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은 올초 알라딘 블로거들이 올려주신 출간대상 도서중에서 기대했던 책 중에 하나다. 1944년에 나온 유명한 책이다. 2차 저작들이나 인용을 통해 알게된 책이다 보니 구하기 어려워진 원저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중고서점에서도 쉽사리 찾아지지 않았다.   

  다음 달에 <거대한변환>의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는 듯 하다. 먼저 <한겨레 21>에서 폴라니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알라딘의 블로그에 폴라니의 이름이 자주 거론될 듯 하다.   


이 책이 '대우학술총서'로 나왔던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이다. 서점에서 몇 번 찾아봤으나 실패했고 한울에서 나온 입문서 하나를 찾아낸 적이 있다. 


J R 스탠필드의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이다. 폴라니의 접근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있다면 볼 만한 책이다. 책의 분량 역시 그다지 많지 않다.  

 

 

 

 

 물론 현재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폴라니의 책은 책세상 문고에서 나온 홍기빈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이다.  세계체계론의 친절한 입문서인 <자본주의 역사강의>에도 세계체계론의 전사로 칼폴라니의 사상을 정리하는 장이 나온다.

 

 


  

 

 

 

 예전에 정리했던 걸 잠시 찾았다... 

칼폴라니와 세계체계 분석의 전사

1.폴라니의 두가지 수용  

1)제도주의자로서의 폴라니 : 

 제도주의와 신제도주의의 차이-신제도주의는 시장의 우위성을 인정하는 전제하에서 시장이 사회적 맥락속에 작동한다고 봄. 시장 형성의 차별적,제도적 배경을 설명하는데 폴라니가 응용.그러나 이는 신고전파의 시장관과 유사, 다만 그 시장이 존속하는 방식에서 경로 의존성으로 나타나는 특이성만 찾는 것. 폴라니에게 중요한 차이점은 시장에 층위가 있다는 것.즉 서로 다른 시장의 존재성 인정.

2)근대자본주의 비판으로서의 폴라니

19세기 영국 자본주의 역사정리 

 1) 자본주의의 영역이 생산으로 확장됐고 노동에 대한 포섭이 이루어졌다 

 2)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확대됐다.---->세계적 변화 속에 이에 대한 대응이 어떻게 나타났고 그것이 어떻게 전지구적 위기를 낳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관점

2.폴리니의 핵심논점

1)19세기 영국 헤게모니하의 질서하의 구성적 특징: 백년평화, 금본위제, 자기조정적 시장경제, 자유국가

; 1825년 나폴레옹 패배이후 1914년 1차세계대전까지 유럽에 전면전이 없었다.영국 헤게모니를 지탱하는 것은 영토 제국주의와 해군력 그리고 경제적 토대로서의 금본위제. 국제결제통화로서의 파운드를 지키기 위한 투쟁.

* 금본위제를 신앙으로 받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이데올로기: 보이지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며 정부 개입을 불필요하다. 더 이상 경제가 사회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상태. 이 관계가 형성되면 사회가 통제할 수 없는 시장이 나타나 사회를 위협하고 사회가 다시 여기에 저항하게 되는 구도가 등장. (사회의 이중운동. 시계추 운동 개념)파편화된 개인 주체를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고 경제와 정치의 분리를 선언한 자유주의

2)시장의 층위: 국지적 시장, 전구시장, 원거리 시장 : 시장 발전의 분화론은 거짓 신화이다.시장발전의 맹아론 비판.각 시장은 개별적으로 분화하여 다른 성격으로 발전된다.

전국시장의 발생 과정에 국가 간섭-중상주의: 네덜란드의 유럽시장 대응에 비해 뒤처진 영국 프랑스의 중상주의가 전국 시장을 형성, 비로소 경쟁적 시장이 형성된다.

3)허구적 상품 : 노동력,토지,화폐

19세기 전국시장의 등장과 함께 기계제 생산방식 도입.생산의 영역이 자본주의에 의해 장악됨.투자리스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 개입이 당연시됨.

기계에 의한 상품 생산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 노동력의 안정적 공급 필요.

노동력의 상품화 과정: 이전에 노동자는 토지와 분리되지 않음.19세기 산업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전통 사회의 보호장치가 해체됨.영국의 경우 스핀햄랜드법(구지주의 공동체 복귀노력) 과 신 구빈법(빈민구제 목적,열악한 환경)이 노동력의 상품화 경향성의 예. 노동자들은 '기아의 위협' 이라는 규율에 따라 아사할 것인가 노동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임.즉 노동의 상품화는 '기아의 규율'에 의해 만들어짐. 

