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직히 촛불을 잊었다.그렇다. 나는 잊었다. 

그런데 오늘 낮에 지난해 내가 촛불에 대해 뭐라고 썼는지 대략 살펴봤다. 내가 쓴 글 보다 비밀 댓글들이 많았다. 대략 세가지로 정리해보니... 

1) 무중심성이 가진 현실적 딜레마 

2) 비폭력에 대한 강박증 비판   

3) 과도한 낙관주의에 대한 경계   

이렇게였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이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나는 생각한다.특히 '전화'문제에 대해서는 그렇다.(나만 그렇게 생각하니까...즉 대세에 아무런 지장없는 광인의 헛소리이니 딴지 걸지마라. 아직 꺼지지 않은 촛불에 힘을 빼는 짓입니다..는 식으로 말이다.) 

촛불의 주체문제, 이게 사실 지금 촛불 논쟁의 쟁점이다. (그리고예측대로 인신공격으로 끝을 향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의 3가지에 근원적인 모태가 되기도 하고,또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직접 관계하고 싶은 '현실정치 실천'문제와는 선이 다른 더 이론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이다. 현재 논쟁은 '좌파' 내에서의 주체 논쟁이고 내가 관심을 갖는 영역은 '촛불'만의 영역이 아니다. 내 주변에 촛불에 참여한 이들보다 참여하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내 관심은 '촛불-비촛불'의 문제이며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적 힘과 동원의 문제이다. 

내가 주체 문제에서 한가지 조금 수정-내지는 보완한-것은 최초에 나는 이 운동을 '자유주의적 시민운동'으로 파악했다. '비폭력'에 대한 강박은 정권이 허용하는 내에서의 시위라는 한계를 직접 보여주었기때문에 자유주의적 시민운동의 한계와 닮아 있기도 하다. (이 말은 자유주의 시민운동으로 이해했다는 말이지, 자유주의 시민운동을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도대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주의 시민운동을 부정하고 어떻게 변혁을 만들 수 있는가? ) 그렇지만 나는 조금 더 열린 태도로 약간의 차이점에 밑줄을 그으면서 '다중론'과의 절합으로 이동했다. 어떤 분이 '자유주의적 자율주의'라고 하던데...자율주의입장에서는 자율주의가 받는 여러 비판중에 하나인 '자유주의=자율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하여간 내게 운동과정에서 주체범주에 약간의 수정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 말은 내가 자율주의에 동의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자율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최근 논쟁에서 '다중'과 '대중'의 문제에서 나는 '대중'을 지지하는 편이다. 이건 이택광을 지지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택광의 어떤 부분,최원의 어떤 부분,조정환의 어떤 부분...(하여간 나와 이것을 가지고 논쟁하려 하지 마라. 너나 잘하시고 미친개가 짖나보다 해라.)

'대중'이라고 하면 '다중'에 비해 구태의연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쉬운데 그건 오래된 리비스주의 전통에서나 그런 것이다. 네그리의 '다중'에는 도대체 어떤 흠집이 없다. 내게 '대중'은 양날의 칼이다. 나게 이것은 검증된 진리와도 같아보인다.  내가 촛불 와중에 '대중'의 양가성과 그리고 그의 잠재성에 촛점을 맞추기 위해 다시금 들척였던 것이 그람시였다. 마르크스 전통에서 '대중'의 양가성과 그의 긍정적 전화에 최초로 주목한 사람이 그람시였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해와 같은 거대한 촛불은 정권 말기에서나 가능해 보인다. 그 이유는 주체의 분열때문이 아니라 폭력적 정권의 항체 형성때문이다. 정권은 권력의 누수가 오기전까지 사전에 제압할 것이다. 이제 이어폰끼고 할 수 있는 시위는 MB정권 하에서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해보다 오해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저항은 끝났다는 말인가?'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푸코의 말처럼 "권력이 있는 곳에 어떻게 저항이 끝날 수 있단 말인가?" 운동은 촛불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그리고 다음 촛불이 있기 전에도 당장 내 눈 앞에,또 당신들 눈 앞에도, 촛불과는 다른 종류의 저항이 놓여있지 않은가? 죽창을 든 사람도, 죽봉을 든 사람도, 마이크를 내려놓은 사람도,거리에서 홍보전하는 사람도...촛불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계속 운동 중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들도 여전히 그렇다. 그런면에서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내가 패시미스트라고?-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촛불은 잊어라. 너에겐 다른 투쟁이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 맞게 과감하게 응해라." 

