요는 없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이제 마라톤을 즐길수 있는 단계로 가고 있는 것고 그 점이 즐겁다. 점차 다리 근력이 생기면 유사 종목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나의 삼촌은 동호회 마라톤을 하시다가 이제 자전거로 종목을 바꾸어서 전국일주를 거뜬히 해내신다.)  

이번에 읽은<삐딱하게 보기>에는 대중문화의 예가 가득하다. 아무래도 그 덕에 조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예가 많다고 이 책부터 지젝을 읽겠다고 한다면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다. 대중문화의 예들은 라캉의 개념틀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지젝의 방법론일 뿐이다. 특히 2장에서 히치콕의 영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히치콕 영화를 요약한 내용이나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보고 싶다는 이유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은 무의미하다. 라캉의 개념들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도대체 어느 정도의 이해란 어느정도일까?- 를 하고 접근하면 좀 낫지 않을까 싶다.  영화학에서 히치콕의 중요한 쇼트개념인 '시점 샷'이라는 것이 있는데,지젝은 그런 쇼트의 몽타주를 '대상의 응시'라는 개념을 통해서 불안을 고도화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뭔가 그럴싸 해보이지만 영화학에서 이거 아주 쉬운 개념이다. 이제는 거의 모든 스릴러물에서 사용한다.) 그 외에도 히치콕 영화의 '성관계없음' (이것도 무슨 섹스를 한다,못한다 그런 개념이 아니다.)을 그의 몇 편의 영화들의 연속성을 통해 드러낸다. 유명한 '새' 같은 영화는 '모성적 초자아'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영화'새'는 재난영화로 많이 읽힌다. 그것은 히치콕이 역설적이게도 '새'라는 '재난'을 통해 영화 초반에 도출된 정신분석학적 테제들을 은폐하고 있기때문이다.뭔말이고 하니....지젝의 말은 원래 영화'새'는 정신분석학적 텍스트라는 거다. 히치콕 영화의 연속성에서 그건 입증된다. '새'에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없다. 그리고 엄마는 아들 연인의 성관계를 막으려는 존재이다. 정신분석학의 기본텍스트들이다. 그런데 '새'가 침입하면서 이런 관계들은 잊혀진다.아니 잊혀지게끔 받아들여진다. 그려면서 영화는 '영화적 진실'로 따라간다.(지젝의 <기묘한영화강의>를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새가 침입하는 장면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은 그걸 이렇게 묻는거다. '그 새가 진짜 새야?' "왜 하필 그 때 새가 쳐들어오지?" "그 새는 결국 어떤 실재의 조각인가?') 히치콕의 영화를 펼쳤다 접었다 하면서 지젝은 라캉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과 개념들을 설명한다. '성관계는 없다.' '담지자 없는 음성'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가 전부 알아서는 안된다' '네 자신처럼 네 증환을 사랑하라' 등등   

1장에서 중요한 예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검은집>과 로버트 하인라인의 <조나단 호그의 불쾌한 직업>이다. 현실을 구성하는 대상 a 와 실재의 침입에 관련된 이야기다. 대상a를 바라보는 방식은 홀바인의 그림처럼 왜곡된 방식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다. 지젝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작 실재의 '블랙홀'을 메우는 환상공간이라는 잉여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인라인의 소설은 그 '실재'를 '무'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실재'를 상징화 해내지 못할 때 우리는 '광인'이 되는 것이다. 최근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주제가 바로 이런 '실재'의 침입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가족이데올로기' 즉 '중산층'이라는 환영을 깨는 방식으로 '실재'를 침입시킨다. 영화감독들이 그런 답답함에 어떤 분열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게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마저 그런 '뒤틀림'을 느끼는데 말이다. 실재의 침입 앞에 그 환영은 아주 쉽사리 산산조각난다. 즉 유지되어야만 하는 상징계의 그물망은 사실 열나 취약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손상을 남긴다. 그러니까 실재란 당신과 세계가 아주 비루하고 조악하며 비도덕적이고 모순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건들의 연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건 자기겸손에서 우러나는 그런 것과 완전히 다른 엄청나게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무'에 가깝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터넷 공간의 개인이 그런 '상징화의 의미작용'에 가장 선진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육체화가 거세된 공간이라는 외상적인 조건이 가장 큰 역할을 할 것 같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모두 '징후'만 가지고 자기를 구성하고 있다. 결국 이를 통해서 '주체화'를 이루어낸다. 일종의 '내가 있던 그곳에 나를 있게 하라'의 인터넷판 변형이다. 그렇다보니 인터넷 공간에는 육체없는 도덕군자들이 양산된다. 내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육체없는' 과 '도덕' 그 양자 모두이다. 사실 그 '도덕' 이라는 것은 '비루함'을 세련되게 은폐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않는다.(푸하...욕태바가지로 먹겠군.나를 욕하지 말고 니체를 욕해라.)  