4)사회의 자기보호 실패

비자본주의적인 것의 자본화로 인해 발생하는 위기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을 생성.사회의 자기보호메커니즘은 반동적형태로 나올 수도 있음.(19세기 경우 지주들의 공동체주의와 보호무역)

보호무역: 자유무역을 유지하면서 금본위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국제 교역이 커지며 자국화폐의 안정성이 무너지기 때문.금본위제를 지키면서 자국경제를 보호하는 방식은 보호주의.그런데 각 국이 보호주의를 택할 경우 자유무역은 무너지는 딜레마.1차세계대전 촉발의 원인

5)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실패에 대한 대안으로 세가지 형태 등장: 파시즘, 사회주의, 뉴딜.

뉴딜의 성공-영국 헤게모니에서 미국 헤게모니로 전환의 절정 .이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 자체를 통제하는 방식.금본위제 제어, 고도 금융제어, 노동 상품화 제어...

3.폴라니에 대한 평가

1)강점-노동력 상품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존재임을 증명.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기아의 규율이 필요햇으며 그것은 상시 국가를 매개로한 억압적인 재생산과정/

19세기의 단절점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제기. 그러나 폴라니의 "이중운동"(시계추 운동)은 모호한 지점. 폴라니의 '사회' 개념이 지나치게 광범위함.

2)한계-아래로부터의 대응이나 저항이 포착되지 않음/상품화된 노동력이 실제로 노동자가 되어 생산에 들어갔을 때 거기서 발생하는 변화 포착 안됨.

폴라니는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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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님의 딸기 사진을 보면 가슴이 콱 막힙니다. 한시 중에 그런 시가 있었는데 제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요....매화를 보고 지은 시입니다. 나라는 망해도 매년 스스럼 없이 피는 매화를 보면서 읆었던 시입니다. 망국에도 불구하고 세상사에 초연한 듯 피어난 매화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들법합니다. 경주 남산에 가서 오래된 마애불을 볼 때 또는 어느 시골 마을 어귀에서 오래된 법수를 볼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것들은 얼마나 오래 변화하는 사람들을 보아왔을까?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지나가는 할아버지의 손자때 모습도 기억하고 있겠지... 무한성은 가끔 끔찍함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떠난 자리마저 지켜야 한다는 것은 무너진 궁전의 댓돌만큼 쓸쓸한 것입니다. 

빚만 남기고 떠난 주인, 그 자리에 지난해 처럼 팔리기를 바라며 피어난 딸기꽃...무심하게 자라나 떠난자들의 그림자를 짙게합니다. 사람들은 또 어딘가에서 삶을 이어갈 것이고 영문몰라 하는 딸기밭도 내년이면 갈아엎어지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겠지요. 

전 '안되면 농사짓지' 하는 말은 무책임한-좀 심하게 말하면 싸가지 없는 말-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서 집안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도 다시 촌에 들어가서 농사 지으려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한다고 합니다. 마지못해 등떠밀려 밭일 하던 것과 자기의 농사를 짓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지요. 거기에 도시물로 노곤해진 근육을 가지고는 감당해내지 못할 일입니다. 가끔 아내와 다투는 일 중에 하나는 아내가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한다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일할 때 하고 쉴 때 쉬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럼 아내는 늘 똑같은 말을 합니다. "집 안 일이 그런 줄 알아.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하지 않으면 바로 표나고...그런거야"   농사일도 이와 비슷할 겝니다. 거기에 다른 점은 농삿일은 '자연'이라는 변수와 '정책'이라는 변수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집 안 일을 하지 않았다고 빚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농사일은 애써 1년을 품팔고도 얻는 것은 빚 뿐일 때가 있습니다. 귀농에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첫번째 절대 짧은 기간 내에 이익을 얻으려 하지 말하는 말을 합니다. 내가 농사꾼이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되고 기회가 맞으면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지요. 

전 가끔 시골을 꿈꾸지만 결코 농사를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단 한번도 제 손으로 농사를 지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사일을 허투로 생각치도 않습니다. 아마 시골에 간다면 그냥 나와 내 가족, 가까운 친척들에게 줄 수 있을 정도의 텃밭 정도나 꾸릴 수 있겠지 생각합니다.  