 다음번 촛불은 과거 촛불과 또다른 정세와 양상에서 펼쳐질 것이기에 해석적으로는 얻을 것이 있어도 반복을 통해 얻을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없다..라고써야하는데..이젠 뭔 말을 못하겠다.아주..끝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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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회사 자료실에 가면 가끔 <행복이 가득한 집>이란 잡지를 본다. 건축,가구, 인테리어잡지이다. 세련된 요즘 트렌드에 맞게 편집도 글도 사진들도 배치된다. 그런데 잡지를 보면 눈의 호사와 함께 마음 한 구석에 불편함도 생긴다. 실제로 왠만한 경제력을 가지고는 감당할 수 없는 가구들,소품들, 라이프 패턴들이다. 음...이건 이쯤에서 말자. 어떻게 이야기하던 반가운 사람이 있고 또 불편한 사람이 있을게다. 이젠 이런 것 까지 감안하면서 써야된다. 내가 유명인사도 아닌데도 말이다.   

아이키우는 엄마들의 이야기가 가장 진정성 있다고 했더니 곧바로 달려드는 댓글이 '그럼 나머지는 진정성이 없다는 말입니까?' 였으니 할 말 다한 거다. 이런 류의 반응들은 여러가지 변주가 있는데' 당신의 의도가 무엇이냐?' 부터 진보자유주의자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로 '당신이 무슨 파인지 의심스럽다'라는 이야기까지...내가 정치적으로 진보를 가장한 보수라는 거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도 생각하지만...그런데 더 우습게도 어떤이는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하더라. 하여간 '자기의 무엇'가지고 어찌나 여기 저기에 끼워놓고 싶어 안달인지...난 예술가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보니 그것도 용납이 되지 않나보다. 그래도 예술가들에게는 좀 관대한 진보인사들 마저 나같은 일반인이 감히 그런 경계선 영역을 얼쩡거리는 것이 신성모독정도로 보인다. 어떨때는 차라리 내가 예술가였으면 싶다. 온갖 기행을 다 선보이게 말이다. 별 기행을 보인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며 퇴근하는데 명언이 나오더라. 최근 시점에서 내게 최고의 명언이었다. 배철수의 죽은 친구인 방송국 PD가 자주 하던 말이란다. 

 "이해는 바라지도 않는다 오해나 하지마라." 나도 그렇다.  

..하여간 이런 화들이 알라딘의 그 잘난 소통에 대한 최근의 분노의 원인이다.나귀님처럼 다 막아버리고 싶을만큼.  

<행복이 가득한 집>이야기하다가... 대개는 그 잡지에서 사진만 보다가 어제는 다니엘의 사진들 때문에 기사를 좀 읽었다.  

결혼 전에 부산에 있는 천주교에서 하는 재활원에 봉사활동을 다닌 적이 있다. 어떤 단체와 연결되어 간 건 아니고, 그냥 낮에 불쑥 찾아가서 '뭐 제가 낮시간에 좀 시간이 있는데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라고 시작되었다. 그땐 밤 근무를 하고 있어서 새벽 1시에 들어오고 낮 2시에 출근했다. 수녀님은 첫날 원래 자봉에게 시키는 일은 아닌데 오늘 담당자가 아파서 라며...지하 세탁장에서 기저귀 빠는 일을 시키셨다. 엄청나게 큰 세탁기에 엄청난 분량의 기저귀를 빨고 났더니 정말 머리가 어질 했다. 그 다음번에 갔을 때는 기저귀 널기 또는 아이들 밥먹이기 같은 일반 자봉들이 하는 편안한 걸 시켜주셨다. 대개 낮시간 자봉은 아주머니들이 많다. 그래서 가끔 내가 필요한 구석들이 있었다.  

