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은 冊으로 쓰고 싶다고 했던가... 

book으로 쓰던  livre 라고 쓰던 상관없다. 

난 책을 좋아하지만 가끔 '책'을 왜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심심풀이로, 똑똑해지려고, 여자들 한테 좀 있어 보이려고,  미적 향유를 위해, 자기인식 확장을 위해, 또는 세계의 구성을 위해, 변혁의 근거를 위해, 밥벌이를 위해, 상대를 누르기 위해, '오난'을 위해...  

이런 생각을 한다고 당장 '책'을 끊고 산으로 가지는 않는다. 산에 사는 건 쉬운지 아나보지?  

이런 글이 있는데.. 

"텍스트적 저항을 위한 글읽기가 식민주의 텍스트 내부의 모순과 양면성의 '이론적' 해명에 전적으로 매달릴 때, 전복적 주체성은 식민화된 혹은 탈식민화된 주체로부터 분리되어 서구의 제도권 문학비평가가 실시하는 텍스트 작업 속으로 함몰될 수 밖에 없다." 

최근에 보고 있는 탈식민주의 관련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글에서 '식민주의' 대신에 '이론'이나 '학문' 또는 이의 전달체이자 상징으로서 '책' 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  어찌되었거나 가장 마지막 구절에서 다시 만나는데 '텍스트 작업 속으로의 함몰'이다. 텍스트 작업으로 빠져드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선천적 능력도 필요하고 개인적인 말하지 못할 고생도 감내 해야한다. 자기치열함이 없으면 제대로 함몰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함몰은 선택적으로 마땅히 대접 받아야 하지만 또한 일반적으로  비난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원죄처럼 '텍스트의 함몰' 은 이마에 걸고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일단의 비건강성의 증후로 제시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야 하는가? 그런 개인은 어떤 자세여야 할까? 

최근에 바람구두님도 인용한 <대학>의 첫장을 인용한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남명 조식 선생은 이 구절을 학문의 요체로 여러 번 강조하셨다. 그리고 선생이 직접 말하기를 "반평생이 넘도록 이 뜻을 공부 했지만 그 의미를 다 헤아리기 어렵다." 라고 말씀하셨다. 알아서 듣는 것은 후학의 몫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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