지난 해 인가 저희 손위 처남이 배를 타러 내려왔습니다. 한 몇 개월 놀다가 마지막으로 선원 모집을 보고 온거지요. 처지를 아니까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밤에 아내와 누워서 '왠만하면 막고 싶다" 고 했습니다. 다음 날 처남은 알선 업체를 다녀온후 그냥 고향으로 올라갔습니다. 만나서 사람들과 이야기해보고 나니까 호기롭던 사람도 덜컥 겁이 났던거겠지요. 바람이 조금 이는 날 고깃배 타고 1시간정도만 나가면 왠만한 사람은 자기 속에 들어간 모든 내용물들을  눈 앞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나 칸트 할아버지가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의 토사물을 보면 진짜 물질성이 뭔가 확 깨우치게 됩니다. 그게 물질성이지요. 느릿 느릿 카지노가 구비된 여객선에서 MP3로 낭만적인 음악과 함께 만나는 바다와는 완전히 다르지요. 돈이고 나발이고 다 떠나서 그냥 발을 댈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든 내리고만 싶어집니다.  처남은 나중에 돌아온 이유에 대해 '여기까지 가서는 안되겠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배를 타는 일을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세상에 가장 험한 일중에 하나가 뱃일이고 함부로 덤벼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처남은 지금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보험일을 합니다. 여건히 녹록치는 않지만 그래도 먹고 살만은 한가 봅니다. 

아내는 아이와 과일을 먹을 때, 또는 아이가 음식을 함부로 취급할 때 반드시 '이거 만든 햇빛과 물과 농부 아저씨들을 생각해봐. 그러면 되겠어?' 라고 아이를 가르침니다. 저 역시 그렇게 따라하지만 또 가끔 잊고 삽니다. 제가 한살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농부와 소비자가 서로를 안다는 사실입니다. 농사와 유통의 거리가 길어지면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서로 벽에 대고 이야기하지요. 생협이나 한살림같은 운동의 취지는 이런 벽을 없앰으로써 가격보전의 효과도 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거리를 없애는 것이지요. 소규모의 공동체는 그런면에서 더 윤리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이의 아토피때문에 시작한 일이지만 지금은 작은 정치적 실천이기도 합니다. 식탁에서 소식지를 보곤 합니다. 가격 폭락때문에, 지난 장마로, 냉해가 일찍와서...등등의 글들을 보면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주인이 떠난 자리에 피어난 딸기를 보면서 하루 종일 마음이 심란합니다. 떠난 사람은 어떻게 생을 이어갈지, 또 그 아이들은 다른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덩그러니 남을 딸기는 또 어떻게 외로울지.... 예전에 노숙자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저랑 별반 다르지 않은-그러니까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그런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몇번의 실패를 연달아 겪고 나면 서울역 천장을 지붕삼을 수도 있는 거지요. 자본은 늘 그런 공포를 무기로 이용하고 스스로 그런 공포에 휘말리지 않도록 심지를 굳힙니다만 가끔은 두려울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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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은 冊으로 쓰고 싶다고 했던가... 

book으로 쓰던  livre 라고 쓰던 상관없다. 

난 책을 좋아하지만 가끔 '책'을 왜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심심풀이로, 똑똑해지려고, 여자들 한테 좀 있어 보이려고,  미적 향유를 위해, 자기인식 확장을 위해, 또는 세계의 구성을 위해, 변혁의 근거를 위해, 밥벌이를 위해, 상대를 누르기 위해, '오난'을 위해...  

이런 생각을 한다고 당장 '책'을 끊고 산으로 가지는 않는다. 산에 사는 건 쉬운지 아나보지?  

이런 글이 있는데.. 

"텍스트적 저항을 위한 글읽기가 식민주의 텍스트 내부의 모순과 양면성의 '이론적' 해명에 전적으로 매달릴 때, 전복적 주체성은 식민화된 혹은 탈식민화된 주체로부터 분리되어 서구의 제도권 문학비평가가 실시하는 텍스트 작업 속으로 함몰될 수 밖에 없다." 

