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을 다녀왔다. 지리산 아래땅. 산청.  

어제 밤은 울렁거리는 위장처럼 바람이 창문을 때렸다. 남자 다섯 명이 중산리 매표소 근처에서 잤다. 시골 노인들이 '차로 한 5분쯤 가면 된다'는 길이었는데 검은색 커튼을 펼쳐놓은 듯 한 산길에서 거의 30분 가까이 걸렸다. 한 낮에 핸드폰 중계로 알게된 wbc경기 결과를 저녁 뉴스로 봤다. sbs 뉴스에서 한 번 보고 mbc에서 또 봤다. 반복되는 뉴스였는데 야구 뉴스만 1시간 10분 가량을 본셈이다. 중계 그림도 거의 비슷하고, 아이템 구성도 거의 비슷하고, 그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도 거의 비슷했지만 마치 대마를 놓친 바둑기사가 복기 하고 다시 복기 하듯이 뉴스를 봤다. 사실 그 시간에 다섯명의 남자가 그 외에 할 마땅한 일도 없었다. 다들 놀음과는 거리가 멀고 술도 약간 정도만 하는 스타일들이어서 맥주 몇 병 사놓고 태어나서 TV 처음 보는 사람들 마냥 화면에 눈을 꼽다가 잠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청년 노숙자들에 대한 PD수첩의 나레이션을 들으며 잠들었다.

새벽 3시에 잠을 깼다. 바람소리때문은 아니다. 한 사람의 숨이 넘어가지 않을까 싶어서다. 동숙한 친구 중에 막내는 아주 아주 심하게 코를 골았다. 숙소가 마치 공사장이 된 듯 했다. 그 친구 말고도 5.1채널로 분산해서 코를 골았다. 새벽 3시부터 5시까지 나는 왼쪽 귀로 흘러들어가서 오른 쪽 귀로 흘러나오는 코고는 소리들을 취합하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 결국 다른 친구 하나가 막내에게 태클을 걸었다.  막내는 옷을 주섬 주섬 챙기더니 밖으로 나갔다. 이 추운 봄날 새벽에 도대체 어딜가려구...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지리산의 찬 공기를 받고 있을, 우리를 태우고 온 승합차에 들어가겠거니 생각했다. 아침에 안 사실이지만 그 시간에 깨어 있던 사람은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다. 모두들 잡고 싶지 않았다고 시레기국에 아침 밥을 넘기며 웃었다.  

나 역시 지리산 토벌대가 다녀간 듯 코를 골던 친구가 나가고 나서야 나는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나도 코를 곤다. ㅋㅋㅋ)

사실 출장 오기 전날 아내와 티격거리고 나왔다. 아이에게는 '응 엄마와 아빠가 생각이 좀달라서'라고 이야기했지만, 똘똘한 예찬이는 이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얼음땡'이 되어버렸다. 아이를 사이에 두고 격앙된 목소리가 오고 가니까 아이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아이 앞에서는 소리 지르지 말자고 하면서도 아내와 나는 매번 그말을 지키지는 못한다. 

"나는 그냥 들어가서 누워" 라고 해버리고 어찌 할 바를 몰라하는 예찬이를 오라고 해서 앉고 달래주었다. (이건 내가 하지 않았으면 아내가 했을 것이다.) 아이는 의자에 앉은 내게 폭파묻혀서 마음을 달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안심시켜주었지만 놀란 가슴이 쉽게 가라앉기야 하겠는가? 아이를 앉고 최소한 '아이 앞에서' 라는 원칙에 대해서는 반성했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원망이 풀리지는 않았다. 

 나는 회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회사 사람들이랑 어울렁 더울렁 말도 안되는 이야기하고 시간 때우는 것보다는 내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게 사회생활이 어쩌니,승진이 어쩌니, 이런 말들은 내 귀구멍 10리 밖에서도 먹히지 않는 말이다. 나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배철수 음악캠프와 이루마의 세상의 모든 음악 1부를 재핑하면서 퇴근길에 오른다. 7시정도에는 집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말'은 많으나 '소통'이 없는 회사사람들과는 한 달에 한 두번 회식자리나 참가한다. 부산에 절친한 친구들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게 내가 한달에 술자리 하는 총횟수일 때가 많다.  예전에 함께 일하던 어떤 젊은 여자동료는 나를 보고 '아메리칸스타일'이라고 했다. 나는 구대륙이 좋은데 라며 '유러피안스타일'로 바꾸어 달라고 농을 했다. 개인적이고,사생활을 중요시 여기고,가정을 중심에 놓는 태도를 약간은 부산 처녀가 비꼰것이다.  

