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슬 PD, 서초서에서 중앙지검으로 송치
손에 수갑 채워져 … PD연합회 “김보슬 PD를 석방하라”
 

2009년 04월 16일 (목) 10:07:17 김고은 기자 nowar@pdjournal.com
 
“김보슬, 힘내라!”

지난 15일 저녁 전격 체포된 〈PD수첩〉 ‘광우병’편의 김보슬 PD가 16일 오전 서초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 송치됐다.

15일 저녁 7시 55분께 서울 잠원동 약혼자의 집 앞에서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체포된 김보슬 PD는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송돼 이날 자정까지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서초경찰서로 송치돼 하룻밤을 보낸 김 PD는 16일 오전 다시 중앙지검으로 송치됐다.

이날 오전 8시 전후부터 서초경찰서에는 MBC 시사교양국 PD들 20여명이 모여 들었다. 김 PD의 약혼자이자 오는 19일 결혼을 앞두고 있는 〈북극의 눈물〉의 조준묵 PD는 잠을 좀 잤냐는 물음에 푸석푸석한 얼굴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 15일 저녁 체포된 김보슬 PD(오른쪽에서 두번째)가 16일 오전 서초경찰서를 빠져나와 서울중앙지검으로 송치됐다. 김 PD의 두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다. ⓒPD저널
오전 8시 30분. 김 PD가 경찰들에 둘러싸인 채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으며, 동료들을 보며 애써 눈물을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동료 PD들이 “보슬아, 밥 먹었어?”라고 묻자 김 PD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은 “김보슬, 힘내라!”, “김보슬, 파이팅”을 외치며 김 PD를 격려했다. 김 PD는 차에 올라타 경찰서를 빠져 나갈 때까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김보슬 PD는 현재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전현준 부장검사)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를 체포한데 대해 “반인륜적 수사”라는 비난이 잇따르는 가운데, 검찰은 체포시한인 48시간 이내에 김 PD를 귀가조치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국PD연합회는 검찰의 김보슬 PD 긴급 체포에 대해 16일 성명을 내고 “이성을 상실한 독재정권에게 인륜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라고 성토하며 “지금 당장 김보슬 PD를 석방하고 〈PD수첩〉에 대한 정치보복수사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전국언론노조(위원장 최상재)와 MBC 노조(위원장 이근행)는 16일 오후 3시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김보슬 PD 체포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 딱히 더 할 말도 없다. 어떤 이가 그런다. "두환이 때라면 잡혀가서 고문감인데...그건 아니잖아? 그래도 지금이 옛날보다 훨씬 나아진거야?"....  " .. "  (개쉐이!!...그러나 네가 아무리 짖어도 널 매달지는 않으마.그건 내 신념과 어긋나서 그런거지 네가 매달릴 자격이 부족해서 그런건 아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는 언론학부 1학년들이 배우는 유명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글이 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침묵의 강요'는 '전원적'으로 온다. 공영방송이고 나부랭이고 -아 제길! 공영방송 지키자는데 또 힘빼내냐고 우기지 마라. 나도 공영방송 지킴이다. - 언론과 언론인은 지배적 담론의 재생산자이다. 그 구조 안에서도 춤 출 줄 아는 능동적 주체들의 역량이 있긴 하다. 하지만 구조의 특성이 그렇다는 거다. 아무리 훌륭한 공영방송도 절대 틀 바깥을 사유하지는 못한다. 방송에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는 식으로 말하지 못한다는 거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대안 미디어'가 왜 필요했겠는가?  -어라..좋아. 이쯤에서 슬슬 방향 전환하는 센스. 전선을 헷갈리게 한다는 비판을 받고 싶진 않다. 