내가 한 일 중 가장 즐거웠던 건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진행해준 거였다. 당시 함께 일하던 친구 몇명을 꼬득여서 음악도 준비해주고, 진행도 보고...^^  수녀님이 다음번 소식지를 보낼 때 손글로 아이들이 정말 즐거워했다는 말을 해주셨을 때 함께 간 친구들과 좋아라 했었다. 이후 밤 근무가 낮근무로 바뀌면서 자봉은 뜸해지게 되었고 회사에서 분기마다 나오는 쌀지원을-현물로 준다- 그쪽 재활원쪽 주소로 바꾸었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가보자고 했는데...아내는 사실 그런걸 보면 마음이 아파서 두렵다고 했다. 그리고 나 역시 일상의 바쁨을 핑계로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런데 이 기사가 그 재활원을 떠올리게 한 거다. 그 곳의 아이들 중 상태가 가장 심한 아이들이 뇌수종 아이들이었다. 머리가 정말 수박보다 더 큰 친구들이 쪼르르 누워있었다. 거기에 오는 아이들은 대게 버려지거나 부모가 양육이 너무 힘들어서 위탁한 아이들이다.뇌수종 아이들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그 때 나역시 들었던 것 같았다. 다운증후군 아이들은 부침성이 많다. 담당 선생님이 절대 안아주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모르고 안아주었다가 진짜 혼난 적이 있다. 아이들이 너도 나도 달려들어 안아달라고 했고 원래 안긴 녀석은 안 떨어질려고 하고.....울고 성질 내고...담당선생님은 아이들이 정에 굶주려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애정을 표현하더라도 세심하게 해야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좋은 의도에서 한 일도 나쁜 결과를 불러 일으킬수 있다.'라는 인생의 한 진실을 진짜 깨달았던 때다.  

예찬이가 더 크면 아이와 함께 가 볼 수 있을까.예찬이에게 사전에 많은 설명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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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이런 말때문에 링크만 걸어둔다...

http://happy.design.co.kr/in_magazine/sub.html?at=view&p_no=&info_id=47899&c_id=0001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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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체난립→단가인하 출혈경쟁→택배노동자에 한계상황
택배비 평균 5년새 3638→2350으로 추락
수익악화…“힘없는 노동자들에게 떠넘겨”
노동자몫 1건 8~9백원…10년전엔 1천원
 
 
한겨레 황예랑 기자
 








 

» 지난 16일의 전국노동자대회에서 폭력시위를 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19일 오후 대전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대전 법동 동부경찰서에서 경찰 버스에 오르고 있다. 대전/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죽음 부른 택배 노동자 현실


‘운송수수료 30원 때문에 사람이 죽었습니다.’ 화물연대 파업 결의, 노동자 457명 연행 등 최근 번지고 있는 극렬한 노-정 충돌의 불씨는 택배 운송수수료 ‘30원’이었다. 대한통운과 택배운송 계약을 맺고 있는 ‘택배노동자’ 76명은 운송수수료를 상자 1건당 920원에서 950원으로 올려달라고 회사에 요구했다가 계약해지 당했다. 이들을 돕던 화물연대 박종태 광주지부 제1지회장은 “끝까지 싸워서 이깁시다”란 글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택배업계 관계자들은 “포화상태인 택배시장의 ‘단가 낮추기’ 경쟁이 결국 화를 불렀다”고 입을 모은다. 흔히 홈쇼핑이나 인터넷쇼핑으로 물건을 주문할 때 개인소비자들이 지불하는 택배비 2500원. 대체 그 뒤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기에, ‘30원’ 때문에 사람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일까? 왜곡된 택배시장과 택배노동자들의 현실을 들여다봤다.

‘배송비 무료!’