모든 강박관념들 중 가장 음란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의무다. 이는 우리가 라캉의 논제를 이해해야하는 방식인데 그의 논제에 따르면 선은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악의 가면일 뿐이다....선의 배후에는 근본적인 악이 존재한다. 선은 특수하고 병적인 위상을 갖고 있지 않은 악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금세기 키치문학과 달리 칸트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의무 자체의 또 다른 외설적인 측면이다. 

지젝은 논리적 대립과 현실적 대립이라는 말로 오해를 사전에 방지한다. (그러니까...MB가 선이란 말인가? 라고 묻지말란 말이다.) 지난해 영화 <다크나이트>를 보면서 왜 그렇게 배트맨의 뒤통수를 패대기 치고 싶었는지와 같은 맥락이다. 물론 우리가 '순수 악'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힘'에 대한 갈증이나 '일관성'에 대한 갈증만은 아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저 문장을 'MB는 악이 아니야?"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결국 문제를 -학자들의 만병통치 탈출구라는 -컨텍스트 차원과 대상-사물의 응시차원까지 확장해야 이해가 될 문제다. 더는 모른다. 생각만 약간 닿을 뿐.... 

 며칠전 서울에 가 있었다. 예전에 자주 걷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겨울이지만 눈이 와서 덜 볼썽 사나왔다. 예전에 걷던 길을 다시 걷는 것은 '치유'를 위한 나만의 방식이다. 한 때 도움을 받았다고 다음에도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그다지 '치유' 효과가 크지 못했다. 멋지게 길을 걷고 종로에서 책 몇 권 사고, 밤 9시에 종로에서 여관 찾아 헤맸다. 흘러넘치는 욕망의 거리에서 밤 9시에 여관잡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실재'다. ^^ 결국 왔던 길을 거꾸로 돌아가서 중심가에 벗어난 모텔을 겨우 찾았다. 혼자 여관방에 누워서- 이것도 내겐 익숙한 풍경이다- 성인채널과 공중파를 잽핑하면서 봤다. 그냥 잤겠냐?  (대상 a를 만들어주마...이 리뷰를 봐도 그렇고, 자기진단을 해봐도 그렇고 아무래도 분열증이 시작된 것 것 같다.)   

내려오는 길에 기차에서 지젝-라캉의 연습용 책으로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를 읽었다. 정신분석학 텍스트더구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이해가 안된다면 며칠전에 올린 토끼 동영상을 보시라. 

어떤 회사가 사운을 걸었다고 했는데...엉뚱한 곳에서 흘렀다. 사운은 날아간거지...한국판 워터게이트가 되는 건 아닐까..생각도 해봤는데...또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 재밌다. 