그런 태생적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영방송을 지켜내지 못하면 TV는 끄는게 낫다. 아니 최소한 TV를 통한 저널리즘적 욕구를 채우는 것을 포기하는게 낫다. 막드라마보고, 잘 만든 다큐보고,버라이어티 보고 자면 된다. 이미 그런 사람들도 많지만 여전히 'TV의 저널리즘적 힘'은 강한 편이다. 그 힘을 분쇄하여 자기편에 유리하거나 무심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현 정권의 의지이다. 쉽게 말하면 '모든 방송을 민영화,엔터테인화'하는 것이 지금 애네들의 지향점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중핵에 <PD수첩>이 있는거다. 여기를 일망타진하면 'TV저널리즘'의 한 축을 무너뜨릴 수 있고 그것의 연쇄는 앞서 말한 것처럼 TV시청자들을 '스포츠'와 '웃음'의 총체적 변증법의  회로망으로 싸잡아 넣는거다. 단계적으로 그렇게 방향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시스템이란 것은 일정의 경로경직성이 생겨서 한번 어떤 형태로 틀잡아지면 부분적 수정은 가능하지만 전체적 방향을 뒤틀기란 상당히 힘들다. 미쿡에서는 절대로 BBC가 나올 수 없는 이유가 그래서이다.  지금으로서는 '공영방송'을 지키고 살리는게 희망이다.  

 다 아는 이야기 아니냐?   역설적이지만 조상들이 명당 자리 잡아 놓은 이들은 좋겠다. 죽지 못하니 삐뚤어질테다. 사장이 노조 간부들이랑 술 먹자는데.. 나한테 한 마디도 걸지마.!! 당신이랑 이야기하기 싫어! 당신은 사오정이야. 귀는 안들리고 왜 입만 열면 나방,해삼, 말미잘 이런것만 나와....삐뚤어질테다.  

아...나 원...세상이 글쓰기 힘들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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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시장지향의 정신을 거부하였다. 개인이 자신의 효용함수만 책임지면 된다는 논법은 사회의 실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문화에서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온갖 종류의 선택 역시 의심스러운 것이다. 선택이라고 해봤자 진실로 중요한 선택은 결여된 채 단지 삶을 은폐하는 광란적인 골라뽑기만이 난무할 뿐이다. 이것들은 오히려 삶의 방식보다는 삶에 대한 열망의 부재, 즉 '쉼없는 발걸음이 끝없는 뒷걸음으로 나타나게 된 형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비마르크스주의자의 말이다. 좌파가 아니어도 당연히 시장일방주의는 거부할 수 있고 거부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나라의 문제는 사상 시장에서 한 줌에도 미치치 않는 스펜서류의 '사회진화론'을 믿으며 스스로 당당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온갖 점잖은 말과 성찰의 노력도 궁극적으로 '사회진화론'의 세련된 포장을 위해서라면 악어의 눈물과 다르지 않다.  '사회진화론'을 가지고 '현실적 접근'과  '합리적 사고' 그리고 '건강한 자본주의'의 수호자인양 행세하는 것은 애초부터 글러먹은 것이다.  

 나의 '관용관'은 '불관용'을 포함하는 관용관이다.  만약 '관용'이 그런 '앙똘레랑스'를 포함하지 않는 무책임하게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말이라면 나는 스스로 '불관용주의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기준을 '적대'라고 말했다. 실제 '휴머니즘'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휴머니즘'을 말하며, 우리는 모두 하나인 척, 인류는 모두 동포인 척한다. 그리고 왜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고 나누고 하느냐는 것이다. 모두 평화롭게 살길을 찾지 않고 나누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엔 말많으면 빨갱이라는 결론까지 간다. 그런데 평화주의자를 사칭하는 '사이비 휴머니즘'이 은폐하고 있는 것은 대략 1분 미만만 생각해보면 그 말 뜻을 알 수 있다.   

내게 '불관용'의 대상 중 하나는 '사회진화론자'이다. 사회적으로 나는 어떤 성찰과 어떤 수사학을 구사하더라도 세칭 '사회진화론'을 신봉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불관용'할 것이다. 물론 내가 그들을 사회에서 척결할 수는 없고 더 나은 사회가 오더라도 그들이 결단코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그들의 미사어구에 일일이 대꾸할 생각도 없으며, 그들과는 '적대적'이라고 선언할 수 있다. 뭘 공부하든 좋다. 뭘 성찰한든 좋다. 그 결과가 '사회진화론'을 검증받고, 세련되게 포장하고픈 것이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인류와 역사, 그리고 지구를 위해 도움이 된다. 부디 제발 가만히 있어라. 불관용할테다...삐뚤어질테다.      