출장 전날 일이다. 나는 그 날도 제때 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했는데 아내는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식으로 짜증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러려니 하고 아이와 노는 동안 아내는 식사를 준비했다. 예찬이는 그 동안 엄마와 아빠를 오고가며 부쩍 늘어난 반항아 기질을 보여주었다. 요즘 하는 말들의 80&는 '싫어. 하지 않을거야'이다. 일상적으로 매번 하는 이닦기,옷갈아 입기,밥먹기 등에도 한 참이 걸린다. 아내는 그날 결국 아이에게 짜증을 확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슬쩍 화가 나기 시작했다. 밥먹는 동안 아내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아이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를 쫓아가서 또 찝적거리고....영 심란했다. 개수대에는 설겆이거리가 작은 산만큼 쌓여있었다. 결국 아내에게 '내가 설겆이할께' 라면서 그냥 들어가 누워있으라고 했다. 그런데 이미 나 역시 평온한 상태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 설겆이를 하는데..이게 또 끝이 없더라...생각해보니 어제도 내가 산더미 같은 설겆이를 했다. 그리고 대충 좀 쉬자는데도 아내에 끌려 온 집안을 걸레질하고,또 빨래더미들 널고...갑자기 설겆이 하다고 화가 확 나버렸다. '나도 회사에서 하루 종일 일했다구....땡하고 집에 들어와서 아이하고 놀고...또 설겆이 하고....아이 잘 때까지 또 놀고...."  '...씨...나는 언제 쉬냐구" "도대체 내가 뭘? 내가 집안 일을 안하나, 맨날 술먹고 늦게 들어오길 하나. 아...왜? 난 언제 쉬어.' 결국 설겆이 하면서 입 밖으로 '씨...' '어휴....제길' 하는 소리가 계속 나왔다. 한참 듣던 아내는 결국 방에서 "누가 그거 하래? 그냥 쉬어. 혼자 책보고 음악 듣고 놀아. 누가 뭐래?" 이렇게 나온거다. 나는 억울했다. 난 그날 들어와서 단 5분 동안도 아무일도 하지않고 있었던 적이 없다.  "내가 언제 책보고 음악듣는다고 그랬냐? "그리고 내가 언제 책보고 음악들었냐? " 결국 엄마 방에 왔다 갔다 하던 아이에게 "예찬이 너, 엄마한테 들어가미자.엄마 쉬셔야 된다잖아. 너 들어가지 말라구 했지" 이러쿵 저러쿵....

결국 이러다가 대개 부부들이 그렇듯이 확전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은 사실 아내의 일과 남편의 일이 따로 있다고 확실히 구분해 놓는 상황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의외로 그런 부부들도 꽤많다. 선배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해야한다고 늘상 입에 달고 다닌다. 그리고 가장 재미있는건  여자들 역시 스스로 그런 역할 구도를 마지 못해서든,어떤형태로든 받아들인다. 그건 '아내의 일'이라는 것을 '아내'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지역적 특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부산의 남자들이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하다고 알려진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속성은 남자들에게만 한정되지도 않는다.이런 분위기에서 신혼 초에 아내가 다녔던 몇 몇 학원들의 모임에서  아내가'부러운 사람이거나 이상한 외지인' 취급을 받았던 것도 굳이 별난 경험은 아니다. 내가 '아메리칸스타일'로 불리운 것 처럼.  