"미네르바는 금융계 7인…구속된 박씨는 무관"


<신동아> 2월호 보도…미네르바 진위 논란 본격화


기사입력 2009-01-18 오후 8:08:47


  • 크게보기
  • 작게보기
  • 기사스크랩
  • 바로가기 복사
  • 프린트

지난해 12월호에 인터넷 경제평론가 '미네르바'의 장문의 기고를 실었던 <신동아>가 2월호 지면을 통해 현재 구속 중인 '미네르바' 박모 씨가 '진짜' 미네르바가 아닐 가능성을 언급해 파문이 예상된다.

19일 발매될 <신동아> 2월호에는 지난해 12월 자신들이 인터뷰한 미네르바 K씨와 인터뷰가 다시 실렸다고 18일 <동아닷컴>이 보도했다.

<신동아>에 기고한 미네르바 K씨는 "미네르바는 1명이 아니라 7명으로 이뤄진 그룹이다. 글은 내가 주로 썼다. 검찰이 미네르바로 지목해 구속한 박 씨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고 밝혔다. 앞서 검찰에 구속된 박 씨는 민주당 이종걸 의원과 접견에서 <신동아>에 기고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었다.

<신동아>에 따르면, K씨는 "과거 금융기관 3곳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투자재무 컨설팅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으며 "2007년 12월 말부터 500건 가량의 글을 작성해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올렸다"고 밝혔다. 자신이 주로 글을 썼지만 모든 글을 혼자 쓴 것은 아니고, (자신이 제공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른 사람이 글을 쓰기도 했다는 것. 글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힘없고 배고픈 서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머지 멤버들도 모두 금융업에 종사하며 언론사 뺨치는 정보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멤버들은 외환, 부동산, 주식, 채권의 4개 파트로 나뉘어 활동했으며, 자신은 해외담당이었다는 것. 검찰에 구속된 박모 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며 "멤버들 중 현재 연락이 두절된 한 사람이 박대성씨를 시켜 글을 올렸을 가능성은 있다"고 밝혔다.

검찰이 박모 씨의 기소 사유로 든 12월29일의 글("정부가 주요 7대 금융기관과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 달러 매수를 금지하라는 긴급 공문을 전송했다")에 대해 K씨는 "그 글이 올라왔을 때 나는 외국에 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나중에 그걸 보고 굉장히 황당했다"고 말했다.

<신동아>는 그러나 실명을 포함한 구체적인 인적 사항은 공개하지 않았다.

/전홍기혜 기자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전 11:30분. 지금 여기는 부산역입니다.  

어제 퇴근하기 1시간전쯤 휴가를 확 내버렸습니다. 하도 갑갑한 짓들을 하고..또 약간의 억울함같은 것도 있어서 다 꼴보기 싫었던 거죠. 

요즘 툴툴거리는 걸 봐서 그런지 집에서도 하루 어디 갔다오라더군요. 

덜컥 집을 나왔는데....어딜갈지... 

서울에 가려구요. 

그냥 예전에 다니던 길을 좀 걸으려구요. 가끔 치유효과가 있기도 했으니.... 

 ^^  에이... 

제주도로 갈 걸 그랫나? 갑자기 생각이 바뀌네. 기차표는 다 끊어놨는데.....제주도를 1박으로 다녀오면 아쉬움이 더 클 것 같기도 하고....제주에 있는 예찬이 나무는 겨울을 잘 나고 있나? 

에이...모르겠다. 어제 술을 많이 먹어서 속도 부글거리고...그냥 어디 온천이나 갈까? 

어딜가도 기다리는 이가 없네. 아우...자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발터 벤야민이 기술문명 시대의 '자기복제' 라는 개념을 언급한 이후 이는 거의 모든 예술 장르에서 직접적 소재로 삼거나, 변용하는 형태로 활용되었다. 

어디서 퍼 온 인터넷 광고다. 미러 이미지를 활용했다.

뭔 소리??! ^^ 아는 사람은 아는 소리다.  

못알아 듣는 이를 위한 ...친절한 설명...저 토깽이는 늘 저녁에 나온다.  