"인간 존재의 정상적인 상태는 남을 앞지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려놓은 삶의 이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앞다퉈 나가기 위해 밟아 뭉개고, 밀치고, 팔꿈치로 치고, 서로의 발뒷꿈치를 밟는 것이 사회생활의 존재양식이며 바람직한 인간의 운명은 아니다. 이는 산업이 진보할 즈음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불쾌한 징후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왜 다른 사람이 필요하는 것보다 이미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부귀의 상징 외에는 아무런 쾌락도 주지 못하는 소비거리를 갑절로 늘리는 일로 추앙받아야 하는지.." 

 .... ....고전파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자유론>의 존 스튜어트 밀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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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 한길컬처북스 23
바트 무어-길버트 지음, 이경원 옮김 / 한길사 / 200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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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헤어조그의 영화 <위대한 피츠카랄도>를 기억하는가? 피츠제랄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보다는 조금 덜 유명하지만 그래도 관뚜겅 열기전에 봐야할 '세계 100대 영화' 같은 강박적인 목조르기를 요구하는 목록에 가끔 들기도 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오페라매니아인 피츠카랄도가 자신의 근거지인- 제국주의 사업현장이다- 아마존 강가에 오페라 하우스를 짓고자 한다. 다들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무모함마저 번뜩이게 보이는 금발의 백인은 증기선을 타고 오페라하우스를 지으러 간다. 하지만 가는 길에 난관에 부딪힌다. 폭포와 물살이 세서 도저히 원하는 목적까지 뱃길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무모한 예술광은 드디어 사람들이 꿈에서나 상상하던 일을 실행한다. 배를 타고 산을 넘는 것이다. 실제 촬영도 증기선을 끌어서 산을 넘는 장면을 찍는다.마치 다큐멘터리인양 말이다. 영화 호사가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킨 건 실제로 인력을 동원하여 배를 산으로 넘긴 헤어조그의 광기어린 스펙터클이다. 이발소 그림같은 CG가 난무하는 <반지의 제왕>류의 스펙터클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르다. 실제로 이 장면은 아마존의 야성과 날 것으로서의 광기가 결합을 하여 눈을 뗄수 없게 한다. 대형 화면에서 봤다면 영화의 줄거리나 해석을 떠나 이 장면이 주는 스텍터클과 살아 있는 장면을 만든 뒷이야기가 주는 아우라로 인해 순간적으로 해석적 감각이 교란되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위대한 피츠카랄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원주민과 피츠카랄도의 첫 대면장면이었다. 서구와 비서구의 시선이 교차하는 긴장을 상당히 멋지게 영상화해내었다. 아마존강의 고요한 흐름과 간헐적으로 울어대는 이름모를 이국의 새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숨어 있는 눈동자들. 이런 긴장에 이물감을 던져 넣는 것이 축음기를 통해 나오는 오페라다. 서로 다른 문명이 서로를 맞대고 숲의 리듬과 오페라의 멜로디를 따라  이렇게 치열하게 만나는 장면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바둑 고수들의 대국처럼 서로 한 점의 포석만을 해놓고 장고를 하는 것 같았다. 오페라는 이 영화를 끌어가는 모티브이자 피츠카랄도의 의지이고 또 문명의 상징이다. 그리고 또한 피스카랄도의 실패의 증거이며 끝까지 잃지 않으려는 서구 인본주의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흔히들 영화<쇼생크탈출>의 교도소 오페라씬을 영화 속 최고의 오페라 씬이라고 추천한다. 그렇지만 내게 -그 해석의 정치학을 떠나서- 최고의 오페라씬은 아직까지는 <위대한 피츠카랄도>의 고물 배 위의 오페라씬이다. 실패했지만 시거를 하나 물고 뱃전에서 오페라를 듣는 클라우스 킨스키의 미소는 잊혀지지 않는다.그리고 그의 당당함에 영화의 지배적 의미가 부여될 때 이 영화의 정치성은 '위대한 인간의 휴머니즘'이라는 식민담론이 백인을 미화해내는 정치적 전형을 따라가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인간 승리'라는 유혹적인 반정치의 방식으로 정치의 문제를 반어적으로 각성시키는 셈이다.  

