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소연 외 옮김 / 시각과언어 / 1995년 3월
평점 :
품절


지젝-또는 라캉-을 만날 때 드는 느낌은 대학 초년생때 마르크스를 만날 때 드는 느낌과 유사하다. 지젝이 언급했듯이 라캉의 '징후'라는 개념을 선취한 것이 마르크스였기 때문만은 아니다.이 경험은 아주 감각적인 것이다. 뇌파에 어떤 전기적 자극을 주는 느낌....'타닥..타닥'. 이런 자극은 세계를 다른식으로 분할해서 볼 수 있는 문을 열어 준다. 사실 '의심의 삼인방' 이라는 니체-마르크스-프로이트가 인류의 지적 세계에 해 준 일은 그런 거대한 전기 신호가 아니었을까?  

 책 제목이 <삐딱하게 보기>이다. 미학 공부를 하다보면 자주 인용되는 그림 몇 개를 만난다.한스 홀바인의 <대사들>도 그 중 하나이다. 두 명의 인물 사이에 무언가 얼굴이 있다. 이것은 사실 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기표이다. 그런데 제대로 보면 보이지가 않는다. 살짝 비틀어 보면 그곳에는 '해골'이 있다. 미술사에서 해골이나 죽은 동물의 모습같은 것들은 도상학적으로 '죽음'과 '삶의 유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공식화된 듯 하다. 홀바인의 그림에서는 '해골'은 왜상의 지점으로 읽힌다. 지젝은- 라캉은-이 지점을 의미 추구의 심연을 드러내는 '무의미한 얼룩' 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속류 사회학적 시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통속적 용어로 '삐딱하게 보기'는 '비판적으로 보기' 라는 뜻이다. 그래서 비판적 지식인이기를 원하는 진보가 좋아하는 독해방식이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기억하라. 그것은 최소한 손에 만져지는 영역이 아니다. <삐딱하게보기>에는 물론 정치사회학적인 대상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민주주의'같은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관념에는 구체적인 인간적 내용의 충만함이나 공동체적 결연의 순수성을 위한 공간이 전혀 없다.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개인들의 형식적 연결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채워나가려는 모든 노력은 그 동기가 아무리 참되더라도 이내 전체주의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다." 

 현재의 한국같은 상황에서 이 말은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니, 공동체의 선을 위해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MB악법을 막기 위해 내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래서 빼앗긴 민주주의를 구현하려고 하는데.... 민주주의는 그냥 추상적 개인의 연결이고 전체주의 유혹으로 넘어가는 무엇이라니? "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그 곳이 아니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영역 위에 서 있다. 결국 '삐딱하게 보기'의 사회적 진보의 열정으로 <삐딱하게 보기>를 만나려면 백전백패한다. 대신 <삐딱하게보기>는 우리에게 '주체'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그 틈새를 통해 읽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여기가 로도스다.뛰어보아라'  물론 그곳은 로도스는 아니다. 지젝식으로 말하자면-만약 그곳이 '로도스'라면 그곳은 '무'이다. 뭔가 복잡해지려고 하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젝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세계를 독해하는 또다른 방식 하나를 이해하려는 것이고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오딧세우스와 친구들이 항해하는 바다는 많은 비밀들을 숨기고 있다. 수많은 이야기들...마치 우리의 의식/무의식이 그런 것 처럼말이다. (사실 이 정도에서 리뷰를 그쳐도 될 것 같다.^^) 

<삐딱하게 보기>를 전부 정리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지젝의 모든 책을 한 권으로 정리하려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지젝의 책들은 동어반복되는 것들이 많다. 이 책에서 만난 것들 역시 그런 반복의 선상에 놓여 있다. 그런 반복에 익숙해져서 인지 아니면 <삐딱하게보기>가 비교적 좀 쉬운편에 속한다는 평가때문인지 이 책을 보면서 예전에 비해 호흡을 세어가면서 뛸 수 있게 되었다.(이 말은 예전에 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리뷰의 마라톤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아마추어로서 지젝을 읽고 있고 앞으로도 아마추어로서 이 마라톤을 즐길것이다. 그때도 말했지만 '모든 마라토너가 이봉주나 황영조가 될 필요는 없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이제 마라톤을 즐길수 있는 단계로 가고 있는 것고 그 점이 즐겁다. 점차 다리 근력이 생기면 유사 종목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나의 삼촌은 동호회 마라톤을 하시다가 이제 자전거로 종목을 바꾸어서 전국일주를 거뜬히 해내신다.)  