어디서는 이거 밝히는데 사운을 걸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국판 워터게이트해보려는 듯. 

하지만 정확한 팩트가 없을 때는 역공을 당하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듯하다. ^^

 

아...영화<워낭소리>는 꼭 보시길...거기엔 소가 나온다. 

선댄스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듯.... 

.00000.+0.   (이건 암호....아무래도 이 암호를 해독하는데 정부 기관이 힘들어할 것같다.천재 예찬이가 한 짓이다. 뭔가 상징적이지 않은가? 녀석 천재같아.대충 키보드를 막누르더니 이런 기호를 만들어내다니...토깽이하고 똑같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네르바에 대해 열광한 적이 없다. 그건 황우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처음으로 미네르바의 글을 본 것도 미네르바 구속으로 허위논란이 있는 <신동아>의  기사를 읽고 나서이다. 오히려 내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미네르바가 아니라 <미네르바 신드롬>이었다. 사실 나는 미네르바가 얼마나 경제통이며 예측의 정확성이 있었는지 잘 모른다. 어떤 투로 글을 쓰는 지 조차 잘 모른다고 하는 편이 맞다. 시사주간지를 통해 본 평가는 '쉽게 명쾌하게'라는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런 '쉽게 명쾌하게'는 늘 헛점을 만든다. 결국 내가 보기에 <미네르바 신드롬>은  미네르바를 불편해 하는 측의 압박과 미네르바에 열광하는 이들이 동시 합작품이었다. 책임은 전자가 훨씬 크다. 반짝 인기를 모은 한 개인이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릴 만큼 강력했다면 그 국가가 얼마나 내파되어 있는지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구멍이 숭숭 뚫려 한 조직만 무너져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말기 골다공증환자의 골밀도 조직같은 국가. 이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결국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던-자학사관을 벗어나자던- '대한민국'의 위상을 그 정도 밖에 안된다고 스스로 자임한 꼴이다. 사이버 논객 하나에 국가 신인도가 빵구가 날 정도라면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런 국가기밀을 국가가 나서서 인정했으니 이것이야 말로 '국가 내란을 목적으로 한 대외기밀 누설죄'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경계하는 북한이나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는 일본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내가 사실 미네르바에 관심이 가게 된 것은 최근 구속사태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정신병적인 강박증이 아니라면 일어나서는 안돼는 일이다.' 다분히 정치적인 반대파를 겨냥한 목소리겠지만, 전직 대법관을 지냈던 수구 우파인 이회창 총재마저 헌법질서를 운운하며 비판한다.(그가 대통령이었다면 똑같은 짓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회창의 TV 인터뷰는 '정치인'보다 '법률가'로서 날릴 때의 그와 잠시 오버랩되었다. 이회창이 김영삼과 대립날을 세웠을 때 '대쪽판사의 사법정신'으로 포장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나는 지난 대선부터 지금까지 이명박을 '쥐박이'나 '명바기새끼'라고 불러 본 적이 거의 없다. 이유는 그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 대한 '분노작열'로 또는 그를 '악'으로 몰아붙이면서 작동시키고 있는 '내 안의 정치'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의 국면에서 우리는 상대를 '적'으로 또는 '악'으로 구현하고 목표의 지향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외 지점에서. 일상화된,또는 습관화된 '쥐박이' 의 사용은 내게는 반갑다기 보다는 조심스러웠다.  