요즘 온라인 오픈마켓에선 1000원짜리 물건을 부산에서 주문해도 배송비가 무료다. 많이 받는 데라도 2500원을 넘지 않는다. 국내 택배업체들끼리 제 살 깎기 식으로 단가인하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택배업체들이 받는 운송단가는 2004년 건당 3638원에서 지난해 2350원까지 곤두박질했다. 업체들의 이런 출혈경쟁으로, 피해는 고스란히 ‘택배운송 개인사업자’로 불리는 택배노동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 ‘택배비 2500원’의 비밀 택배 단가 2500원이 배분되는 구조를 보면, 택배노동자들이 왜 열악한 지경으로 몰리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일단 대리점이 수수료로 50%가량을 떼어간다. 이 가운데 800~900원가량이 물건을 직접 배송하는 노동자(사업자)의 몫이다. 하루 100상자를 날라도 겨우 8만~9만원 번다는 뜻이다. 기름값, 각종 보험료 등도 본인이 내야 한다. 더 많이 벌려고 하루 150상자를 배송하다 보면, 서비스 품질이 떨어져 나중에 일감이 줄어든다.

2500원의 나머지 절반엔 터미널간 운송에 들어가는 간선비용과 화물 분류작업, 터미널·대리점 임차료 등이다. 간선운송과 화물 분류작업에도 인건비가 들어간다. 때로는 택배업체들이 많은 물량을 따내기 위해, 단가의 30~40%를 화주에게 다시 주기도 한다. 이런 리베이트 관행까지 포함하면 단가가 크게 낮아진다.

박찬석 미래물류컨설팅 대표는 “10년 전엔 건당 운송수수료가 1000원이었다면 지금은 800~900원대로 낮아졌다”며 “업체들은 이런 단가인하 경쟁으로 인한 수익 악화를 힘없는 택배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맷집 좋은 놈만 살아남는다? 무리한 단가 경쟁에 발목 잡히기는 업체들도 마찬가지다. 대형 유통업체와 전자상거래의 급성장을 등에 업고 2000년대 초 200여곳에 이르렀던 택배업체는 최근 30곳 안팎으로 줄었다. 대형 택배업체조차 영업이익률 1~2%짜리 초라한 성적표를 내고 있다.

국내 택배시장이 급팽창한 것은 1997년 이후다. 정부가 규제완화 차원에서 택배업 진입에 대한 법적 장벽을 허물면서, 중소업체들이 대거 택배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업체 난립에 따른 단가인하 경쟁이 결정적이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오래 버티는 회사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라고 말했다.

지난해 국내 택배시장 규모는 약 2조6천억원(매출액 기준)으로 추정된다. 택배업 종사자는 약 2만9천명이다. 1인당 연간 매출이 1억원도 되지 않는 구조인 셈이다. 택배업체들은 휴일배송, 철도·편의점과의 연계 등 서비스 차별화로 생존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적자를 메우기엔 역부족이다.

결국 지난해 동원그룹이 택배업 진출 1년여 만에 철수하는 등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대한통운이 금호아시아나그룹에 팔리고, 신세계그룹의 세덱스가 한진택배와 통합되는 등 택배시장은 대기업 중심의 ‘빅5 체제’로 재편됐다. 현재 택배시장의 절반가량은 대한통운, 한진택배, 현대택배, 씨제이 지엘에스(CJ GLS), 우체국택배 등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단가인하 경쟁의 ‘덫’에 걸린 것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똑같다. 윤영삼 부경대 교수(경영학)는 “표준운임비를 도입해 택배비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 오늘 203,000원 어치 밀린 택배비를 지급했다. 3달치 밀린 택배비다. 아저씨는 밀린 것을 채근하진 않았다. 

그런데....이런 구조로 운영되었던거구나. 어차피 떼먹지도 못할 돈이고 내 지갑에서 나가는 돈도 아니지만 

내가 조금만 이런 사정을 잘 알았더라면 석달 밀려서 드리지는 않았을텐데.  