최근에 보고 있는 탈식민주의 관련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글에서 '식민주의' 대신에 '이론'이나 '학문' 또는 이의 전달체이자 상징으로서 '책' 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  어찌되었거나 가장 마지막 구절에서 다시 만나는데 '텍스트 작업 속으로의 함몰'이다. 텍스트 작업으로 빠져드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선천적 능력도 필요하고 개인적인 말하지 못할 고생도 감내 해야한다. 자기치열함이 없으면 제대로 함몰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함몰은 선택적으로 마땅히 대접 받아야 하지만 또한 일반적으로  비난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원죄처럼 '텍스트의 함몰' 은 이마에 걸고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일단의 비건강성의 증후로 제시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야 하는가? 그런 개인은 어떤 자세여야 할까? 

최근에 바람구두님도 인용한 <대학>의 첫장을 인용한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남명 조식 선생은 이 구절을 학문의 요체로 여러 번 강조하셨다. 그리고 선생이 직접 말하기를 "반평생이 넘도록 이 뜻을 공부 했지만 그 의미를 다 헤아리기 어렵다." 라고 말씀하셨다. 알아서 듣는 것은 후학의 몫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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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
프리도 릭켄 지음, 김성진 옮김 / 서광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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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드팀전): 안녕하십니까? 

A.(드팀전 @) : 안팎으로 부는 바람이 날카로와서 그다지 안녕치는 못합니다. 배를 바닥에 깔고 있자니 답답하고 고개를 들자니 모래바람에 눈을 뜨기 어렵군요. 

Q: 음...(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인데 '안녕합니다' 하면 되지..) 그렇군요. 요즘 직장인들을 대표한다는 사자성어 '복지부동'을 실천하고 계시군요. 

A: 예,'복지부동'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살아가려면 바람의 움직임을 잘 살펴야 하는데 그렇게 영민하지는 못해서요. 고성능안테나를 올리지는 못하고 바닥에 머리 박은 김에 모래 위에 개미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고 있어요. 꼬물 꼬물 다니는 녀석들의 움직임을 보는 것도 새로운 발견입디다. 

Q: (이거 완전 똘아니야?. 농담따먹으며 뭔 인터뷰를 하겠다고) 예 예.. 후에 개미 연구 성과물이 나오면 그 이야기는 그 때 다시 한 번 하기로 하구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먼저 요즘 난데 없이 지중해쪽으로 가셨습니다. 여권이나 비자도 없이 말이지요. 최근 그리스에 관심을 가지신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A: 음...글쎄요. 일종의 '오래된 미래' 의 자기 발견정도 아닐까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걸어왔던 길이잖아요. 예를 들자면, 몇 년전 부터 산티아고 순례가 여행객들의 필수코스로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산티아고 길 옆에 사는 농부인 셈입니다.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열심히 가는 걸 보아만 온거죠. 그러면서 한동안 '뭐 한다고 저런데..'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농한기도 되고  할 일도 없고 그런 참에 '저기 가면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서 그냥 뒷꽁무니를 따라가는 그런 형상입니다. 

Q: 네...그래도 무언가 좀 더 특별한 계기나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듯 한데요. 

A: 앞서 말했듯이 큰 계기는 따로 없구요...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적은 있습니다. 학문을 하는데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직업으로서의 학문' 다른 하나는 '교양으로서의 학문' 말이지요. 30대 초반쯤에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아마 그 때 공부를 계속 했으면 유학가서 '예술사회학'이나 '문화연구' 같은 걸 했을 것 같아요. 어쨋거나 그 길은 제가 가지 않았던 길이었구요. 그러니까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일단은 포기한 거지요. 결국 남는 건 '교양으로서의 학문'입니다. 전자에 비해 학문적인 객관성이나 엄정함,체계성 같은 것은 덜할 수 밖에 없어요.대신 잡식성의 즐거움은 있습니다. 억지로 딱딱한 걸 먹어서 배탈날 일도 없구요, 적당히 자기가 조절하면서 씹어낼 수 있으니까 좋구요. 가끔은 목마를 때 레몬에이드도 한잔 마실 수 있구요. 제 현재 위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세부적인 철학 용어 하나를 가지고 그 의미와 해석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도 필요하고 ,물론 그 역할도 중요하지만 제게 그건 '학문하는 전문가' 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저런 것들을 깨치고 느껴서 자기 안에서 어떻게 통합해내고 또 나를 변형해내고...결국엔 그게 세상을 어떻게 변형해 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 어떤 철학자 하나 열심히 읽고 그 세론들을 분석하며 연구소에서만 왕 노릇하며 대접받는다면 그거는 '포름알데히드 철학'을 통해서 자기자리 보전하려는 생계 수단인거죠. 별거 아니에요. 농사꾼이 '쟁기'로 생계를 유지하는 거고, 대학 교수는 '학문'을 쟁기삼아 먹고 사는 거죠. 중요한 것은 그 '쟁기'가 아니라 '쟁기'를 쓰는 사람이니까요. 쟁기를 날렵하게 갈았다고 그가 최고의 수확을 거두는 것도 아니고 하늘과 땅의 섭리를 아는 농사꾼도 아니라는거지요. 사람들은 가끔 착각을 해요. 전문적인 용어의 엄밀성을 따지며 상대방의 '야코'를 죽이면 자기가 위대한 인간이 된 줄 압니다. 그런데 그거 그냥 '좋은 쟁기'만 열심히 닦아대다 보면 하는 거에요. 앞서 말했듯이 '좋은 농부'는 '쟁기'만 갈지 않지요.  