바트무어 길버트의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를 이야기 하기 전에 글머리가 너무 무거워졌다. 언젠가 '피츠카랄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했는데 떡본김에 제사지내는 심정이 되었다. 이 책은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입문서로서 상당히 잘씌여졌다.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평이해서였는지, 역자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돋보여서인지  이런 류의 번역서에서 종종 발견되는 소화불량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이 특히 돋보이는 것은 입문서로서 가져야 할 서술의 방법과 접근태도가 일목요연하다는 것이다. <탈식민주의 저향에서 유희로>의 구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에 해당하는 부문에서는 '탈식민주의 이론'의 전반적 경향을 일러둔다. 탈식민주의에 대한 현재적 비평-즉  텍스트화된 자족적 비평과 학문적 정체-를 소개하고 이런 비판의 정당성과 반론의 근거를 이야기한다. 먼저 저자는 현재 '탈식민주의 이론'을 둘러싼 비판적 논의를 이해하기 '탈식민주의 비평'과 '탈식민주의 이론'을 방법론적으로 구분한다. 이 책에서는 후자쪽에 중심을 두고 이후 주요 작업이 이루어진다. 본론에는 '탈식민주의 이론'의 '성삼위'라고 말해도 무방할 세 명의 주인공들의 이론이 소개된다.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호미 바바이다.(올해 번역 예정된 책 중에 호미 바바의 <민족과 서사>가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책에서는 먼저 각 사상가들의 이론이 출발하게 된 계기와 방법론, 그리고 그들 이론의 변천사를 정리한다. 이 세사람은 모두 탈식민주의 이론가로 칭송받지만 '탈식민주의'에 접근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사이드가 '서구/비서구'의 이항대립적 구도를 명확히 전거로 삼고 있다면 스피박은 '하위계층'과 '페미니즘' 문제에 호비바바는 '양가성'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보니 서로 비판하며 충돌할 수 있는 대목들이 나온다. 저자는 그런 문제들을 그 때 그 때 상호비교를 통해서 설명한다. 즉 차이를 통해서 그들 이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명쾌하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 세 명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나면 결론 부문에서 저자는 '탈식민주의 비평'과 '탈식민주의 이론'과의 변증법적 화해를 도모한다. 기본적으로 이 둘 사이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인정하면서 다양성과 차이성의 발현을 해소되지 않는 방식으로 결합시키기를 요구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대위법적인 화해' 그 중에서도 '무조협주곡'의 화해라는 것에 저자가 긍정적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저자는 먼저 현재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한 항간의 비판으로 식민성 논의에 '고급 이론'의 도입을 통해 '텍스트적 혁명' 즉 지적 유희단계로 나아가는 경향성에 대해 언급한다. 이런 차원에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시작점 또는 분기점으로 보는 것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다. 이 책의 선구적 업적은 사이드의 옹호자나 비판자들 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을 기점으로 해서-그래서 저자 입장에서는 이 책을 분기점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탈식민주의 비평' 과 '탈식민주의 이론'으로 구분한다. 그렇다면 '탈식민주의 이론'에 전거가 되기도 하고 또 탈식민주의 이론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되기도 하는 '탈식민주의 비평'은 무엇인가? 시간적으로 보자면 물론 <오리엔탈리즘>이전에 존재했던 강력한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비평전통이다. 이 책은 주로 아프리카 탈식민주의자들을 이야기한다. 물론 다양성과 차이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책 후반부에 일종의 모델로서 카리브해 비평모델을 설명하기는 한다.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탈식민주의 비평가는 알제리의 파농이다. 그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탈식민주의 비평'의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또 '탈식민주의이론'이 역사성과 물질성을 수혜받을 수 있는 전거로 자주 제시되곤 한다.  