물론 우리 정산은 1달씩하는 것이고.. 내가 밀린 건 정확히 1달이다. 앞의 2달은 전임자가 누적해온 것을 

내게 넘긴거... 누락분의 영수증을 대차대조하느라고 조금 더 늦어졌다. 

아저씨가 채근할 수 없었던 것은 괜히 귀찮게 했다가 택배업체를 바꾼다고 하면 

곤란하니까가 아니였을까? 경쟁도 심하다고 하지 않나...

나 역시 그리 큰 돈도 아니니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거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바쁜 척하는지.... 뭔 더 큰일을 처리해야 된다고 ... 

한 사람의 생계와 관련된 일을 어떻게 그리 사소하게 취급했는지. .. ..몰라서 그랬다고 

용서될것이 아니라 몰라서 그러니까 더 나쁜거다. 자학의 채찍질을 삼세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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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페이퍼를 쓰면 곧잘 지운다. 반나절 넘기고 생각하면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지운다. 자기검열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검열은 애초에 쓸데부터 시작하는게 자기검열이다. 그런데 써놓고 지운다는 것은 무언가 장애가 있는 것이다. 그저 생각나는데로 몇 가지 단상을 적어 놓고 지우고, 어떨 때는 댓글을 달다가도 마지막에 생각이 바뀌어 올리지 않는다. 정말 짧은 '좋네요.' 이런거나 자신있게 올린다. 이유는 결국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때문이다. 이건 발화자와 수용자 둘 사이에 공히 존재하는 문제이고 그 틈새에 끼여버렸다. 결국 누구에게나 말을 던질 수야있겠지만 소통은 상호이해가 가능한 자들사이의 몫이다. 

갑자기 예전에 미선,효순 촛불집회-그러니까 2002년인가-<100분토론> 때 손석희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한총련인지,서총련인지,북부총련인지 소속 대학생 녀석이 생각난다. 100분토론을 잘 보지 않는데 우연히 돌리다가 봤다. TV 토론은 말초 감각을 자극하기 위한 쇼일때가 많다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나? 속되게 말하면 '싸움'이라는 스펙터클은 전체적이다. 구경하며 분노하고,열받고,전화 해보고 싶고 그런 관객으로 전락하는 자기를 못느끼는가? 주체적인 TV피플..THIS IS CITY LIFE!! 하여간 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소년이야기다. 열혈청년이 방청객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촛불의 정당성에 대해 단상에 올라온 사람처럼 상기되어 열변을 토했다.거기까지 하고 앉았으면 최소한 '장하다.소년'은 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애송이가 뭔 짓을 했냐하면....갑자기,뜬금없이,애드립으로 진행자 손석희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거다.  

"진행자님은 촛불집회에 나가보셨습니까. 얼마나 벅차고 가슴뛰는 현장인지 느껴보셨습니까...우리는 하나다.무언가 이룰 수 있다라는 그 뜨거운 열기를 느껴보셨습니까? "  손석희가 적지 않게 당황하며 머뭇거리니까 이 열혈청년은 정당성이 자기에게 있다는 듯이 "진행자님은 제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뜨거운 열기를 느껴보셨습니까?" 라고 재차 물었다. 손석희는 "네...알겟구요.그 질문은 답변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진행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대답해야 할 성질의 것도 아니구요.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으니..그럼 다음 의견있으신 분..좀 짧게" 

하여간 이런 이야기였다. 의협심에 불타는 그 소년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손석희처럼 손목에 수갑차고 수의라도 한 번 입었을까? 어디 어디 소속이었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다. 빈정거리는게 아니라 진정으로 잘 자라났기를 바란다. 솔직히 그 때 TV보면서 나는 '저런 빙신같은 애송이 새끼..'라고 해버렸다. 하지만 욕은 하더라도 젊은 날의 그런 치기어림은 이해해 줄 만큼은 된다. 언젠가 쪽팔린 짓이었음을 알기만 한다면..그 애송이새끼가 밑바탕부터 애송이였는지 아니면 젊음의 치기였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잘되었어야 하는데...  