학문이라는 쟁기 가는데 청춘을 다 보낸 이들도 사실 불쌍하긴 해요.대학이라는 바닥은 자칭 '달마대사'같은 노인들이 엉덩이까지 파묻고 있어서 뚫기도 쉽지 않지요...간접적으로 들어본 바에 의하면 그 바닥이 아주 상종못할치들이 많지요. 배운 건 많으니 말들은 많고 지기는 죽기보다 싫고...하여간 한국의 학문구조가 그래서 제가 공부를 안한 걸 수도 있어요...핑계치고 약하지만. 어쨋거나불우한 강사들을 여럿 알아서 그런지 ^^  

Q: 그러니까 '교양인'으로서 이론적 엄정함과 학제적인 틀에 신경을 덜 쓰며 사는게 좋다는 말이시군요. 그런데 '그리스철학'에 기본적인 공부를 하신 적은 있나요? 

A: 기본적인 공부라여 그저 대학교 철학사 수업수준이지요. 소크라테스를 읽었던 것도 그 때였던것 같구요. 딱히 그리스라고 더 애정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이었구 그 쪽에 매력을 느꼇지만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어요. 물론 늘 관심은 갖고 있고 파편적으로 얻어들은 것들은 있지만 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비판이론' 쪽이 가장 흥미로왔습니다. 아무래도 학부과정에서 대학교수님들의 영향이 컸겠지만 말입니다. 그 쪽 분들이 강의도 잘하시고 사회참여적이셨거든요. 대학 다닐때도 제 관심은 마르크스와 그의 후예들 정도 였습니다. 지금도 전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의 분석이 이 사회를 읽어내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요. 그런면에서 잡탕 마르크스파 손들어보라고 하면 저기 보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쑥스럽게 손을 들지도 모릅니다. 잡탕 마르크스파와 그 후예들 하면 사실 안걸리는 사람이 몇 없을지도 모른다구요...흐흐 .그렇지만 그건 중요한 여러 가지 중에 하나일뿐 .. 어쨋거나 이런 저런 책을 보다보면 자꾸 그리스가 걸리더라구요. 니체나 아도르노 같은 이들도 그리스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구요...푸코 같은 이들은 후반부에 '그리스의 회귀기'가 오기도 하잖아요. 하여간 어딜 가든지 걸리는 인간들이 몇 있는데 예를 들자면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니체도 꼭 넣고 싶어요. 이런 사람들의 원저작들도 사실 그다지 많이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원저작을 읽는다고 바로 뭔 그림이 나오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관계성 속에서 파악되지 못하면 사실 별 의미가 없는 어려운 내용만 가득한 책으로 끝날 수 도 있잖아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바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들어가지 않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 기간동안 이런 책만 읽지는 않아요. 직업적 학문을 할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구요...긴 시간을 잣대로 삼아서 하면 곧바로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지 않는다고 부담스러울 필요가 없는거지요. 예를 들자면 이 두 책을 가운데 두고 멀리서부터 포위해 들어가는 식으로 읽는거에요. 그러려다 보니 대학교재같은 책들도 읽고 또 읽다가 다른 지류를 타고 잠시 세기도 하고...뭐 그렇죠. 그런데 이렇게 우회하다보면 의외로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걸려요.  그리스 미술 관련된 책도 좀 읽어야 겠다 싶구...펠로폰네소스전쟁사도 그렇고..완역본이 이제 곧 나올 3대 비극작가의 작품들도 다 읽고 싶고...호머와 베르길리우스도 마저 읽어야겠구.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철학자들의 유물론도 상당히 흥미롭고 에피쿠로스의 철학도 그런 의미에서 매력적이구...하여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즐거움이 큽니다. 