이 책에서는 '탈식민주의 삼총사'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세가지 비평의 잣대가 자주 동원된다. 먼저 탈식민주의 자체 내의 상호비평, 두 번째는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의 작업, 마지막으로는 마르크스주의 비평이다. 아마드의 <이론 안에서>는 이 책 전반에 걸쳐서 여러번 거론된다. 물론 이 세가지는 다시 합종연횡의 방식으로 각각의 이론들의 비판과 반비판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내부 비판과 외부자극이 가능한 것은 궁극적을 '탈식민주의론' 자체가 다루어야 하는 대상이 정치,경제, 문화, 민족, 인종, 역사,정체성, 주체,  등등에 걸쳐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방법론적 접근에 있어서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전거로 삼는 이론들의 혼재성도 문제가 된다. 사이드는 푸코와 그람시를 혼합하려고 한다. 스피박은 데리다와 마르크스를 넘나든다. 바바는 푸코와 라캉이 서로 덧붙여진다. 저자는 여기에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스스로 끊임없이 또는 모순적인방식으로 자신들의 이론을 수정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이드의 경우는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사이에서도 차이가 생긴다. 결정론적인 푸코를 받아들였던 사이드는 후기에 가면서 저항의 문제와 저항 주체의 긍정성에 대해 훨씬 우호적으로 나아간다.또한 방법론적으로도 앞의 저서가 서구작가들의 텍스트 분석을 통한 오리엔탈리즘의 입증이었다면 후기 작업에서는 비서구작가의 작품에 더 높은 관심을 보여서 그 상화연관성을 두텁게 한다. 물론 저자는 정치와 문화의 불가분성이나 일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두 책의 일관성을 강조하는 부분도 잊지 않는다. 스피박은 '하위계층'의 재현을 두고 왔다 갔다 한다. 스스로도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밝힌 스피박이니 오죽하겠는가. 스피박은 사이드에 비해 애초부터 식민담론보다 저항담론에 더 비중을 둔다.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으로 결국 다시 '서구/비서구'의 동질화 반복과정을 택한 것에 비해 사이드가 덜 관심을 둔 이질성과 여성주체 문제를 화두로 꺼내든다. 그녀는 인도라는 상황하에서 '서발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면서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제목만으로도 전통적 질문을 구성해낼 문제에 달려든다. 스피박은 초기에는 하위계층을 완전한 타자로 설명했으나 후기에는 개입을 통하 발화가능성에 기대기도 한다. 또한 발화자로서 스피박 자신의 위치에 대해 인정하면서 탈식민주의 논의 자체가 반복하게 될 또 다른 형태의 폭력에 대해 경계한다. 스피박은 기본적으로 이질성과 차이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전략적 본질론'이라는 개념을 통해 신식민지적 상황의 해방을 위한 연대의 길을 열어놓는다. 호미 바바는 '혼종성'과 '양가성'이란 개념을 통해서 식민주의 권력의 일방적 관계에 다른 선을 하나 긋는다. 바바는 '모방'이란 것이 일종의 저항의 형태로 반복된다고 말하며 모든 문화의 혼종화 과정에 대해 강조한다. 이것은 파농이 과거에 지적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즉 식민권력자는 결코 전제적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며 대항 권력으로부터 늘 불안해하며 또 스스로도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식민 권력의 문제를 조금 더 다양한 측면에서 볼 수 있게 해주기도 하며 또한 극단적인 패배주의적 심리상태에 위안이 되기도 한다. 바바의 이런 생각은 물론 식민관계의 물리적 권력의 힘을 간과한다는 지적과 함께 식민권력에 대한 작용과 피지배자에 대한 작용을 동일한 결과로 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사이드, 스피박, 바바의 이론과 그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들을 정리하는데만도 꽤나 오랜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한 그런 담론 투쟁이 담고 있는 의미까지 되짚어서 둘아본다면 그 두배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방법론적으로 저자가 이 담론 투쟁들을 구획하고 있는 방식들을 따라가는 것이 어쩌면 편의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몇가지 대립적인 개념들이다. 제국주의/ 신식민주의, 정체성/혼종성, 보편성/특수성, 통일성/이질성, 물질성/비물질성, 경험주의/담론주의. 이 책에 나오는 탈식민주의 논의와 그에 대한 비판은 사실 이런 커다란 개념들의 밑바탕하에서 이것들을 배합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제국주의담론'이 물질성과 경험주의에 강조를 두고 있다고 본다면 탈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런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각론으로 봐도 이와 유사하다. 사이드가 개별 식민국가의 다양한 양상에 대해 보편적인 이론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바바나 스피박같은 이들은 탈식민주의 내에서도 차이성에 더 큰 애정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강조는 가끔 또다른 형태의 본질론으로 환원되는 이론적 모순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하위주체'를 강조하며 이론적 구획을 시도하다보면 특정하게 양식화된 하위주체가 발현되고 마는 본질화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만다는 것이다. 바바에게도 그런 문제가 누차 발생한다. 보편적으로 말하자면 의도하지 않았던 특화와 의도하지 않았던 묵살이 발생하게 된다.  