이렇게 말하면 다들 자기 경험에 비추어 ' 넌 정말 많이 하는거야.'(그래 나도 안다) 당신 아내가 너무 많이 요구하는 거야'(나도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라고 한다. 대개그런 경우에 여자들은 '우리 남편은...꼼짝을 안해요. 그거에 비하면..' 이런 예를 든다. 결국 이건  아무런 유의미한 값을 얻을 수 없는 예이다. 나는 가끔 비겁하게 내가 싫어하는 동네 아저씨들을 예로 들며 나의 도움에 만족하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면 아내는 '자기가 욕하던 이 동네아저씨들의 가부장적 방식에 비교하고 싶니?' 라고 한방에 내가 든 예의 취약지점을 파고 든다.   

 나는 내가 집안 일과 육아에 적극적이고 상대적으로 많이 한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그럼 나는? ' '그건 기본아니야' 라고 생각한다. 어쨋거나 출장 가기 전날 성질 부린 건 내가 잘못한 것 같다. 물론 그날 바로 풀기는 했지만...여러모르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 수도 있었을 텐데...괜히 '욱'한건 내 잘못이다. 부부 사이에 '욱'해가지고 풀리는 건 하나도 없는데....그렇다고 모든 문제들이 대화와 타협으로 원만히 잘 풀리는 것만도 아니다. 참나...어렵네. 이제 곧 둘째가 나오면 육체적으로 더 힘들테고 이런 문제들은 반복적으로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발생할 수도 있는데... 시댁에서 애기 다 봐주고 툭하면 친정엄마가 도와주고 하는 상황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 힘들어...내가 결혼하면 이럴 줄 알았다니까...알고도 그러니 그게 인생이고, 아래 바닥없는게 뻔한데도 빠지는 게 운명인거지.. 인생 니 따위가 그렇지 뭐.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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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정명훈 사건'에 관심이 간다. 어젯밤 기사를 봤다.먼저 내가 음악가로서 '정명훈'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 음악 시장에서 정명훈은 유명한 지휘자들 다수 중에 한 명이고 그들과 비교해서 더 탁월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가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아직 유럽음악계에서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포디움을 장악할만한 인지도를 확보하진 못했다. 유럽 음악계의 보수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보수적 음악팬이나 음반 관계자들은 또한 실력면에서도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이름난 지휘자나 오케스트라라 할지라도 허튼 공연 한 방이면 공연 후 야유나 각종 미디어의 비난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 정명훈도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길 바라기는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춘추전국시대의 제후와 책사들만큼이나 뛰어난 음악가들 사이에서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를 제외하고 '정명훈' 을 애써 찾아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결국 그 정도 선에서 따뜻한 시선 정도를 보내줄 수 있을 뿐이다.   

카잘스는 스스로 음악가이기 이전에 한 명의 노동자라고 말했다. 그는 클래식이 귀족층의 음악이었지만 꼭 그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신념이 있었다. 카탈루냐 지방에서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나 동네 악사들을 중심으로 오케스트라를 꾸린 적도 있다. 그에게 음악은 상성부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곳에서 움직여서 온전한 대위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는 반파시스트주의자였고 프랑코정권에 끝까지 저항했다. 프랑코 정권 역시 그가 눈엣가시였지만 이미 이뤄놓은 명성때문에 함부로 처리하지도 못했다. 결국 그는 고향을 떠나서 미국에서 활동하지만 그의 음악과 마음은 늘 고향땅인 카탈루냐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제 이런 생각을 가진 음악가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더우기 클래식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체계가 고비용구조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클래식음악가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 환경아래에서 성장한다. 정치적으로 둔감한 것이 오히려 그들이 하는 예술에 더 깊이 복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음악가뿐만이 아니다. 음악가가 전문가의 영역으로 들어서면서 음악이라는 본질이 추구하는 통합적인 철학가치는 잊혀진다. 역사적으로는 전문가-부르주아지의 결합이 만들어낸 타협이다. 국내 음악가들은 주어진 악보을 완벽하게 연주해내는 것에만 집중하고 그걸 잘해내면 오케스트라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거나 운이 좋으면 어느 대학의 음악교수 간판을 단다. 그것이 그들이 일반인들보다 '더 정치적'이거나 '더 철학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머리에 이고 있는 '고전 음악'이라는 것은 분명히 '미학'의 대상이지만 그 아우라의 커튼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일뿐 '음악'과 '음악가'는 분명히 다른 존재이다. 즉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이 달은 아니다. 대개 사람들이 분노할 때는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이 마치 스스로 달의 사제인양 행세할 때다. 그럴 때는 겉으로 우아한 척 슬쩍 미소를 지어주고 속으로 '병신 분화구 밑창 떨어지는 꼴갑을 떨고 있네'라고 하면 된다. 베토벤의 위대함과 바흐의 화성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음대 교수가 부산 인디고 서원에서 독서토론하는 고등학생보다 더 진지한 사회,정치적 질문을 던지고 살 것이라는 착각은 버려야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아주 슬픈일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사는 세상과 인간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고 구체적 실천을 보여주는 진정한 예술가들은 대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다. 