Q: 시간도 없고 지면도 한정적이고 보는 사람도 지겨우니 좀 짧게 대답해 주실것을 부탁드리구요..이 책 <그리스 철학>은 어떻게 보셨어요? 

A: 한마디로 하면 '대학교재용 그리스 철학입문서' 정도가 좋을 것 같아요. 다루는 범위도 밀레토스학파부터 해서 플라티노스의 신플라톤학파 까지 다루니 고대 그리스 철학 전범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봐야겠네요. 책 구성은 크게 4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헬레니즘. 이렇게 말이지요. 책의 분량으로 구분해서 그런겁니다. 즉 각 파트가 4분의 1분량쯤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보면 당연히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으로 거론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아시겟지요. 대부분 입문서가 그렇듯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의 절반쯤에 해당하는 겁니다. 

Q: 책의 구성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납득이 갈 만하구요. '대학교재용' 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네요.긍정적인 의미인가요? 

A: 말 그대로입니다. '대학교재용' 이라는 의미는 군더더기 없이 핵심적인 내용만 건조한 문체로 씌였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선생님 아래서 읽는다면 훨씬 풍요로와 질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요즘 인기가 있는 '철학 소설류'와 비교하면 브라보 콘과 죠스바를 떠올리시면 되겟네요. 이 책의 장점은 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는 대신 압축적으로 각 시대와 철학자들의 사상을 요약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신 이런 개념이 태동하게 되는 사회적 관계니 역사적 배경이니 하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많이들 보는 거스리의 <희랍 철학 입문>은 그런 면에서 조금 더 친철한 강의록이지요. 거스리의 경우에는 서문부터 그리스철학에 접근하는 태도부터 설명을 시작하니까요. 친철한 대신 분석적이고 개념적인 면에서는 아무래도 대중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서로 보완적으로 보면 좋을 책인 듯 싶어요. 물론 입문서들 안에서만 비교하면 말이지요. 시기적으로도 거스리의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끝나기 때문에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Q: 다른 장점들이 있나요? 

A: 이 책을 처음에 펼쳐보면 각 챕터들마다 넘버링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넘버링을 해놨을까 처음에는 궁금했는데요...읽다보면 이 넘버링이 상당히 유용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이런 식입니다.  

(214)스토아 학파는 크세노크라테스(128)을 본받아 철학을 물리학,윤리학, 논리학으로 나눈다....이런한 로고스의 개념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33) 과의 유사성은 분명하다.  

214번 챕터의 문장 일부이다. 스토아 학파의 개괄을 그리는 장인데.....플라톤 후기학파인 크세노크라테스를 살펴보려면 128번 챕터를 보면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은 33번 챕터에 소개되어 있다. 이런 식의 서술은 각 철학학파 사이에서도 발견되기도 하고 또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같은 경우는 앞선 개념들을 재설명하는데도 이용된다. 

186번 챕터 중 일부--'아레테'의 사용범위는 도덕적 언어의 영역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도구들이나 수공 기술자,그리고 신체기관들도 인간 자체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아레테'를 가질 수 있다. 이 개념은 능력의 개념과 연관된다.(168) 

168번 챕터 중 일부- <영혼론>에서 발췌....형상은 실제의 활동을 위한 능력이다. 영혼은 한 살아 있는 생명체의 형상이며 그것은 도끼의 기능 수행 능력과 그리고 눈의 시각 능력에 비교된다.아리스토텔레스는 합성체인 우시아,형상,질료를 서로 구별한다. 그리고 형상은 현실태와 동일시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형상은 제 1의 현실태이며,이것은 제2의 현실태와 구별된다....결국 형상 또는 제 1현실태는 식물이나 동물에 있어서 그들의 제2현실태인 자신의 생명활동을 수행하는 잠재적 늘력이다.  