'보편/특수'에 대한 최근의 추세는 물론 절충과 연대이다. 쉽게 말해서 계급과 소수자의 연대같은 이런 나이브한 개념들 말이다.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비판가들 중에는 이런 인본주의적인 나이브함을 환상을 심어주는 행위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어떤 형태로 연대할 것인지에 대한 지도도 없으면서 헛된 망상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결론에서는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한 절충론적 해법과 문화적 혼종성, 다양성, 역사적 차이의 인정과 또한 연대를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탈식민주의의 다양한 논의에 대해 구하의 입을 통해 긍정적으로 묘사한다.일종의 탈식민주의 버전 인도판 '백화제방 백가쟁명'에 대한 긍정성이다.   

" 이러한 문제틀을 탐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백 송이의 꽃이 만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잡초가 자라나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 한가지 사족을 얹자면 이 책의 저자는 문학 전공자이다. 사이드부터 해서 대개의 탈식민주의이론가들이 문학을 텍스트로 탈식민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입문서가 가진 계열성의 특징을 따라간 것이기도 했겠지만 아무래도 문학의 비중이 높다. 이 책에서 사이드에 대한 '제국주의 담론'측 비판자로 자주 등장하는 존 매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가 보완물이 될 수도 있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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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것은 순수하고 젊고 금지된 요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명쾌함 때문이라기보다 많은 것이 약속되지만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틈새를 무한한 완전성들이 메꾸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코 가질 수 없는 분홍 잿빛의 위대함이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p 359-360)  

나보코프, 흐흐흐, 당신은 정말 웃긴 사람이야. 내가 만약 단 한 단어로 당신을 타임캡슐 속에 봉인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을 그런 기억으로 담아 둘 것 같다. 물론 웃긴다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 재미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나 원 별것도 아닌게' 하는 식의 싸늘한 미소일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이 만드는 그것은 이항적인 구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그래서 마치 3월 봄바람과도 같아. 3월의 봄바람을 아나? 그것은 따뜻한가?  그렇다면 차가운가? .아니.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아. 그냥 3월의 봄바람만큼의 웃음이지. 당신이 만드는 웃음은 어느 초등학교 교실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해.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 잔뜩 쓰고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지. 한 아이가 자신있게 손을 들어, 그런데  소년은 순간적으로 어떤 의심이 들었나봐. 그 의심은 올라가려던 팔을 무의식적으로 잡아당기지.그래서 엄마가 새로 준 점퍼의 팔굽있는 부분이 제대로 펴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접히지. 당신이 그래. 나는 그 어쩡쩡한 점퍼의 주름과 양눈가에 자신감과 의혹 사이를 진자운동하는 아이의 눈망울을 보듯 당신이 만든 웃음을 바라본다. 당신의 문장안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웃음이 담겨있어. 미학적이게 웃긴다고 하면 그건 분명 당신의 문장을 두고 하는 말일게야. 물론 당신이 만든 험버트도 아주 흥겹지. 사랑에 조바심난 노친네, 롤리타의 젊은친구들까지 견제하느라 얼마나 애간장이 타겠어. 그리고 또 미성년자 약취유인범과도 변별점을 찾으며 롤리타와 그걸 하려고 하니 얼마나 애써야했겠어. 흐흐흐(아.. 늑대같은 웃음은 아니야? 나는 미성숙한  여자애들은 좋아하지 않아.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말이야..) 