밤도 늦고..또 쓰면서도 또 지울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면서 쓴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자기가 기억상실증이므로 지금 지시하는 대상을 잊게 될거라는 걸 아는 것 처럼... 

언제가 말했는데.. 알라딘에서 가장 진정성있는 소통은 알라딘의 주류인 엄마들 사이의 아이키우는 이야기다. 그런면에서 나도 오늘의 대미는 진정성있는 이야기를-사실 이야기는 그닥 없고 사진 몇장이다.  



자는 예찬이...딱 한번 이런 포즈로 잠을 잤다. 



1....첫돌 아니다. 예찬이는 7월이 되면 3돌이 된다. 그럼 1은 뭘까요?  예찬이와 미리 약속한게 있어서 잊지 않고 밤에 파티하러 갔다. 예찬이는 과자,케익같은 것을 먹지 않는다. 콜라,아이스크림,사탕 이런 것도 단 한번도 먹이지 않았다.(또 해보지? 무슨 근본주의자냐고 ^^) 그런데 왜 케익이냐고...야밤에 떡집은 안한다. 떡집 일찍 문닫고 새벽에 일찍여는거 아시지..^^ 예찬이는 케익은 안먹어도 케익 위의 촛불끄는 건 정말 너무 좋아한다. 예찬이는 아토피가 팔과 가슴언저리에 조금 남았다. 아내는 어린이집 식단을 매일 살피고 예찬이가 먹으면 좀 불안한 식단이 나오면 매번 도시락을 싼다. 어린이집에 아이들이 가끔 과자나 사탕같은 걸 가지고 온단다. 우리에게 도움은 안되지만 막을 수도 없다. 예찬이는 조금 맛만 보고 '이건 먹는거 아니지요'라고 하며 눈길을 주지 않는단다. 대견한 녀석...언제까지 저럴거냐고 묻겠지 ^^ 평생 저러지 않는다. 어디서 보니까 5돌 정도까지 아이들의 입맛을 정크푸드에 길들이지 않으면 아이들은 나중에 저런 걸 먹긴 먹어도 입에 줄줄 달고 다니지는 않는다고 한다.  ... 아...저 1 은 말이지...예찬이 키가 1M된 기념파티다. 대단한 일 아닌가? 정말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1M는 거의 모든 인류의 존재 높이이다. 물론 2M 넘는 사람도 가끔있지만. 그렇게 보면 예찬이가 1M에 들어선건 정말 존재론적으로 의미있는 일이다.인류가 된거다. 앞으로 뒤에 숫자만 바뀌겟지 예찬이는 평생 저 1M와 함께 간다. 그 높이에서 세상을 보고 그 높이를 넘는 꿈을 꾸며 다시 그 높이에서 실천을 할 것이다. 꿈보다 해석이라고...그렇다. 그런 해석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1M파티를 해주었다.   


예찬이가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멀리 본다. '나...머얼리 본다' 라며 예찬이가 한 행동이다. 저런건 어디서 봤을까 ^^ 멀리 봐야지..그래 중요한 거다. 멀리 본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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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환상문학전집 11
필립 K. 딕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봄비가 장맛비처럼 내린 하루다.  

2019년 지구에도 매일 비가 내린다. 일본 신주쿠의 어느 거리처럼 보이는 '천사의 도시' LA는 오래된 고철의 도시다. 빗방울에 오래된 녹이 묻어내릴 것 같다. 리틀리 스콧 감독의 영화<블레이드 런너>에 대한 이야기다. 