목수정의 글을 읽었다. 그가 직접 경험한 분노의 진폭이 많이 느껴진다. 그러나 결코 충격적이지는 않다. 그녀는 왜 그렇게 충격적이었을까? 첫번째는 앞서 말한 착각때문이다.  

 "3월 20일,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지휘하는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러 샤틀레 극장에 갔다.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그 콘서트는 완벽하게 우리를 고무시켰다. 나와, 함께 간 성악을 공부하는 학생당원은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정신이 맑지 않을 수 없고, 정의와 진리를 담지 않을 수 없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런 단순한 착각이 어디있단 말인가? 똘방똘방한 사람들마저 예술의 마술에 걸리면 순간적인 이성이 마비되는 가 보다. 저건 착각이다. 카라얀은 나치에 줄을 댓고 푸르트뱅글러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음악은 아름답지 않았을까? 히틀러는 베토벤과 바그너의 열혈매니아였다. 베토벤의 위대한 음악을 감상할 능력을 갖추었기때문에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을까? 

목수정은 프랑스 공공노조도 흔쾌히,오페라단원들도 흔쾌히 해주는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당연하다. 그들이야 말로 같이 비맞는 처지의 평단원들이다. 결국 '노동자에게 국가는 없다'는 거대한 이름으로 연대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정명훈은 그렇지 않다. 그는 프리랜서 지휘자이고 오케스트라 내에서 음악적 권한은 있겠으나 오케스트라의 주인은 아니다. 진짜 오케스트라의 주인들인 음악가들이 당연히 한국에서 설움받는 같은 노동자이자 이름 잃은 주인들에게 친화성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목수정은 프랑스 공연노조와 정명훈을 비교하면서 낯선 이방인도 지지해주는데 '같은 한국인 지휘자가 어떻게'를 비교 배치한다. 그런데 진보의 연대기준에 '국적'과 '혈연'이 중심이 된 적이 있었는가? '국제적 연대'의 가치를  모를 이 없는 목수정은 감정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더욱'이라는 '국가적 연대'의 끈에 스스로 옮아든다.   

 특히 그를 경악케한 것은 정명훈의 촛불에 대한 인식인 듯 하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충격적인가? 보수신문에 매일 나오는 반응이고, 옆에 있는 직장 동료들의 반응이기도 한 것 아닌가? 정명훈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가 '촛불' 문제에 대한 정보와 인식이 상당히 빈약하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과연 한국인이 모두 '촛불'에 지지를 보낸 적이 있던가? '촛불'은 정당하고 올바른 일이었으나 '모든' 한국인이 촛불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적 물질성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정명훈이 거기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기대하는 것도 또 그와 함께 촛불에 동의를 기대하는 것도 지나친 의도는 아니었을까? 

또한 정명훈을 찾아가고 서명을 요구하는 방식도 의도의 순수성이 지나쳐서 절차적 정당성의 흠집을 잡힐 만 하다. 이건 문화적,또는 산업적 관례의 차원이기도 해보인다. 갑자기 찾아가서 운동에 서명 받는 방식은 다분히 순순한 한국적 발상이다. 물론 정명훈의 인식수준에서는 제대로된 절차를 따랐어도 서명을 해 줄일이 없었을 듯 하지만 말이다. 정명훈도 나름대로 공인이고 셀러브레이티 아닌가?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부담스러운 판국에 '우르르 싸인해주세요'는 거절의 빌미를 대기에도 아주 좋고 또한 상식적이다.  