Q: 아무래도 압축된 여러개념이 폭풍우처럼 몰아치고 있을때 그 때 그 때 네비게이션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긴 하겠네요. 앞서 본 이야기들도 정신없이 몰아부치는 개념들 앞에서는 잊어버리곤 하는거니까요. 그 외에 다른 장점은 뭐 없나요? 

A: 한 철학자나 학파의 시작은 대개 생애나 구성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하는데요...여기에는 후세의 연구가들의 해석에 따라 좀 다르게 읽히는 부분들이 있지요. 프리도 릭켄은 짧지만 이런 후대 분석가들의 해석을 소개합니다. 예를 들어 철학의 시작이라는 밀레토스학파 부분을 보지요. 도대체 밀레토스와 함께 무엇이 시작된거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새로운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저자는 몇 가지 상이한 접근을 소개하지요. 버넷의 경우 밀레토스인들의 신화와의 단절을 강조합니다. 반편 콘퍼드는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이 실험을 알지 못한 검증할 수 없는 것으로 그저 언어의 추상성에서만 신화와 구별된다고 합니다. 이 둘 사이에 예거는 이오니아인들이 합리적이고 경험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신학적 동기를 무시할 수 없다고 합니다.예거는 이 시기를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신학기라고 명명하지요.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출발을 가지고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듯이...뒤에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체계에 대해서도 강조점에 따라 다른 부분이 있지요. 길게는 아니지만 이런 걸 언급해주는 것은 넓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측면에서 좋아 보입니다.

Q: <그리스철학>을 보면서 특히 좀 어렵게 느껴진 부분이 있었다면? 

A: 어느 한 부분이 쉬웠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구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쪽이 좀 어렵더군요. 특히 인식론부분에서요. 아무래도 인식론쪽에 대한 기초가 좀 부족해서 그런 것 같기도하구요. 언어를 중심으로 논리 함수 안에서 존재론을 탐색해나가는 방식이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크게 어려운 것은 '그리스 사유' 전체를 유지하는 공통된 가치들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과 우리와 다른 것은 물론이고,그들의 사유방식와 사유의 토대가 현재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그런 차이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본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일은 아니었습니다. 이건 그리스 철학을 읽는 내내 따라 다닐 문제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플라톤의 '국가'가 지금같은 체계를 갖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럼 뭐냐? '폴리스'다. 그럼 '폴리스'는 편의상 '도시국가냐?' 그렇다. 편의상 그렇게 하자.  그럼 '도시국가'는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토대와 어떤 가치 위에 서 있느냐?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규모의 도시냐? ....그런데 이게 아니라는 거지요. 이런 개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라는 개념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절제'라는 개념에도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단어들이 지금과는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일종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 위의 문장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결국 '내가 아는 것이 그들이 아는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게끔 말이지요. 어쨋거나 누적된 현대적 이성과도 거리를 두면서 또 오래된 미래의 이성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점이 녹록치 않은 작업입니다. 

Q: 시간도 많이 되었고, 대단한 내용은 없지만 할 말은 다 한것 같지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묻고 끝내겠습니다. 리뷰를 이따구 방식으로 작성하신 이유를 한번 물어보고 싶고요.제 출연료는 줍니까? 

A: 음...제가 출연료를 요구해야하는거 아닌가요?  

Q: 음..그렇게 되나요? 그럼 서로 없던 이야기로 하구요..앞의 질문, 리뷰를 이딴 장난질로 처리한 이유나 들어봅시다.  

A: 딱히...뭐 매번 똑같이 쓰는 것도 지루하구요. 리뷰 형식도 가끔 바꿔주면 좋잖아요. 그리고 <그리스철학> 이란는 엄청난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할지 답도 없구. 책의 구성만 쓰기도 그렇고, 각 장을 정리할 수 도 없구,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야 앞으로도 또 울궈먹을테니까 그 때 그 때 하면 되고....하여간 궁여지책이자 지루함을 달래는 방식이었어요. 널리 이해 부탁해요. 

Q: (그럼 그렇지...쯔) 네...알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구요. 앞으로는 이딴 짓은 좀 자제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A: 네...이런 진부한 방식말고 색다른 형식실험을 모색해 볼께요. 능력된다면...감사합니다.(너 죽었어...사람불러 놓고 이따구로 인터뷰질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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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의 말로 기억한다.(정확하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말이 시작하는 곳에서 정치가 시작되고 말이 끝나는 곳에서 정치가 끝난다." 