워쇼츠키감독의 <매트릭스>가 나오기 이전까지 SF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에 한편이 바로 <블레이드러너>였다. 이 영화의 원작이 바로 그 유명한 필립 K 딕의 소설<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이다. 영화와 소설은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에서는 유사한 부분들이 있지만 결코 같지 않다. 원작자 필립 K 딕의 상상력도 뛰어나지만 거기에 새로운 옷을 입혀 원작을 뛰어넘는 제2의 작품을 만들어낸 리틀리 스콧 감독의 능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행여 이 작품을 아직 못본 젊은 세대가 있다면 찾아서 봤으면 한다.) 필립 K딕의 원작과 리틀리 스콧 감독의 영화를 단순 비교하면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다. 원작에 없는 내용과 설정들이 새로 영화에 등장하고 또 원작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들이 영화에서는 삭제된다. 예를 들어 영화<블레이드러너>에서 가장 멋진 룻거 하우거와 해리슨 포드의 마지막 옥상씬은 소설에 없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다. 4년이란 운명을 다 채운 리플리컨트 로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마지막 대사를 빗물 속에 남긴다.  

"난 당신들,인간들은 믿지 못할 것을 보아왔어. 오리온좌 곁에서 불타던 전함,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에서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C-빔의 불빛들도 보았지.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빗 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가야할 시간이야."  

이런 장면은 리틀리 스콧감독의 독창적인 것이다. 원작에서 안드로이드 로이는 영화의 영웅적 애수를 닮은 죽음을 선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죽음이 그리스 영웅의 죽음을 연상시킨다면 원작에서 그 죽음은 오히려 아킬레우스의 칼에 몸을 베인 이름 없는 트로이 병사처럼 처리된다. 

"릭은 로이 배티를 쏘앗다. 총을 맞자 키 큰 로이 배티의 사체가 철쩍 날 듯이 뛰더니 바닥으로 떨어졌고, 잘 깨지는 재질의 부품을 잔뜩 모아 만든 것 같은 그의 몸이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이 장면만 보면 영화가 물론 더 흥미롭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 K 딕의 원작은 별 볼일 없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가 않다. 주제의식에 대한 집중방식과 형상화의 유형이 다를 뿐이다. 영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추격당하는 리플리컨트의 행위를 통해 직접적으로  질문하고 있다면 소설은 이 문제를 추격자이자 주인공인 데커드라는 대상을 통해 끈덕지게 성찰하고 있다. 소설 속에 마지막 명장면이 없다면 대신 안드로이드 갈란드를 은퇴시키고 나서 벌어지는 사냥꾼 필 레시와 데커드의 장면이 있다. 매우 흥미로우며 철학적인 질문들을 담고 있는 장면들인데 영화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일시적 협조관계에 있는 필 레시와 데커드는 상대방도 자기도 안드로이드일지 모른다는 불신 속에 인간/안드로이드에 대한 정체성 질문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기억이 조작된 안드로이드들은 자기가 안드로이드인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라면 처형에 있어서도 사무적이리 무감각한 데커드는 오히려 안드로이드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안드로이드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기계에 지나지 않는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기계에 부분적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인간적인 특징이 아닌가? 이 장면에서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정체성 뿐 만이 아니라 주인공인 인간 데커드의 정체성마저도 균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은 이외에도 여럿 등장한다. 소설 속에 중요한 장치인 '머서주의'나 '전기동물'같은 것들은 아예 영화 속에 언급되지 않는다. 필립 K딕은 인간/비인간의 정체성부터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그 질문을 '생명', '생' 과 같은 범주까지 끌고 가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데커드가 안드로이드를 처지하고 도달한 지점은 결국 '생'이라는 주제였다. 일종의 '생의 유일성'과 '생명의 불꽃'에 대한 범신론적 깨달음같은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 문제를 궁극적으로 유인해내기는 하지만 소설에 비해서 슬쩍 묻힌다. 리틀리 스콧의 영화 마지막은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디렉터스 컷의 경우 리플리컨드 레이첼과 데커드가 함께 달아나는 씬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레이첼도 도망한 리플리컨트이기 때문에 추격당해야하는 신세이다. 하지만 경찰서 소속의 가프는 선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를 놓아준다. 가프의 은빛학이 그녀의 아파트앞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결국 도망치더라도 그 끝은 '죽음'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또다른 질문이 중요한 토론 쟁점이 되기도 했다. 데커드는 안드로이드인가? 라는 점말이다. 리틀리 스콧은 열린 대답을 내놓았지만 리플리컨트쪽에 힘을 싣는 인터뷰를 했었다. 인간이든 리플리컨트든 결국 시간의 차이가 존재할 뿐 '죽음'이라는 것을 피해 갈 수 없다. 결국 소설이나 영화는 공히 '죽음' 이라는 것을 통해 '생'의 정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죽는 모든 것은 '생'이다. 그것이 인간이든 안드로이드든 두꺼비든. 하지만 죽지 않는것. 영원한 생명은 이미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가장 비인간적이며 비자연적이다. 영원한 생명만큼 영원한 악몽도 없을 것이다. 