아주 쉽게 말해서 나는 그 '쥐박이'가 총체적인 분할 구도 속에 차이는 물론이고 자신의 비루함마저 묻는 기제로 이용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자기를 위한 미끼같은 것. 결국 싸워야하는 또다른 큰 종류의 실체는 그 미끼를 무는 것정도에서 머물고 그 실체를 알았다고 자임하며 은폐된다는 것이다. 물론 근본주의적 성찰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미끼를 무는 행위 자체가 어리석은 짓만도 아니다. 강조하는 점은 우리가 이런  미끼를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런 미끼를 물고, 그런 미끼로 부터 풀려나는 과정 속에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진실은 선을 긋는 것에서 생기지도 않고 선 바깥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경향신문>에서 미네르바 구속에 따른 자발적 검열이 시작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 

   ◇네티즌 자기 검열=정부 정책에 대한 토론이 활발한 다른 사이트에서도 위축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다음 블로거 뉴스의 ‘낮은 표현’은 “미네르바 구속으로 아내가 더 이상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지 말라고 한다”고 적었다. 이어 “자기 검열뿐만 아니라 가족간 검열로 이어질 판”이라고 했다.

서울대 홈페이지의 ‘메추라기’는 댓글에서 “판사도 승진은 해야 하니까”라고 적은 뒤 “이 리플도 검찰에서 보려나?”라고 썼다.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송경재 교수는 “의사 표현은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권인데 이런 부분들이 사법기관·행정부 등 권위체에 의해 견제당했을 때 위축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며 “이를 ‘겁주기 효과’라고 하는데 미네르바 체포 이후 인터넷에 글쓰기를 할 때 재차 자기 검열을 한다든지, 용어 선택에 주의를 기울이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을 비하하는 은어 사용도 줄었다. 디지털카메라 동호회인 ‘SLR클럽’의 게시판에서는 지난 1일부터 8일까지 ‘쥐박’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게시글이 842건당 1회씩 있었는데 9~11일에는 1969건당 1회로 57%가량 줄었다. ‘이메가’라는 표현도 같은 기간 2197건당 1회에서 3150건당 1회로 30% 정도 줄었다. 
------------------------------------------------------------------------------------- 

최근에 나온 <뉴라이트 비판>에 대한 알라딘의 광고문구에는 "이 모든게 뉴라이트 때문이야"라는 문구가 있었다. jade님이 이 문구를 보고 경악했다는데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것이 내가 말하고 있는 어떤 지점과 접합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뉴라이트때문' 으로, 또는 '모든 것을 이명박때문' 이라고 말할 때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이명박'이 '적' 이라는 근본주의적 태도에도 동의하지는 않는다. 자칫하면 현실적 조건과 차이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생사를 건 모든 싸움들을  모두 '허무'의 깃발 아래 담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포스트모던한 중세가 되어 버릴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태주의'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입장도 이와 유사하다.)  

한 때 알라딘을 충천케 했던 '쥐'의 포화상태도 '소띠'해에 조금은 줄어들 듯 하다. 경향신문의 기사는 통계의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완전치 못하다. 그것이 미네르바 구속때문에 생긴 일인지 다른 이유때문인지 명확치 않다. 약간의 유의미한 사실을 가지고 작성되는 것들이 기사를 만드는 사람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검열 때문일 수도 있고, 외치고 조롱해봐야 별반 반응이 없으니 지친 걸 수도 있고,황당한 사건에 이성적으로 대응하다 보니 줄어든 것일 수도 있고, 검찰을 욕하다 보니 이명박이란 단어가 줄어든 걸 수도 있다. 해석은 여러가지로 가능하고 각 해석 하나 하나가지고 기사를 만들 수도 있다. 

어쨋거나 알라딘에서는 '분기탱천' 페이퍼가 상당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다시 '촛불'이 타오를 때까지.... 그런데 사건적인 희생이 나오기 전까지는 '촛불'이 타오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촛불'의 학습효과는 민중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집권층에도 생긴 것이다. 분열시키고 개별화 시켜서 서서히 지치게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자 내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아...졸라...쥐색이들 약먹었으면 조용히 집 구석에 가서 죽을 일이지..발악을 해버리네. 쥐구멍에에다가 기름칠하고 불을 질러,이것들을!! (ㅋㅋ 할 만큼 다했네. 아싸.. 나는 생각있는 사람으로서 할 일 다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