  "기왕 온 김에 단 3분이라도 그에게 우리의 육성으로 절박한 현실을 전하고 그의 예술가적 양심에 호소하고 싶었기에, 우린 그에게 전달할 문서를 들고 기다렸다. 그러다가 호텔의 한 직원이 우리에게 누구와 약속이 있냐고 묻고, 그렇지 않다면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돈 많은 현대의 귀족들의 충실한 심복 같은 그들은 물리적으로 우리를 쫓아낼 판이었다. 실랑이 끝에 겨우 정명훈에게 남길 메시지와 한글로 된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문서를 남기면 호텔측에서 그 문서를 전달하기로 하고, 글을 거의 다 쓸 무렵, 마침 그들의 긴 만찬이 끝이 났다. 정명훈은 우릴 발견하자마자 다가왔다"
 

대충 읽어보면 어떤 의미의 서명인지에 대해  정명훈에게 사전 설명같은 것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이 쪽에서는 실랑이 끝에 겨우 사건 메시지와 사건 개요만을 전달했다. 정명훈은 별로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일이었을테고 이제 대충 내용을 파악하고 그의 정치적 입장을 밝힌다. 그 결과는 앞서 말했듯이 그의 '정치적 보수성'과 '인식의 협착성' 정도만 확인한 것 뿐이다. 시장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음악가로, 모국의 정권과 가까이 지내서 손해 볼 것 없는 지휘자로,(사이가 불편해도 딱히 손해볼 건 없을것 같은데...모르지 보험정도로 생각할 수는 있을테니) 그런데 이런 음악가나 전문가들이 정명훈에만 해당할까? 사실 정명훈이라는 개인의 정치적 생각을 읽어본 정도 외엔 그다지 큰 감흥이 없다.그의 부박함에 동의하지도 박수를 보내지도 않는다. 감흥이라면 목수정이 생각보다 상당히 순수하고 열정적이고,또 감상적이라는 정도다. 목수정이 그저 정명훈의 정치적 생각을 파악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같다. 그런데 개인적 모욕감까지 겹쳐지다 보니...좀 더 감정적으로 격앙된 된 듯 하다. 

 이런 방식은 진중권의 싸가지 없음에 대해 최근에 다른 팀의 보수적인 부장이 구구절절 해대던 방식과 똑같다. 진중권이 전화를 아주 싸가지 없이 받았단다.."어떻게 전화번호 알았어요. 거기가 뭐하는덴데요...나 바빠요. 뚝...띠띠띠' 전화를 한 당사자는 그나마 그동안 진중권에 우호적인 편이었는데 몹시 불쾌해했다.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해지고 있으니 옆에 있던 부장이라는 양반이 그랬단다. "거 봐...너네들 진보라는 애들이 열광하는 자의 수준이 그정도라니까...기본적으로 인간도 덜 된 것들이잖아"  전화를 건 이는 그 부장도 싫고 진중권도 싫었다.  "아...짜증나.둘다 짜증나.왜 나한테 그러냐구...진짜 인간 무시하네...으윽"

굳이 정명훈에게 뭔가를 얻어야 할 필요는 없는것 아닌가?  

어쨋거나 이 글을 목적은 달성되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노이즈마케팅으로 인해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국립 오페라단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음악을 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서민적 웃음을 선사하고....이런 이들이 그들이 만드는 '작품' 처럼 한결 같을까? 그것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이런 순진한 생각은 언제쯤 사라질까?  사실 나도 '예술전문가'들 보다 '진짜 예술가'들이 그립다. 그들의 굳이 정치적이고자 하지 않지만 그런 비정치적인 예술의 모험성과 진취성,혁명성이 현실의 맥락에서 공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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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싫어하는 아이들... >

1. 별로 대단치 않은 것을 부여잡고 그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아이들... 

2. 자기가 무슨 침대 홍보대사인 줄 알고 흔들리지 않는 아이들... 

3. 태생적으로 자기가 흔들리는게 자존심이 무척 상한 아이들...

4. 그 아이들이 커서된 어른들  

 

<나만 좋아하는 아이들... >

1. 마구 마구 흔들려서 자기의 파편이 온사방에 흩어져 있는 아이들.. 

2. 흔들리면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아이들... 

3. 그래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아이들... 