어쨋거나 당신이 웃긴건 사실이고,이건 당신을 저평가하는 말은 결코 아니야.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뒤늦게 당신을 만났지만 당신에게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어. 지난 해에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기뻐한,당신이 이국의 언어로 쓴 첫번째 소설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과 당신의 자서전인 <말하라 기억이여>도 한달음에 읽고 싶어졌어. 물론 조금 시간은 필요할 거야. 오뉴월에 바람난 개처럼 이것 저것 들추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그렇지. 내 이런 습성도 좀 고쳐질만도 한데 나이가 들어도 결코 바뀌지가 않는다. 하지만 내일 모레까지 논문을 내야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주말까지 맡은부분의 발제를 해야하는 것도 아니니 뭐가 어떻겠어?  봄바람의 향기가 더 짙어질때 당신을 다시 펴보던 코 끝에 입김이 어는 시절에 당신을 다시 집어들던...아무도 개의치 않을텐데. 흐흐. 나는 가끔 책을 읽을때 가장 '자유'로와져서 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해. 당신이 글을 쓸 때 그랬을 것 처럼 말이지. 

당신의 소설은 묘한 아이러니에 처해졌어. 당신은 '예술은 예술일 뿐'인 사람이잖아. 그런데 당신의 명성을 알린 책<롤리타>는 이제 미디어적인 용어가 되어 버렸어. 어린이 성범죄와 관련된 기사에는 그래서 가끔 당신의 이름이 오르기도 해. 부고기사들 사이에서 오타난 상주의 이름을 보는 것 같지. 흐흐흐. 당신의 <롤리타>는 말이지. 대중들 사이에서 '도덕주의' 법정에 소환된 피고의 모습이었나봐. 물론 초기에 비평들에서 역시 이 부분은 문제가 되었다더군. 당신의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그 때도 수입이 되니 마니, 어디까지가 삭제되었니 무삭제판이니 하는 말이 있었다니까. 물론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긴 하지. 사실 강한 주제잖아. 그리고 또 당신의 표현수위도 말이지. 어린 의붓딸에 빠진 홀아비 '험버트 험버트' - 당신은 그를 여러형태로 불러, 나는 그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를 때가 가장 좋아-의 사랑과 관능, 그리고 절제와 욕망 사이의 팽팽한 긴장들을 도대체 어느 누가 당신처렴 표현할 수 있겠어. 당신의 문장 한 줄 한 줄을 큰 소리로 읽고 싶을 정도야. 만약 사랑의 대상이 반인륜적이라는 부분을 제체놓고 본다면 당신은 최고의 연애술사야. 선수란 말이지. 거기에 선수들의 허당짓들까지도 짐짓 아닌척 하면서 슬슬 풀어내는 것까지 더하면 당신은 진짜 프로야. 거기에 보는 이들을 좀 가지고 놀기도 하지. 마치 장날의 약장수가 사설을 풀면서 쪼르르 앉아 있는 아이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 처럼 말이지. 인정해야겠군. 나야 말로 당신이란 약장사에 정신줄 놓고 따라가다 해지는 줄 몰랐던 그 꼬맹이라고 말이지.  