영화말고 소설 속에 나오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사회적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21년(소설은 2021년 1월 3일 하루동안 일어난 일이다.) 지구는 디스토피아적이다. 미래사회는 배제를 중심으로 한 인간종의 구분이 이루어진 인종주의적 사회다. 이것은 피부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는 핵전쟁의 낙진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필립 K딕이 이 소설을 쓴 시점은 1960년대 후반이다. 혁명의 시대이자 또 핵공포의 시대였다. 인류는 이제 4부류로 구분된다. 화성이라는 식민지 개척을 위해 지구를 떠난 사람들,  지구에 남겨진 자들, 그리고 그 중에 낙진피해가 심해져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특수자'들, 그리고 인간은 아니지만 노예인 안드로이드. 화성은 지구를 버리고 지구인은 특수자를 배제한다. 그리고 인간은 안드로이드를 부품으로만 취급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계급적 메타포처럼 보이는 설정이다. 

필립 K딕의 원작에는 시대적인 그림자가 묻이 있는데, 앞서 말한 핵전쟁의 공포같은 것이 1차적이다. 그와 함께 지금의 작가라면 전혀 다르게 그렸을 문제들이 자본의 문제들이 이 소설에서는 시대적 한계로 드러난다. 필립 K 딕의 시대는 일종의 '정치의 시대'였다. 사회의 여러 힘들이 쟁투를 벌이고 있었고 그것의 타도대상이든 조절대상이든 공적인 권력에 대한 가능성이 결코 포기되지 않았던 시대이다. 최소한 그 시대에 자본은 아직 사회적 권력이나 정치권력에 복속되거나 아니면 최소한 조절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다. 이 소설에서는 거대자본으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로젠연합이 등장한다. 이 기업의 기술력은 인간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곳이다. 당연히 우주식민지 건설에 있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곳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만든 넥서스 6가 문제가 생겼다. 일종의 하자가 생긴건데 이렇게 되면 넥서스 6의 기술은 폐기되게 된다. 기업 입장에서 막대한 피해이자 식민지 건설에서도 거대한 피해를 보게된다. 그런데 그 기술이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러 경찰서 소속 프리랜스 인간사냥꾼 데커드가 달랑 기계 하나 들고 찾아간다. 경찰서장도 넌지시 이 방문의 의미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여전히 단일한 공권력이 이런 전지구적 자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믿음같은 것이 깔려있다. 이런 것을 빼놓고도 데커드 혼자 로젠연합이라는 거대기업에 대응하는 방식은 어쨋거나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는 설정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몇 몇 장치들, 머서주의나 감정이입기 같은 것은 물론 SF적인 상상력이기는 하지만 마치  '이데아와 시뮬라르크'가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결합된 것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머서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TV 화면앞의 장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커드는 머서와 오히려 합일을 시도한다.이 기계는 인류의 총체적 소통기계인 셈이다. 자기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이 감정이입기와 머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자율적이라는 감정마저도 조절되고 관리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식의 전개는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1984'식의 통제사회의 다른 버전이다. 비릿한 소통이며 파국적인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형상화이다. 거기에는 일종의 네크로필리아적인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Mors certa , vita incerta 

...이 책에서 싫었던 거...너무 친절하게 주인공의 반응과 심리를 '작은 따옴표'로 설명해주려는 장르적인 서술 의지...마지막에 와서 사건을 종결을 위해 기아 변속을 과감히 한 것..책 좀 더 두꺼워지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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