4. 그 아이들이 커서된 어른들... 

 

나는 '진보/보수주의자들' 의 구분보다 조금은 존재론적이며 미학적인 구분을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다. 자고로...연애는 누구나 많이 해야한다. 그래야 삶이 덜 지루하다. 아..나 요즘 좀 지루하구나. 아...자금도 떨어지고 시간도 없고 필드 생활은 접었고...긁적 긁적...주머니에 만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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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블루스'는 두 가지 의미다. 하나는 음악 장르로서의 '블루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도회장에서 땀을 식힐 때 나오는 무드음악 '블루스'이다. 사실 후자는 음악적으로 보자면 무차별 초월장르다. '도라지 위스키' 가 무언지 궁금하게 만드는 '낭만에 대하여'가 될 수도, 봄밤 고양이의 앞발짓 같은 색소폰 소리로 기억에 남을 '부주의한 속삭임'이 될 수도 있다. 선곡은 그 때 그 때 나이트클럽의 DJ의 기분이나 무도회장 사장님의 취향에 맞춰 결정될 것이다. 또는 고객들의 분위기에 맞춰 그들을 매끄럽게 돌 수 있게 하는,그래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하얀 면사포로 살짝 가리울 수 있는 기능성 음악이 바로 무도회장 '블루스'의 특징이다.  

앞서 말한 장르로서의 '블루스'가 고향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들의 애환과 욕망을 대변한다면 후자는 압축된 한국형 자본주의의 서민적인 욕망 배출구인셈이다. 검붉은 색 조명과 휘휘 도는 네온들-마치 따라자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의 상징인양- 속에 있는 초라한 개인은 그저 아랫도리의 욕망에 집중하기 위해 느린템포에 발을 얹고 슬로우 슬로우 퀵퀵을 돈다. '아...당신은 못말리는 땡벌 땡벌!' 

전후 흑인들의 블루스를 이야기 할 때 'maxwell street' 를 뺀다면 중국집 메뉴에서 '자장면'을 발견하지 못한 당혹감정도로 낯선 것이다. 왼쪽에 있는 로버트 나이트호크의 파스텔톤 자켓 하단에도 그 거리의 이름이 발견된다. Live on Maxwell Street 1964. 로버트 나이트호크라는 블루스 뮤지션이 1964년 시카고의 맥스웰가에서 라이브로 녹음한 음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maxwell street는 뭐하던 곳인가?  다행히 유투브에 좋은 동영상이 있다.  

 

그렇다. 맥스웰가는 시카고에 있는 주말시장이다.'선데이 마켓' 이라고 하나? 하여간 우리말로는 '장터'라고 한다. 맥스웰 장터에는 우리 시골 장터처럼 온갖것들이 다 나와있었다. 물건뿐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말이다. 유명한 블루스연주자들은 이 거리에서 즉석 연주를 들려준다. 이 곳은 나름대로 경쟁의 장이기도 했다. 관객들은 당연히 훨씬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는 사람들 앞에서 몸을 흔들었을테니까 말이다. 자유로운 '소통의 장'이자 '경쟁의 장'이다. 실제로 시카고의 음악비즈니스계 사람들은 이 곳에서 실력있는 뮤지션들을 픽업해서 전국구로 만들었다.  

영화 <캐딜락 레코드>의 주인공인 레오나드 체스(에드리안 브로디 역)가 만든 레코드사인 '체스 레코드'는 당대 시카고 블루스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맥스웰 스트리트와 관련을 맺었다. 최소한 그들이 체스레이블에 얹히기 전까지는-물론 그 이후에도- 거의 모두 맥스웰 스트리트를 밟아보았다고 해도 지나친 상상은 아닐 것이다. 체스레코드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또 시카고 블루스의 상징처럼 불리우는 '무디 워터스'(영화 포스터에서는 아래에 있는 제프리 라이트이다. 왼쪽 상단에 있는 여인네는 체스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졌던 'At last'의 에타제임스이다. 이 영화에서는 노래잘하고 예쁜 비욘세가 이 역을 맡았다.) 이다.  