이번에 읽은<삐딱하게 보기>에는 대중문화의 예가 가득하다. 아무래도 그 덕에 조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예가 많다고 이 책부터 지젝을 읽겠다고 한다면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다. 대중문화의 예들은 라캉의 개념틀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지젝의 방법론일 뿐이다. 특히 2장에서 히치콕의 영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히치콕 영화를 요약한 내용이나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보고 싶다는 이유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은 무의미하다. 라캉의 개념들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도대체 어느 정도의 이해란 어느정도일까?- 를 하고 접근하면 좀 낫지 않을까 싶다.  영화학에서 히치콕의 중요한 쇼트개념인 '시점 샷'이라는 것이 있는데,지젝은 그런 쇼트의 몽타주를 '대상의 응시'라는 개념을 통해서 불안을 고도화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뭔가 그럴싸 해보이지만 영화학에서 이거 아주 쉬운 개념이다. 이제는 거의 모든 스릴러물에서 사용한다.) 그 외에도 히치콕 영화의 '성관계없음' (이것도 무슨 섹스를 한다,못한다 그런 개념이 아니다.)을 그의 몇 편의 영화들의 연속성을 통해 드러낸다. 유명한 '새' 같은 영화는 '모성적 초자아'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영화'새'는 재난영화로 많이 읽힌다. 그것은 히치콕이 역설적이게도 '새'라는 '재난'을 통해 영화 초반에 도출된 정신분석학적 테제들을 은폐하고 있기때문이다.뭔말이고 하니....지젝의 말은 원래 영화'새'는 정신분석학적 텍스트라는 거다. 히치콕 영화의 연속성에서 그건 입증된다. '새'에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없다. 그리고 엄마는 아들 연인의 성관계를 막으려는 존재이다. 정신분석학의 기본텍스트들이다. 그런데 '새'가 침입하면서 이런 관계들은 잊혀진다.아니 잊혀지게끔 받아들여진다. 그려면서 영화는 '영화적 진실'로 따라간다.(지젝의 <기묘한영화강의>를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새가 침입하는 장면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은 그걸 이렇게 묻는거다. '그 새가 진짜 새야?' "왜 하필 그 때 새가 쳐들어오지?" "그 새는 결국 어떤 실재의 조각인가?') 히치콕의 영화를 펼쳤다 접었다 하면서 지젝은 라캉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과 개념들을 설명한다. '성관계는 없다.' '담지자 없는 음성'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가 전부 알아서는 안된다' '네 자신처럼 네 증환을 사랑하라' 등등   

1장에서 중요한 예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검은집>과 로버트 하인라인의 <조나단 호그의 불쾌한 직업>이다. 현실을 구성하는 대상 a 와 실재의 침입에 관련된 이야기다. 대상a를 바라보는 방식은 홀바인의 그림처럼 왜곡된 방식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다. 지젝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작 실재의 '블랙홀'을 메우는 환상공간이라는 잉여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인라인의 소설은 그 '실재'를 '무'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실재'를 상징화 해내지 못할 때 우리는 '광인'이 되는 것이다. 최근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주제가 바로 이런 '실재'의 침입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가족이데올로기' 즉 '중산층'이라는 환영을 깨는 방식으로 '실재'를 침입시킨다. 영화감독들이 그런 답답함에 어떤 분열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게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마저 그런 '뒤틀림'을 느끼는데 말이다. 실재의 침입 앞에 그 환영은 아주 쉽사리 산산조각난다. 즉 유지되어야만 하는 상징계의 그물망은 사실 열나 취약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손상을 남긴다. 그러니까 실재란 당신과 세계가 아주 비루하고 조악하며 비도덕적이고 모순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건들의 연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건 자기겸손에서 우러나는 그런 것과 완전히 다른 엄청나게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무'에 가깝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터넷 공간의 개인이 그런 '상징화의 의미작용'에 가장 선진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육체화가 거세된 공간이라는 외상적인 조건이 가장 큰 역할을 할 것 같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모두 '징후'만 가지고 자기를 구성하고 있다. 결국 이를 통해서 '주체화'를 이루어낸다. 일종의 '내가 있던 그곳에 나를 있게 하라'의 인터넷판 변형이다. 그렇다보니 인터넷 공간에는 육체없는 도덕군자들이 양산된다. 내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육체없는' 과 '도덕' 그 양자 모두이다. 사실 그 '도덕' 이라는 것은 '비루함'을 세련되게 은폐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않는다.(푸하...욕태바가지로 먹겠군.나를 욕하지 말고 니체를 욕해라.)  

모든 강박관념들 중 가장 음란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의무다. 이는 우리가 라캉의 논제를 이해해야하는 방식인데 그의 논제에 따르면 선은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악의 가면일 뿐이다....선의 배후에는 근본적인 악이 존재한다. 선은 특수하고 병적인 위상을 갖고 있지 않은 악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금세기 키치문학과 달리 칸트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의무 자체의 또 다른 외설적인 측면이다. 

지젝은 논리적 대립과 현실적 대립이라는 말로 오해를 사전에 방지한다. (그러니까...MB가 선이란 말인가? 라고 묻지말란 말이다.) 지난해 영화 <다크나이트>를 보면서 왜 그렇게 배트맨의 뒤통수를 패대기 치고 싶었는지와 같은 맥락이다. 물론 우리가 '순수 악'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힘'에 대한 갈증이나 '일관성'에 대한 갈증만은 아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저 문장을 'MB는 악이 아니야?"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결국 문제를 -학자들의 만병통치 탈출구라는 -컨텍스트 차원과 대상-사물의 응시차원까지 확장해야 이해가 될 문제다. 더는 모른다. 생각만 약간 닿을 뿐.... 

 며칠전 서울에 가 있었다. 예전에 자주 걷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겨울이지만 눈이 와서 덜 볼썽 사나왔다. 예전에 걷던 길을 다시 걷는 것은 '치유'를 위한 나만의 방식이다. 한 때 도움을 받았다고 다음에도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그다지 '치유' 효과가 크지 못했다. 멋지게 길을 걷고 종로에서 책 몇 권 사고, 밤 9시에 종로에서 여관 찾아 헤맸다. 흘러넘치는 욕망의 거리에서 밤 9시에 여관잡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실재'다. ^^ 결국 왔던 길을 거꾸로 돌아가서 중심가에 벗어난 모텔을 겨우 찾았다. 혼자 여관방에 누워서- 이것도 내겐 익숙한 풍경이다- 성인채널과 공중파를 잽핑하면서 봤다. 그냥 잤겠냐?  (대상 a를 만들어주마...이 리뷰를 봐도 그렇고, 자기진단을 해봐도 그렇고 아무래도 분열증이 시작된 것 것 같다.)   

내려오는 길에 기차에서 지젝-라캉의 연습용 책으로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를 읽었다. 정신분석학 텍스트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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