물론 당신의 소설에는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의 흥겨움과 구절양장 꼬부랑길을 걷는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야. 당신의 <롤리타>는 말이지...음...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말하자면 험버트만큼이나 지적이지. 소설이 시작하면 당신의 험버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어있어. 그리고 롤리타- 빌어먹을, 리처드 실러부인이라며...나중에 알았잖아. 당신은 하여간 늘 이런식이지만-도 딴나라사람되어 버린 거지. 당신은 험버트가 남긴 장문의 배심원 증언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최소한 사형은 스스로도 너무 과다하다고 믿는 지적인 구대륙의 이 용열한 백인의 자기변명서말이지. 모르지. 지적이며 상냥하고 예의를 아는 신사였으니 유럽식 자존심으로 진실만을 이야기할지도...당신은 군데 군데 당신이 만든 퍼즐을 풀어갈 조각들을 숨겨놓지. 나는 사실 처음부터 당신이 그런 게임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까치가 날아가며서 떨어뜨린 감처럼 등장하는 험버트와 롤리타 주변 인물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지. 물론 그렇다고 당신이 떨어뜨려 놓은 모든 흔적들을 다 수렴해서 하나로 꿰지는 못했어. 이게 무슨 범인 밝히는 추리소설도 아니잖아. 흐흐흐  하여간 당신이 복수의 일념으로 퀼티를 만난 것은 잘한 일이야. 당신의 복수장면은 아주 그럴싸했어. 왠지 내게 그 장면을 영화로 만들라면 '뮤지컬' 처럼 해보고 싶더군. 팀버튼 식의 세트나 의상으로 무대설정을 하고 말이지. 조금 시기는 빠르지만 로버트 레드포드의 <위대한 개츠비>같은 분위기로 당신과 롤리타의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퀄티와의 대면장면에서 갑자기 <가위손>이 되버리면 어떻게 될까? 영화는 박살나고 평론가들의 몰매를 맞겠지만 '허...' 하는 바람빠지는 웃음을 만드는데는 공헌을 할꺼야. 험버트와 퀄티의 대결을 역자는 '반사실주의'와 '사실주의'의 대결이라고 해석을 했더라구...당신이 작품 전체를 통해서 소설/반소설 사이의 여러가지 예들을 보여주고 있기때문에 그런 해결의 돌파구로 그 장면을 해석하는 것이 결코 낯설지는 않아. 그래도 당신은 옛날 사람이 되나서 그런지 여전히 실체와의 결별을 선언하지는 않는듯해. 비록 사실주의와의 결별은 선언했겠지만. 요즘 애들은 좀 더 애니메이션적이고 사이버하다구. 당신의 포스트모던한 방식에 영향을 받은 요즘 사람들의 영화는 이미 그런 '자기증명의 과정'조차 불필요하다고 본다구.  

어쨋거나 험버트의 전체주의적 시선만 계속봐서 목이 좀 아프기는해. 왜 그런거 있잖아. 한 쪽 방향으로 목이 돌아가서 뻣뻣해진 거. 시선고정.험버트와 당신의 시선고정이 만든 디스크야.흐흐. 그 시선이 전체주의적이지만 모든 것을 관통시키고 고정시키지 않아서 다행이야. 전지적 주체와  유동성의 주인공이 동인인물이 된다는 것이 흥겹지. 그 사이의 떨림이 재미있었다니까.^^  결국 그런 시선이 결코 압제적일 수 없는 것은 환상이라는 빈공간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설 속에서 험버트는 이런 말을 하지. 

 "내가 미친 듯이 소유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었다. 또 다른 환상적인 롤리타, 아마도 실제보다 더 리얼한 롤리타. 실제의 그녀와 겹치고 둘러싸며 나와 그녀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소녀, 정말 그건 그녀 자신만의 삶이 아니었다."

나는 이 소설의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모두 이 문장과 어떤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선생님, 정말 '소설' 을 잘 쓰신거에요. 정말 '소설'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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