시카고 블루스는 전후 1940년대 중후반부터 자리를 잡았던 블루스 스타일 중 하나이다. 블루스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도시이고 시절이었다. 왜냐하면 이 때 부터 흔히 'urban blues'라고 하는 것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듣는 BB KING의 '소프트 블루스'-무디 워터스 '하드블루스'에 비하면- 나 6,7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랑받는 에릭 클립튼 류의 블루스락등이 이때부터 블루스계에 자리잡게 된다. 그 전 까지는 쉽게 말하면 통기타나 소규모의 장치로 블루스를 연주했다. 에릭 클립튼이 트리뷰트 음반을 내기도 했던 로버트 존슨 시대다. 전후 미시시피 델타지역에 있던 흑인들은 일자리를 위해 강을 타고 시카고에 도착한다. 시카고 블루스의 이행기라고 할수 있는 시기에 주목할 만한 아티스트는 빅 빌브룬지와 팀파레드이다. 결국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돈이 있고 또 돈이 있는 곳에 대중 음악도 있다. 이때 부터 뛰어난 뮤지션들이 시카고에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과거 단출했던 블루스에 전기 장치를 대폭 도입한다. 드럼과 베이스, 하모니카(이건 통기타시대때 부터 블루스의 상징이다.) 등이 그들의 음악에 가세하고 이것은 현재에도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로버트 나이트호크의 이 음반은 1964년에 맥스웰가에서 녹음된 것이다. 이미 그 때는 흑인 정통파 블루스맨들은 힘을 잃고 가라앉고 있는 시점이었다. 영국의 젊은 락커들이 블루스에 심취했으며 또한 댄스리듬이 가미된 리듬 앤 블루스가 블루스를 대체하고 있었다. 그나마 시카고 블루스에서 조금 멜로디 라인이 풍부했도 유연했던 BB KING은 백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맥스웰가의 라이브 녹음에서 나이트 호크는 전설의 슬라이드 기타를 들려준다. 흔히 '보틀넥'이라고 하는 방식인데, 오른손 잡이의 경우 왼손가락에 금속으로된 손가락 연통을 하나 씌우고 지판위를 오르내리는 거다. 락 팬들로부터 또한 블루스 팬들로 부터 가장 사랑받는 기타리스트 중에 한 명인 '올맨 브라더스 밴드' 의 듀언 올맨이 바로 슬라이드 기타로 젊은 시절 에릭 크립튼을 매료시켰다. 프로젝트 그룹으로 끝나고만 '데릭 앤더 도미노즈'에서 '레일라'가 바로 그 둘의 만남이 음악 역사에 남긴 선물이다. (듀언 올맨은 아깝게 그 앨범 이후 몇 년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나이트 호크는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듀언 올맨의 한참 선배쯤 되는 사람이다. 이 양반은 동가숙서가식하는 블루스맨의 영혼을 그대로 따랐는지 평생 제대로된 자신의 음반 한 장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에 만날 수 있는 음반은 사후 정리된 음반들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것이 가장 블루스다운 방식이기도 하다.   