미시적인 정치행위로 본다면 '의회주의'로 국한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모든 담화 행위 -제도화된 형태를 언론으로 본다면- 자체를 정치적 행위로 해석하고 이 의미를 확장하면 지금 한국에서 현재 벌어지는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YTN 전현직 노조간부들의 구속에 이어,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검찰조사와 자택 압수수색이 벌어졌다. 언론은 애써 외면하고,  또 어려워진 경제상황에서 모든 에너지를 생계구출에 힘써야 하는 대중들 역시 이에 큰 관심을 갖지 못한다.  

현 정부의 파국적 행동으로 인해 받게 될 심각하게 상처입은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이어지게 될 사회적 고통에 대한 우려가 높다. 현 정부의 태도는 자신들이 립서비스로 달고 다니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서도 멀어진지 오래다. 실제로 '건강한 보수주의자' 라면 이미 이 정권과 스스로의 정체성을 단절시켜야만 한다. 이 정권과 정서적으로 결별한다고 해서 그들이 쏘아붙이듯이 '좌파'나 '반미세력'이 되지 않는다. 여전히 2MB에 미련을 갖는다면 결국 스스로 '한국적 보수주의' (수구세력)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지난 대선에서 설레발이치는 진보세력과 상고 졸업한 대통령이 꼴사나와서 2MB에 투표했더라도 지난 1년이면 과감히 결별을 선언해도 '초지일관의 양심 ' 에 저촉되는 행위는 아니다. 이미 이 정권은 지난 1년간 스스로 정치를 끝장낸 경험이 여러번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앞으로도 스스로 '정치포기'를 선언할 가능성이 100% 이상이기 때문이다. 

 현재 YTN이나 PD 수첩 구성원들에 힘이 되는 것은 모르는 수 많은 사람들의 지원이고 가장 힘든 것은 가까이 아는 사람들의 지탄과 무관심일게다. YTN이나 MBC 내에서도 이 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척결하고픈 이들은 상하층부를 막론하고 고루 있을게다. 그런 차원에서 이 들의 고통에 대해 잠시라도 함께 고민하고 작은 지원 하나를 건네려는 선한 의도는 큰 힘이 된다. 내가 별로 해 줄게 없다는 생각은 맞는 말이지만 바른 말은 아니다. 하던 일을 팽개치고 MBC 앞으로 갈 수도 없고,YTN 사원들의 생계를 위해 내 생계까지 팽계칠 수도 없다. 우리는 현실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면 된다. 작은 물방울이 모이면 바위를 뚫는다. 물방울이 스스로를 작은 물방울이라고 자학하지 않고,또 물방울이 커다란 망치였다고 허장성세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내 주변에는 '한국형 보수주의자들'이 동물원 악어떼들처럼 우글우글 모여서 하품을 해대고 있다. 높은 놈들은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낮은 놈들은 요리조리 눈치와 잡아야할 줄을 바라본다. 그도 아니면 무심하거나. 내게 YTN 나 PD 수첩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낸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알고 있어도 서로 말하지 않는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안그래도 회사도 시끄러운데 답답한 이야기들 보다야 WBC가 나을테니... 

다른 이야기지만..말이 나온 김에...최근에 이 회사에 제일 높은 인간은 석달이나 밀린 보너스를 지급하면서 '회삿놈중에 한 명도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는 놈 없네' 라며 간부회의에서 싸가지 없는 직원들에 대해 말했단다.팀 회의에서 국장이란 사람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전했다.  이 말에  몇 명이 웅성거리며 또 피식거렸다. '나..원...노동의 개념조차 없는....제길...지가 보너스 준건가?...우리가 일한 몫을 그동안 못받던거 받은거지.' 하여간 이런 자들과 그들 밑에 줄서서 차기를 노리는 자들이 한 다스씩 있다. 이런 자들이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말한다. '보수주의자'들도 좀 세련되지려면 이딴 무식한 발상들과는 선을 그어야 하지 않겠는가? 2MB스타일이란게 위와 똑같은 방식이다. 좌파니 뭐니 하는 사람들 말고, 또 진보니 뭐니 하는 사람들 말고, 그냥 4년에 한번 투표하러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2MB에 분노해주어야 한다.  

현재 우리는 독재시대의 실용적 매력과 현실적 이익의 맛이 무언지 아는 자들의 욕망에 역사와 미래를 내맡기고 있다. 그 끝은 파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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