블루스는 장터의 음악이다. 최대한 많이 현대식으로 바꾸어도 클럽의 음악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따라하고 야유하고 흥을 넣어가면서 연주하고 듣는게 바로 블루스 음악이다. 블루스의 모태가 그런 노동요의 기원에서 나왔기때문이다. 나이트 호크의 음반은 그런 면에서 정말 '살아 있는 블루스'를 들려준다. 음반 자켓 처럼 저렇게 거리 한 구석에 죽치고 앉아서 연주를 하고 그냥 오고가는 장터손님들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듣는거다. 그리고  한마디씩 후렴구를 따라하고 박수를 치고 ..우우우 하고 추임새를 넣는다. 그의 대표곡인  Cheating and lying blues에서 부터 나이트호크는 살짝 살짝 불을 지피는 노련한 슬라이드 기타 연주를 들려준다. 그러다가 첫 간주 후반부 부터 리듬감이 풍부한 슬라이드의 묘미를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더 진화된 블루스 락에서 듣는 슬라이드 기타보다는 어쿠스틱한 느낌이 강하다. 로버트 나이트호크는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사이의 이행기적 단계를 보여주는 듯 하다.  3번째 곡인 the time has come는 처음부터 구경거리보러 온 잔칫군들의 목소리가 높다. 현장 라이브라고 녹음의 정밀도는 그다지 높지 않고 보컬이 특정 데시벨 부분에서 약간씩 깨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느린 템포로 유장하게 노래를 하던 로버트 나이크호크는 중반부에서 공격적인 리프와 애드립으로 묘한 대조를 이루어낸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반복되는 느림으로 돌아온다. 흔히 말하는 12바 블루스의 전형적인 패턴으로 말이다. honey hush는 홍키통키한 리듬이다. 이쯤 되면 거리의 관객들은 이미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주 단순한 코드의 단순한 멜로디..그리고 반복. 템포는 알듯 말듯 조금씩 빨라져간다. 그리고 선창-후창....곡의 템포는 다시 느려지며 다음 곡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앞의 곡과 뒤의 곡으로 넘어가는 것에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마치 케이크를 양쪽으로 나누어 놓은 듯 보인다. 나는 가끔 이럴 때 트로트를 떠올린다. 블루스와 트로트는 어떤 면에서 비슷하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코드 진행이 좀 한정적이다. 그렇다보니 유사한 느낌을 주는 곡들이 많다. 왜 있지 않는가...'밤비 내리는 명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짠짜라 짜라짜라 짜라 짠짠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가끔 트로트를 혼자 웅얼거리다 보면 A라는 곡에서 시작했는데 C로 끝난다. 5번째곡 I need your love so에서는 거리의 자존심을 세워줄 만한 멋진 슬라이드 기타 후주를 들을 수 있다. 이 음반의 12번째 곡은 객원 보컬리스트가 참여한다. 마치 팔세토 창법의 블루스를 듣는 듯 옹골차게 깍아 지르는 보컬의 주인공은 JB 르누아르이다.  마틴 스콜세지 기획한 '블루스' 시리즈에서 빔 벤더슨 감독이 < SOUL OF THE MAN>에서 위대한 블루스 맨으로 추모한  3명의 블루스 맨으로 등장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르느와르의 보컬에 맞서서 나이트 호크의 기타 소리 다른 곡에서 보다 더 날카로와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모니카 연주. 이 셋의 어울임이 가히 최강이다. 마지막곡은 그냥 그림을 그려보는게 더 좋을 듯 싶다. 연주곡이다. 살짝 눈을 감는다. 장터 사람들이 음악 속에서 덩실 덩실 제각가의 춤을 추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음악은 가끔 아편을 필요로 하기도 하는데 또 스스로 아편이 되기도 한다. 이 음반 마지막에는 13분 가량의 인터뷰가 있다. 그가 살짝 살짝 연주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철지난 라디오방송을 듣는 듯 반갑다.

유투브에 로버트 나이트호크의 동영상이 있어서 아주 반갑게 올린다. 다큐멘터리에 삽입된 장면인 듯하다.

 

 영화<블루스 브라더스>에는 맥스웰거리를 추억하는 장면이 나온다. 존 리 후커가 그 당시를 추억하는 듯 boom boom boom을 부르는 바로 이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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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이북스의 책들 중 몇 권이 50% 가격에 나왔다. 그 동안 서점에서든 알라딘에서든 봐왔던 책들이어서 이 참에 주문을 했다. 관심 있으시면 찾아보시고... 특히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은 1088페이지의 정말 묵직한 책이다. 이제이북스에서 나온 홀링데일의 <니체>도 인터넷에서는 품절이어서 서점에서 구했는데...아마 이 책도 곧 없어질 듯 싶다. 헤겔에 관심이 있다면 지금 당장 읽지 않더라도 저렴한 가격에 나왔으니...^^  헤겔의 <근대철학사 강의> 요약판은 또 무지 얇다. 칼 뢰비트의 책과 함께 서점가서 만지작 거리기만 했던 책들이다.

 

 

 

 

 

 

 

그 외에 인문사회 50% 전이 있던데...대략 장하준과 리프킨의 책들이 눈에 쉽게 들어왔다. 이제이북스의 책들보다 점 더 대중적인 책들이 많다.   

장하준을 따로 더 볼 생각은 없고 대신 이 책은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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